글: 노위병(路衛兵)
진회라는 이름을 얘기하면, 사람들은 바로 떠올리는 가장 많은 단어는 “간신(奸臣)”, “매국노(賣國賊)”, 충신을 살해한 소인배등일 것이다. 진회라는 두 글자는 거의 ‘민족쓰레기’라는 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역사상 진회의 ‘죄상’은 개략 세가지이다: 첫째는 구화매국(求和賣國)했고, 둘째는 항금영웅 악비를 박해했고, 셋째는 금나라의 간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고증해본 바에 따르면, 이 몇가지 역사적인 정설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점이 있다. 진회는 사실 역사에 의하여 억울하게 왜곡되었다. 네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송금화의(宋金和議)에 관한 문제
쌍방의 군사실력: 진회가 매국노로 취급받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금나라와의 화의를 극력 주장했다는데 있다. 당시 화의주장이 정확했는지 여부를 분석하기 위하여는 필자가 보기에, 이성적으로 당시의 형세를 분석해봐야 한다. 남송초기에는 나라를 세운 후 안정되지 않았다. 사회는 흔들렸고 불안했다. 군대의 전투력도 아주 약했다. 그러므로, 금나라와 싸우면 자주 패배했다. <<문헌통고>>의 기록에 따르면, “건염중흥(남송건국) 이후, 병력을 약하고 적은 강하여, 움직이면 패배했다. 그래서 귀퉁이에 웅크려 편안히 왕업을 유지하려고 했다. 장군은 교만하고 병사는 나태했다. 이는 군정이 엄숙하지 못했던 탓이다.” 이것이 당시 남송의 상황이다.
여진은 북방유목민족으로, 춥고 고달픈 곳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고난을 견디고 상무(尙武)의 근성이 있어, 전투력이 아주 강했다. <<금사>>의 기록에 따르면, “장군들은 용감하면서 한 뜻이고, 병사들은 정예이면서 힘이 있었다.” 이것도 그다지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금나라가 아주 적은 병력으로 강성한 요나라를 무찌른 것은 이미 이를 설명해준다.
행군전투는 책을 읽고 노래하고 연극하는 것이 아니다. 실력으로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는 남송의 대장 유광세의 부하인 여경의 말로써 충분하다. “(금나라 총사령관)이 친히 전장터에 나와서 전투를 독려한다. 화살이 날아다니는데도 왕은 갑옷을 입지 않고, 삼군을 지휘하는데, 아주 태연자약하다” 금나라사람들은 전투를 하면서 우두머리가 친히 일선에 나와서 지휘했다. 그렇다면 송나라군사는? “강남의 여러 장수들은 재능이 중급에 미치지 못한다. 매번 출병할 때마다 몸을 수백리 밖에 피해있고, 말로는 지중(持重)한다고 한다” 총사령관이 백리밖에서 지휘하는 이러한 “지중”으로 병사들에게 죽을 힘을 다해 싸울 마음이 생기겠는가? 사기가 이러하니 쌍방의 강약이 어떠한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금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다: 혹자는 금나라가 단기간내에 남송을 멸말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1127년 정강지난이후, 금나라사람들은 북송의 수도 변경(지금의 개봉)을 점령한 후 흠종, 휘종의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아서, 바로 퇴각했고,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그리고 장방창(張邦昌)을 괴뢰황제로 세웠다. 1137년, 금나라병사들은 장강일선까지 치고 내려왔다. 그러나 기세를 타고 남하하거나 그 자리에 주둔하지 않고, 다시 회군했다. 그리고 하남에는 유예(劉豫)를 황제로 세웠다.
금나라사람들의 이 두차례에 걸친 남하에서 알 수 있듯이, 금나라는 남송을 멸망시킬 야심은 품지 않았다. 오히려 남송의 북진하려는 생각을 없애고자 했다. 그래서 두번에 걸쳐 하남에 황제를 세우고, 하남의 땅을 송과 금간의 완충지대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렇게 남북대치를 유지하면서, 자신은 북방을 안심하고 경영하고자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원인때문이다. 첬재, 여진은 비록 전쟁에 능하지만, 부족이 늦게 일어섰기 때문에, 사람수가 많지 않았다. 전투의 목적은 그저 재물을 약탈하는데 있었지, 중국을 모조리 점령할 실력은 갖추지 못했었다. 둘째, 금나라의 후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 요나라의 옛땅을 다스리는데만도 힘이 벅찼다. 그때는 이미 몽골도 흥성하기 시작했고, 서하도 옆에서 웅크리고 있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해서 경영할 실력은 안되었다.
이상의 분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남송은 당시에 북방을 회복할 실력이 없었다. 금나라도 강남을 차지할 야심이 없었다. 화의는 쌍방에게 있어서 최선의 선택이고, 대세의 흐름이었다. 진회가 당시 화의를 극력주장한 것은 당시 형세를 잘 파악한 현명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2. 진회의 화의에 있어서의 태도
진회는 처음에는 화의에 반대했다: 1126년, 금나라병사가 변경으로 진격하고, 송휘종에게 태원, 중산(지금의 하북 정현), 하간의 삼진(三鎭)을 할양해달라고 요구한다. 당시 원외랑이었던 진회는 조정에 4가지 의견을 제출한다: 첫째는 금나라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으니, 그들에게 연산의 1로만 주어야 한다. 둘째는 금나라사람은 교활하고 간사하니 방비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셋째는 백관을 소집하여 상세히 토론하여야 한다. 넷째는 금나라의 대표는 전각의 바깥에서 접견하게 해야 한다. 이를 보면 진회는 금나라에 대하여 그다지 호감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금나라가 “땅을 분명히 요구하며, 들어주지 않으면 변경을 공격하겠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하에서, 황제는 할 수 없이 조정의 백관들을 불러 표결을 한다. <<이십사사찰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70명의 동의하고, 36명이 반대했는데, 진회는 반대한 36명에 속해 있다.
