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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상해 이야기

상해회풍은행대하(上海匯豊銀行大廈)의 역사

by 중은우시 2008. 9. 25.

 

 

 

글: 이원강(李遠江)

 

지금 보더라도, 상하이 와이탄(外灘) 12호에 서있는 회풍은행대하(HSBC Building)은 여전히 와이탄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중 하나이다. 거대한 그리스식 돔은 황푸강을 마주하고 있어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빌딩의 역사가 바로 근현대 상해의 역사이기도 하다.

 

1923년 6월 23일 정오, 상해조계의 거리에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수십만의 상해시민은 밀물처럼 와이탄으로 몰려와서 앞다투어 새로 완공된 회풍은행대하의 풍채를 바라보았다. 이날, 융중한 낙성식에서 온통 꽃바구니로 가득차고, 축포가 울려퍼졌으며, 정부와 각계의 요인들이 속속 찾아와서 축하해주었다.

 

1000만위안을 들인 이 빌딩은 메인빌딩 5층, 중부 7층으로 철근구조이며 벽돌로 쌓아서 메우고, 석재로 겉을 붙였다. 빌딩안의 인테리어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인 냉난방시스템을 갖추었다. 정교한 조각으로 외부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리스식 원형 돔은 하늘로 높이 솟아 있었다. 이 건물은 회풍은행(HSBC)으로 하여금 상해은행계의 우두머리로서의 지위를 더욱 확고하게 굳혀 주었을 뿐아니라, 즉시 극동금융중심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이것은 수에즈운하에서 베링해협 사이에 놓인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낙성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평가였다.

 

그렇지만, 세심한 사람들은 여전히 이 서방고전주의품격이 넘쳐나는 건물 속에서 중국적인 요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3층을 관통하는 기둥은 코린트식이었다. 그러나 대분은 중국의 아문(衙門)을 모방했다. 회랑은 서양식이지만, 대청은 중국식으로 팔각형이었다. 설계이념은 중국의 <<주역>>에 있는 팔괘에서 따왔다고 한다; 대문입구에는 위풍당당한 구리로 만든 사자를 놓았는데, 이는 분명히 중국의 왕부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다. 그러나, 이 두 마리의 사자에는 서양식 이름을 붙여놓았다.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스티븐이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스팃(Stitt)이다. 이것은 HSBC은행 행장의 이름과 상해분행장의 이름이다. 이외에 더욱 중요한 것은, 테이프커팅을 하는 것은 서양총재, 서양행장이었지만, 뒤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은 중국본토출신의 매판(買辦)들이었다.

 

이런 중국과 외국이 섞여있는 모습은 HSBC가 중국에 진입한 과정을 보여준다. 1865년에 상해에 분행을 설립했던 금융계의 거두는 서방자본세계의 이 오래된 제국에 대한 각종의 모험과 전설을 대표한다. 그리고 이날 낙성된 상해회풍은행대하는 이 꿈이라는 큰 나무에 열린 또 하나의 과실이었다.

 

첫번째 투자

 

1864년, 영국상인인 회덕풍양행의 오너인 David McLean은 회풍이 상해에 분행을 설립한다는 것을 알았다. 은행업의 전망을 좋게 보았기 때문에, 그는 즉시 귀국하여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때 2000냥백은의 귀국비용이 부족했다. 부득이하여 그는 상해 삼여전장(三餘錢莊)에서 일하던 왕괴산(王槐山)을 생각해냈다.

 

욍괴산은 자주 전장과 양행을 오갔고, 일처리가 노련했으며 신용이 있고, 의리를 지켰다. McLean은 왕괴산에게 돈을 빌리면서, 이번에 귀국하면 적어도 6개월 길면 9개월간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겠으며, 절대 식언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아마도 McLean의 성의에 감동했는지, 왕괴산은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전장의 고객구좌에서 일부 자금을 빼내어 McLean에게 빌려준다.

