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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송)

송광종(宋光宗)은 왜 미쳤는가?

by 중은우시 2008. 12. 20.

글: cheng77m

 

송(宋)나라는 중국역사상 빈약했던 봉건왕조이다. 남송에 이르러서는 더더구나 "불사진취(不思進取), 편안일방(偏安一方)"(진취적으로 생각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편안하게 살고자 했다)하여, 소수민족으로부터 갖은 능욕을 당한다. 그러다가, 결국 이민족의 손에 망한다.

 

남송의 세번째 통치자인 송광종 조순(趙恂)은 행운과 불행의 모순결합체이다. 행운이었던 것은 그가 순조롭게 황제의 보좌에 올랐다는 것이고, 불행이었던 것은 등극 2년후에 조순은 정신병을 앓아, 결국 고독하게 죽어갔다는 것이다. 당당한 일국의 군주가 어찌 정신병에 걸렸을까? 그가 정신병에 걸린 배후에는 어떤 남들이 모르는 사정이 숨어 있을까? 아래에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송광종 조순은 송효종(宋孝宗)의 셋째아들이다. 모친 곽황후(郭皇后)는 부친 송효종이 즉위하기 전에 병사한다. 그리하여, 조순은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다. 부친 송효종은 남송에서 가장 업적이 많은 황제이다. 이는 어린 조순으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게 하였으며, 동시에 그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리하여, 조순은 신중하고 조심하여 유약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으로 자란다.

 

소흥말년, 조부인 송고종 조구는 황보탄(皇甫坦)의 건의를 받아 조순에게 이봉낭(李鳳娘)을 골라 처로 삼게 한다. 이씨는 성격이 날카롭고 강했다. 심계도 뛰어날 뿐아니라 질투심도 강했다. 오래지 않아 이봉낭은 조순을 완전히 손아귀에 움켜쥔다. 이것은 나중에 조순이 정신병에 걸리는 이유가 된다.

 

건도7년(1171년) 이월, 조순은 태자가 되어 동궁에 들어간다. 동궁은 역대이래로 정치투쟁의 소용돌이에 항상 휩싸인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살신지화를 입는다. 그리하여 조순은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신의 언행과 행동거지 및 감정을 억제하며 살았다. 이렇게 불안 속에서 십여년의 태자생활을 보낸다. 순희16년에 43세의 조순은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송광종이다. 즉위후의 조순은 여전히 부친 송효종이 그에게 간여하고 통제할까봐 걱정한다. 그리하여 그는 점차 부친을 멀리하고 의심한다. 소희5년(1194년) 육월, 송효종이 붕어한다. 조순은 부친이 그를 함정으로 유인하여, 조정을 다시 장악하려는 음모로 생각하고, 백관들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송효종의 상주가 되는 것을 거절한다. 결국 하는 수없이 태황태후 오씨가 그를 대신하여 상주역할을 한다.

 

부친에 대한 의심도 조순이 발병하는 원인의 하나였다. 그러나, 처인 이봉낭에 대한 두려움이 더더욱 조순을 발병하게한 원인이었다. 처인 이봉낭은 아주 표독하고 투기가 심했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더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효종부부에 대하여도 그녀는 오만무례했을 뿐아니라, 남편 조순에 대한 감시도 더욱 심해졌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한번은 한 궁녀가 조순의 발을 씻겨주고 잇었다. 조순은 그 궁녀의 두 손이 뽀얗고 가는 것을 보고는 호감을 나타냈다. 이것이 이봉낭의 눈에 들켜, 그녀는 이를 마음 속에 담아둔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이봉낭은 식합(食盒)을 조순에게 보낸다. 조순이 열어보니 안에는 바로 그 궁녀의 두 손이 담겨 있었다. 조순은 놀라서 하루종일 말도 하지 못했다.

 

광종이 마음에 들어하는 궁녀에 대하여, 이봉낭은 항상 이렇게 질투했다. 광종의 비빈에 대하여도 이봉낭은 모두 없애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광종이 가장 총애하던 황귀비는 아주 좋은 예이다. 황귀비는 조순이 공왕이던 시절에 송효종이 그에게 내린 첩실이다. 황씨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려, 조순과는 마음이 잘 맞았다. 조순이 등극한 후에는 귀비에 올라, 더욱 총애를 받는다. 이는 이봉낭의 질투심을 자극했다. 소희이년 십일월 신미일에 이봉낭은 광종이 재궁에 가서 거주하는 틈을 타서, 황귀비를 학살한다. 송광종이 궁으로 돌아오자 황귀비가 급사했다고 거짓말을 한다. 송광종은 아주 비통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황귀비를 잃은 후에, 조순의 생활은 고독해진다. 이것도 아마 그가 정신병에 걸린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이봉낭의 질투는 역대후궁들 중에서 으뜸이라 할 만하다. 광종의 또 다른 두 비빈인 장귀비, 부첩여도 모두 이봉낭에 의하여 궁밖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일반백성에게 시집간다. 황상의 여인들의 이러한 처지에 놓였다는 것에 대하여 조순은 부끄러움을 느꼈고, 이것은 그의 연약한 신경을 더욱 자극한다.

 

이상의 요소 이외에, 황실투쟁도 송광종이 발병한 근본원인일 것이다. 송나라황실에는 정신병자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송태조의 장남 조덕소, 송태종의 장남 조원좌, 육남 조원옥이 그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유전적인 요소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통치계급집단내부의 끝없는 투쟁은 일부 황실구성원의 인격과 심리에 상당한 정도의 타격을 입혔을 것이다.

 

소희5년 칠월, 통치집단은 부득이 조순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조확(趙擴)을 황제로 올린다. 속담에 "집안에 악처가 있으면, 횡액을 당한다"는 말이 있다. 송광종의 정신병은 이봉낭에게 책임이 있다. 송광종이 버림받자, 이봉낭도 자연히 함께 버림받는다. 그녀가 아무리 표독하더라도, 더 이상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경원6년 즉 1200년 칠월, 이봉낭은 고독속에 죽는다. 그녀의 시신은 7월의 태양아래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를 뿜어내고, 궁녀들은 침을 뱉는다. 그해 구월, 처 이봉낭이 죽은지 두 달이 지나서, 정신이 비정상적인 황제도 세상을 떠난다. 향년 54세이다. 생전에 동상이몽이던 부부는 죽은 후에는 함께 영숭릉에 묻힌다. 이것은 악연인가 아니면 장상수(長相守)인가? 송광종의 비극적인 인생은 우리에게 한 가지를 말해준다. 황실에서 태어나도 번뇌와 비애가 있다. 스스로 만족한 줄 아는 것이 행복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