진회는 남송에 대하여 충성했다: 금나라삼이 장방창을 괴뢰황제로 세울 때, 진회는 끝까지 반대한다. 글을 올려 다투었다. 진회는 그 글에서 장방창은 그저 먹고 마시고 놀줄이나 알고,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조정을 위기에 몰아넣은 인물이며,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진회는 이런 인간을 경멸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진회의 송나라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진회가 매국으로 부귀영화를 도모했다는 말이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진회는 금나라에 투항한 간첩인가?
진회는 어떻게 금나라에 갔는가?: 진회가 가장 의심받는 역사의 오점은 바로 금나라에 포로로 잡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포로가 된 것인가? 유수인 왕시옹이 무력으로 백관을 위협하여, 그들에게 장방창을 황제로 올리는 ‘위임장’에 ‘서명’을 하라고 했다. 진회는 서명을 거부했다. 금나라사람들은 진회가 장방창을 황제로 세우는데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를 휘종, 흠종황제와 함께 붙잡아서 돌아갔다. 진회가 포로로 잡힌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의늠름한 면모가 있다. 이를 보면 그가 송나라황제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회는 간첩인가 아닌가?: 1130년, 금나라장수 다라이는 병력을 이끌고 회북의 주요도시 산양(지금의 강소 회안)을 공격한다. 이때 진회를 데리고 간다. 산양성이 함락된 후, 진회는 기회를 틈타서 도망친다. 그래서, <<송사>>에는 이렇게 썼다: 진회는 임안에 돌아온 후에 화의를 극력 주장했고, 재상의 지위를 훔치고, 권력을 독단하고 나라를 마음대로 했다. 송나라사람들도 진회는 금나라에서 ‘화의’를 책동하기 위하여 파견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금나라는 강하고 송나라는 약하며, 송나라군대는 연전연패하고 있는데, 금나라가 화의를 하려면, 이렇게 복잡하게 우회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을 남송에 보내어 ‘잠복’시킬 필요가 있을까? 송나라가 뭐가 무섭다고. 말도 되지 않는다. 둘째는 진회 자신이 어떻게 돌아간 후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를 줄 알고 있었겠는가? 진회가 간첩이라는 주장은 견강부회이다.
4. 진회가 악비를 모해하였다는데 관하여
악비의 이미지는 역사에 의하여 과장되었다: 악비의 위대한 이미지는 <<송사>>에서 자주 보인다. 사실 <<금사>>와 대조만 해보아도 금방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사>>에서 나오는 악비의 승전은 딱 한번 언성에서의 전투이다. 이것은 후세인들이 ‘언성대첩’이라고 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악비는 2만명의 인마로 완안올술의 1만5천인마를 무찌른 것이지, 무슨 대전투도 아니었다. 그리고 악비의 혁혁한 전공은 딱 이것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소설이다.
만일 <<금사>>를 믿을 수 없다면, 중국고대의 송원 교체기의 저명한 역사학자 마단림이 쓴 <<문헌통고>>에 나오는 평가를 보라: “장(장준), 한(한세충), 유(유광세), 악(악비)의 무리는 모두 평범한 무리이다. 기껏해야 내란을 막는 정도이고, 동남지방을 안정시킬 뿐이다. 여진을 만나기만 하면, 패하지 않으면 도망쳤다. 작은 승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오를 보충할만한 것은 못된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악비등이 패전을 한 것이 승전을 한 것보다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절대로 전설에서처럼 그런 신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악비전전>>에서 악비가
악비는 왜 피살되었는가?: <<문헌통고>>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영웅이라 자부했다. 유광세, 장준, 오개, 한세충, 악비는 각자 군대를 이끌고 나라안에서 웅거했다. 군량미는 달라는대로 줬고, 전공은 그들이 말하고 싶은대로 보고했다” 그리고 이들이 달라고 했던 병사들의 녹봉은 실제 병사의 수보다 훨씬 많았고, 서로간에 교만하여 협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통제가 되지 않았다.
당시에 화의를 하려면 이들의 병권을 반드시 회수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근을 남기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십이금패로 불러들인 내용이다. <<송사>>에는 조정에서 십이금패를 연이어 보내서 악비에게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오도록 지시한다. 악비는 분개하여 말한다: “십년의 공이 하루밤에 무너진다” 얻었던 모든 마을은 하루 아침에 날린다. 사직강산을 다시 중흥시키기 어렵도다.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이를 보면 마치 당시에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갔던 것같다. 그러나, <<금사>>의 기록을 보면, “되돌아간 군사가 몇 되지 않고” “여러 군대가 모두 궤멸하였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 중간에 차이가 크다는 점은 말하지 않더라도, 악비가 진충보국하려고 했다면 그가 보국하려는 대상은
이상의 분석을 보면 우리는 쉽게 알 수가 있다. 진회는 사실 역사와 세상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왜곡되었다는 것을. 진회는 800여년이나 억울하게 당했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필연이었다. 진회가 평화회담을 주재하고 땅을 떼어주고 배상금을 주었다. 이것은 당연히 굴욕스러운 일이다. 당시 사람들의 감정으로 볼 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영웅의 사적을 과장하여 위안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당시에 이렇게 하여야 했느니 저렇게 하여야 했느니 우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은 사실을 따져야 한다. 그저 큰소리만 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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