 

McLean은 한번 돌아가더니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년말이 되어 전장의 결산을 해야 했는데, 이때 왕괴산이 전장의 돈을 빼낸 사실이 들통났다. 삼여전장의 주인이 왕괴산의 외삼촌이었지만, 업계의 법규에 따라, 왕괴산은 제명당한다. 1865년, McLean이 영국에서 조달한 거액을 가지고 상해로 와서 회풍은행 상해분행을 연다. 그리고 분행의 행장을 맡는다. 왕괴산은 이때 회풍은행의 첫번째 매판이 된다.

 

회풍은행의 상해에서의 역정은 이 두 모험적인 인물의 투자로 시작되었다. McLean은 회풍에 투자했고, 왕괴산은 McLean에 투자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왕괴산의 2000냥백은투자는 개인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이는 현지인물이 외지에서 온 새로운 규칙제정자에게 투자한 첫번째 도박자금이었다.

 

상해탄의 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외국인과 가장 먼저 접촉한 중국인이다. 그들은 외국상행, 은행의 업무규칙을 잘 알았다. 가장 먼저 이들 외래인들이 언젠가 상업부두인 상해를 주도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서양말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멸시할 때, 그들은 절름발이 영어를 가지고 중국과 외국간의 교량역할을 했다.

 

왕괴산의 도박은 성공했다. 그는 120냥백은의 월급을 받게 되었을 뿐아니라, 10년도 되지 않아 백만의 가산을 이루게 된다. 도박에서 승리한 것은 왕괴산만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양행과 은행에서 일하던 매판들은 상해탄의 첫번째 벼락부자가 된다. <<캠브리지중국사>>에서는 "1842년부터 1894년까지, 매판의 전체 수입은 약 5억3천만냥이다...이 수익을 나눠가진 사람수와 1902년 외국인이 중국에 투자한 총금액이 5억8천만냥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돈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McLean의 투자는 확실히 손해보지 않았다. 왕괴산의 도움이 있어서, 회풍은행은 상해에서의 사업이 순조로왔다. 본토 전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아니라, 청나라정부에 자금을 빌려주기도 하였다.

 

풍운이 일다

 

회풍상해분행이 막 문을 열자, 와이탄은 이미 앞다투어 들어온 양행회사들로 꽉 차 있었다. 아무도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았다. 회풍은행은 어쩔 수 없이 와이탄의 중앙호텔(지금의 화평호텔 남루) 1층을 임시임차하여 영업을 개시하였다. 다만 10여년만에, 회풍은행은 극동에서 가장 크고 가장 명성있는 은행으로 성장한다.

 

회풍은행 상해분행의 영업액은 각지분행중 가장 많았을 뿐아니라, 심지어 홍콩본점을 넘어섰다. 상해분행은 이화양행과 합작으로 중영공사를 만들어, 호녕(상해-남경), 광구(광주-구룡)등 여러 철로에 자금을 대출해 주었다. 그리고 대량의 화폐를 발행했는데, "유통이 가장 많이 되고, 신용이 가장 좋았다" 한번은 상해의 다른 여러 양행이 모두 회풍에 의지하여 자금을 돌리기도 했다. 중국의 부유한 상인, 큰 기업가, 정치인, 군벌이 속속 거액을 회풍에 예금했다.

 

사업이 커지면서, 회풍은행은 1873년 거액을 들여 운동사업기금회가 보유했던 와이탄12호의 부지를 매입한다. 그리고 기금회건물을 새로 인테리어한 다음 중앙호텔에서 옮겨온다.

 

회풍의 성공은 상해라는 모험가낙원의 가장 좋은 광고였다. 상해에서 돈을 벌었다는 신화와 거부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라 상해로 오게 하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

 

석정보(席正甫)도 바로 이런 배경하에 회풍에 들어왔다. 1860년, 20세가 채 되지 않은 석정보는 가족을 따라 상해로 왔고, 나중에 형과 함께 전장을 운영했다. 그러나 외자은행의 앞날이 밝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는 회풍으로 와서, 가장 하급의 영업원노릇부터 시작했다.

