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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환관 양사성(梁師成): 소동파의 사생아인가?

by 중은우시 2009. 2. 12.

글: 위경화미(爲卿畵眉)

 

대문호 소동파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글은 호방하고 활달하며, 경지가 웅혼하고 창원하다. 중국문화사상 독특한 송사의 품격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인물이며, 중국문화의 발전에 탁월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리고 "삼소(三蘇, 소동파의 부친 소순과 동생 소철)"에 여동생 소소매(蘇小妹) 및 그녀의 남편인 진소유(秦少遊)등은 중국문화사상 드물게 보는 휘황한 가족을 이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환관"이란 모두 출신이 빈한하고, 생계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득이하게 다른 사람들이 업신여기는 일을 하는 '노재(奴才)'이다. 이치대로라면, '문호'와 '환관'은 서로 관련될 이유가 없고, 더더구나 서로 친족으로 얽힐 이유도 없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역사의 진실은 이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

 

양사성은 송휘종(宋徽宗)의 곁에서 일했던 환관이다. 그는 '노재의 도리'를 잘 알았을 뿐아니라, "총명하고, 글을 쓸 줄 알았고, 책을 좀 읽었다." 그리하여 '서생기질'을 지닌 송휘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매관매직하고, 부정부패하며, 성지를 위조하는 등의 나쁜 짓을 저질러, 당시 "육적(六賊)"중 하나로 거론되는 자이다. 그의 신세내력에 대하여, 그 자신은 일관되게, "스스로 소식출자(蘇軾出子)라 하였다", 즉, 소동파(소식)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고증가능한 사료에서 이에 관하여 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동도사략>>이건, <<속송편년자치통감>>이든, <<송사>>이든, 표현은 모두 두리뭉실하다. 간명한 것같으면서도 불명확하다. 대부분은 "자칭소식출자(自稱蘇軾出子, 스스로 소식의 아들이라고 칭하다)"라는 정도로만 언급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사학자들이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찌되었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고, 같은 문인의 입장에서, 태산북두인 소동파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을 아무도 경거망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물며 소식은 명망이 높았을 뿐아니라, 깨끗한 명성에 제자들이 천하에 널려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사료에서 비록 양사성의 출생시간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연령으로 보자면, 소식은 그보다 20살이상 많다. 이러한 나이차이로 보면 양사성이 소동파의 사생아일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리고, 양사성이 이후에 소씨집안을 위하여 한 일들을 보면, 그가 아무 관계도 없다면 소씨집안을 위하여 그렇게 큰 은혜를 베풀어줄 리는 없을 것같다. 더더구나 목숨을 잃을 위험까지 무릅쓰면서 소동파의 작품을 극력 보호하려고 할 이유도 없었을 것같다. 또 한 가지, 바로 송나라때 문인들의 지위는 아주 높았고, 문인을 존중하는 것은 당시의 사회풍습이었다. 만일 양사성이 아무런 연유도 없이 스스로 "소동파의 사생아"라고 했다면, 이처럼 소동파의 명예에 먹칠하는 행동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선비들이 나서서 성토한다면 황제라고 하더라도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소씨집안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은 더더구나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서에 이렇게 그의 말을 부인하는 목소리가 나타난 적이 없다. 그리고, 주희의 <<주자어류>>를 보면, "소동파의 아들 과, 범순부의 아들 온은 모두 양사성의 집을 드나들면서, 부친처럼 대하였다"는 말이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소씨집안과 양사성은 서로 사이가 아주 좋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알려진 사료를 종합해서 추측해보면, 양사성이 "소동파의 사생아"라는 것은 사실로 보인다.