 

1874년, 청나라정부의 국고가 비어, 천진해관도인 손죽당을 보내어 자금을 요청했다. 석정보는 마침 중국전장에서 쌓아온 인맥을 바탕으로 이 일을 맡았다. 그는 멀리 천진까지 가서, 청나라정부와 차관에 대하여 협의한다. 청나라정부는 염세를 담보로 하고, 연리 8%의 고리로 회풍은행에서 200만냥의 10년짜리 차관을 얻는다. 이것이 바로 "복건대방차관"이다. 이 정치차관의 성공은 회풍은행의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몇배로 확대시켰을 뿐아니라, 석정보를 일거에 유명인사로 만들어주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왕괴산과 교체되어, 회풍은행의 제2대 매판이 된다.

 

이 모험정신에 가득찬 소주인은 회풍의 건물 안에서, 결국 상해탄에서 가장 대단한 중국인이 된다. 그는 온건하게 회풍상해분행의 항해를 장악하는 위치를 차지했을 뿐아니라, 청말의 관료사회에서도 풍운인물로 등장한다.

 

상해도대 원수훈은 그와 결의형제가 된다. 이홍장, 심보정, 성선회등의 조정중신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지방우두머리 좌종당은 매번 상해를 방문할 때마다, 항상 서양은행의 중국매판인 그를 찾았다.

 

상해탄은 돌을 금으로 만드는 곳이고, 손바닥을 뒤집으면 구름과 비가 내릴 수 있는 마술이 가능했다. 석정보는 이러한 것들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빈손의 젊은이를 십여년만에 부호로 만들어 줄 수도 있었고, 중국인들이 수천년간 신봉했던 관료사회의 권력이 자본의 앞에 힘이 역전되도록 만들기도 하였다.

 

이홍장, 좌종당이 석정보에게 대청제국의 관리가 되라고 추천했을 때, 적지 않은 중국인들의 눈에 서양인의 노예에 불과한 그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거절해버린다. 그의 이러한 거동은 상해탄에서 가장 똑똑한 무리로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진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에 저녁을 보장받지 못하고, 풍운이 막측한 관료사회에 비하여, 자본에 의지하고, 조류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혜택이 많았고, 안전했다.

 

석씨집안의 후예들은 그의 이러한 현명한 선택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1905년 석정보가 서거했을 때, 석씨집안은 이미 방대한 자본제국을 만들었다. 여러 전장을 가졌을 뿐아니라, 포동, 남경로, 봉양로 일대에 많은 부동산을 구입해 두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회풍상해분행 매판의 직위를 석씨가문에서 3대를 연이어 유지했다. 회풍은행의 새건물이 완공된 1923년에도 매판은 역시 석씨집안의 자손이 맡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석녹생(席鹿笙)이었다. 풍운이 이는 청말시대에 대대로 관직에 있던 집안은 시대의 변화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에 의지한 매판은 아주 반석처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크고 작은 34개의 외자은행중에서 17개 은행의 매판을 모두 석씨집안이 담당하고 있었다.

 

국면대전환

 

석록생이 매판의 직위를 이어받은 것은 1922년이었다. 이 해는 회풍은행이 중국에 진입하는 최전성기였다. 이익은 역사적 기록인 1293만위안에 달하였다. 대련, 연태의 분행이 연이어 개업했다. 근 60년간의 발전을 거쳐, 야심만만한 자본거인은 상해탄의 자양분을 바탕으로 이미 극동과 전세계 최대의 은행중 하나가 되었다.

 

이전에 2년간, 회풍은행은 부근인 와이탄 10호의 미풍은행과 11호의 별발은행의 건물을 인수한다. 그리고 극돋최대은행빌딩의 설계도를 완성한다. 이 새로운 도면에 따르면, 건물의 건축부지는 북으로 해관빌딩에서, 남으로 복주로, 동으로는 외탄에서 서로는 사천로에 이른다. 부지면적만 62,000평방미터에 이른다. 일단 완성되면 와이탄에서 면적이 가장 큰 건축이 될 것이다.

 

1921년, 새빌딩이 착공된다. 당시의 신문기사에 따르면, 착공의식을 중국의 음력 5월 5일로 잡는다. 풍수가들을 불러 보게 한 후, 기초석의 아래에 중국전통에 따라 압승전을 놓았다. 그리고 세계각국의 각종 은화를 넣어 두었다. 건축이 지붕공사를 마쳤을 때, 회풍은 중문으로 '상량전(上樑錢)'이라고 쓴 돈을 만들어 건물의 구석구석에 분산시켜 숨겨두었다.

 

겉으로 보기에 가소로운 이 행동은 바로 회풍이 중국에 순조롭게 진입하고, 신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국제화의 겉모습 속에 현지화의 전략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하자면, 석록생이 3대매판의 직무를 승계한 것도 회풍의 이런 전략의 결과였다.

 

석록생은 복희로에 있는 서양건물의 장식도 아주 신경썼다. 안에는 서양분위기의 객실을 두었다. 조부의 절름발이영어와 비교하자면, 석록생은 표준적인 영어발음으로 외국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서양식 아침을 먹고, 자주 경마장을 가서 노는 중국인은 당시에 가장 새롭고 가장 현대적인 경영지식을 장악하고 있었다.

 

확실히 석록생은 회풍의 현지화전략의 아들일 뿐아니라, 상해부두의 아들이었다. 회풍을 대표로 하는 해외상단이 가져온 것은 자본만이 아니었다. 배후에는 서양문명이 있었다. 석록생의 성장과정은 실제로 상해탄의 변화과정이다. 이 변화는 심지어 가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발생하고 있었다.

 

1856년, 상해에는 서양식 거리가 나타난다. 1865년 가스등이 생기고, 1881년 전화가 생긴다. 1882년 전기가 들어오고, 1884년에는 상수도가 생긴다. 1901년에는 자동차가 나오고, 1908년에는 전차가 나온다. 이외에 전등, 전기선풍기, 라디오, 서양주택, 쇼파, 시가, 향후, 하이힐, 미용실, 하이알라이(Jai Alai), 스위스시계, 맥주, 무도장....전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가장 유행하며, 가장 사치스런 물품은 이곳에 모두 다 있었다.

 

중국의 광활한 시장과 석록생이라는 중국매판이 연결되고, 석록생들은 외자은행과 연결되었다. 외자은행은 다시 국제적으로 최신의 제조업과 연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상해, 내지 중국은 이미 전세계무역의 일부분이 되었다.

 

매일 아침 9시반은 회풍은행이 환율표를 내걸고 업무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전체 상해탄, 심지어 전체 중국이 활발해진다. 투기꾼들은 환율표를 보고는 바로 상해탄의 망망한 상업의 바다로 뛰어든다. 무수한 투기, 졸부, 음묘, 의리가 모두 극동의 최대 상업도시 상해에서 매일 매일 발생했다.

 

이러한 국면에 회풍은행 회장인 Lane은 만족했다. 바로 이러한 중국에 대한 신뢰감으로, 그는 상해회풍은행대하의 낙성식에서 이렇게 치사를 한 것이다: "저희 은행은 거액을 들여서 이 화려한 건물을 지었습니다. 중국의 장래에 아주 희망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며, 상해의 비지니스는 무한히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어지는 국면은 그가 예상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10여년후, 영국에 패배한 바 있는 동방의 소국인 일본이 상해탄을 지배하게 된다. 다시 10여년이 흘러서, 상해의 정권이 바뀐다. 회풍은행은 다른 은행들처럼 철수하지 않고, 자신을 근 백여년간 먹여살린 상해탄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업무량이 격감하고, 매일의 수입으로는 이 거대한 건물의 지출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4년, 국제적으로 관용되는 방법으로, 회풍은행은 이 건물을 평가한 후 상해인민정부에 넘겼다. 1955년, 이 건물은 시정부소재지가 된다. 그리하여, "시부대하(市府大廈)"라 불린다.

 

다시 40년이 흘렀다. 상해시정부는 와이탄금융가를 되살리기로 결정한다. 1997년, 부동산교환으로 다시 하나의 은행이 이 건물의 새주인이 되어다. 그것은 바로 포동발전은행(浦東發展銀行)이다.

 

이때의 상해탄은 다시 예전에 외자가 운집하던 장면을 되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