 

비록 양사성이 "약간 책을 읽었지만", 사실 "양사성은 글을 잘하지는 못했고, 스스로 높이 표방하였다" 기껏해야 그는 문자를 익힌 수준이었고, 시구를 이해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문아하고 한묵을 즐기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주고자 애를 썼고, 당대의 명사들에게 자주 지도를 받았다. 그의 저택 밖에는 각종 서화를 꺼내놓고 손님들을 불러서 감상, 평론, 제식(題識)하게 하였다. 송휘종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으므로, 마음에 드는 글을 발견하면 송휘종에게 추천했고, 나중에 황제의 조서를 통하여 그 글을 쓴 사람에게 좋은 관직을 내리곤 했다. "양사성은 황제의 뜻을 잘 헤아리고 아부를 잘하여, 어필, 명령등은 모두 양사성이 주로 담당했다" 그는 권세가 있었고, 여러 대신들이 서로 앞다투어 아부하고자 하는 인물이 되었다. 뒤에서 몰래 그를 "은상(隱相, 숨은 재상)"이라고 불렀다.

 

양사성은 겉으로는 충후하였지만, 속으로는 심계가 깊었다. 그는 휘종의 필적을 모방하는 선비들을 끌어모아서, 왕왕 성지를 위조하기도 했다. 이를 통하여 사리사욕을 챙겼다. 그는 원래 환관이지만, 송휘종의 힘을 빌어 진사를 차지하고, 진주관찰사, 흥근군유후의 직까지 승진한다. 그리고 태위(太尉), 개부의동삼사, 소보(少保)에 발탁되고, 관직은 검교태전(檢校太殿)에 이른다. 이뿐아니라, 그는 심지어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종인 저굉(儲宏)까지도 진사의 직을 얻게 해준다. 그리고 이 저굉은 진사의 지위를 얻고나서도 원래처럼 가축을 길렀으며, 여전히 양사성의 집에서 노비로 생활했다. 양사성은 재물을 아주 좋아했고, 권력을 농단하기를 즐겼으며, 여러 방법으로 뇌물을 받았다. 그리하여 악명을 널리 떨친다. 일찌기 누군가가 그에게 백전의 뇌물을 주었었는데, 그는 이를 통하여 황상의 책을 찬양하는데 공로가 있다는 이유로 과거최종시험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양사성은 악행이 적지 않았지만, 중국문화에도 거대한 공헌을 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소동파의 글을 극력 보존해서 사라지지 않도록 해준 점이다.

 

"오대시안(烏臺詩案)"이 발생한 후, 소동파의 목숨은 위기일발이었다. 그리고 "천하에 소동파의 글을 읽지 못하도록하고, 그가 쓴 글은 모조리 폐기하도록 한다" 그의 시와 글이 모조리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때 양사성은 죽기를 무릅쓰고 눈물로 송휘종에게 간언한다. 그리하여 소동파의 글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일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 소동파의 좋은 글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당연히 이 양사성이라는 환관의 덕도 있는 것이다.

 

소동파의 아들인 소과(蘇過)와 양사성은 당연히 배분이 같아야 할 것이며, 형제로 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본 <<주자어류>>를 보면, "소식의 아들 과...는 양사성의 집을 드나들며, 부친으로 모셨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양사성은 소씨집안에 대하여 소동파의 아들로서의 의무는 다 했다. 소동파의 시문을 구해냈을 뿐아니라, 그는 소과가 자기 집의 창고에서 돈을 꺼내갈 때고 1만이하인 경우에는 보고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이를 보면 그는 소씨집안에 의리와 정이 깊었다.

 

양사성은 당시에 "육적"으로 불리던 왕보(王)와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두 사람의 집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었다. 그리고 담에는 작은 문도 하나 내놨다. 밤낮으로 서로 왔다갔다했다. 나중에 송휘종이 집을 방문했다가 이 작은 문을 보고는 양사성을 경계하여 점차 멀리하게 되었다고 한다.

 

정강의 난 이후에,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조정신하들도 "육적"을 공격했다. 오래지 않아, 금나라 병사들이 성아래까지 몰려왔다. 그리고 송나라조정에 재물을 요구했다. 송휘종은 양사성에게 재물을 갖다 바치는 임무를 맡긴다. 양사성이 길을 가는 도중에 송휘종은 사람을 보내어 그를 체포하고, 그를 죽여버린다.

 

역사상 악행을 많이 저지른 다른 환관들과 비교하자면, 양사성은 악당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서 국가에 해를 끼친 정도의 수준이다. 다만, 그가 소동파의 시문을 보존하기 위하여 한 노력은 결코 가볍게 보아넘길 수 없는 중요한 공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