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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의학

중국의 유일한 과학은 중의학이다.

by 중은우시 2009. 5. 13.

글: 여명(黎鳴)

 

방금 몇몇 분들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나의 견해는 그들과 서로 같은 점도 있고 서로 다른 점도 있다. 서로 같은 점이라면, 바로 21세기는 확실히 중화민족이 진흥하는 세기라는 것이다. 이 점은 같다. 그러나 서로 다른 점이라면, 중국전통문화에 대한 이해이다. 중국의 문화 가운데, 아주 우수한 것도 있고, 확실히 아주 엉망인 것도 있다. 이천년이래로, 우리는 엉망으로 힘을 발휘했고, 진정으로 정수인 부분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의 전통에 대하여, 중국의 역사, 중국의 문화에 대하여, 명확하게 결론을 내려야 한다고 본다. 만일 중국고대에 진정으로 아주 위대한 사상가, 철학가가 있었더라면, 그 사람은 노자(老子)일 수밖에 없다. 더 시간을 소급한다면 전설상의 복희(伏羲)이다. 복히는 우리들에게 부호를 남겼지, 문자는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바로 이 복희가 남겨준 부호가 바로 엉망진창이다. <<주역>>과 <<역경>>은 철저히 중화민족의 사고를 잘못된 나쁜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도덕경>>은 다르다. <<도덕경>>의 가치는 바로 복희의 괘, 화를 정확하게 해석했다. <<도덕경>>안에는 한 마디도 <<역경>>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역의 화상의 괘상에 대하여 묘사하고 해석했다. 만일 당신이 자세히 <<도덕경>>을 읽어보고나서 다시 복희의 팔괘와 64괘를 살펴보라, 노자의 모든 주의력이 어떻게 이들 괘상과 괘화를 해석하는지에 집중되었는지를 알 것이다.

 

나는 인류의 진리는 유일하다고 생각한다. 무든 동방의 진리와 서방의 진리가 따로 있다고 보지 않는다. 무슨 동방의 과학과 서방의 과학이 따로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강암(姜巖)과 다르다. 과학은 유일한 것이다. 다만 이 과학은 서방인들만 가지고, 중국인들은 가지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중국에 과학이 있다면, 과학의 표현은 바로 중국의 중의이다. 만일 중국에 중의가 없다면, 중국에는 과학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중의에 대한 평가를 아주 높게 한다. 중의가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바로 중국에서 "학(學)"이라고 할만한 것이 딱 하나이고, 그것이 중의학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은 "학"이 아니다. 중국에는 "산술(算術)"이 있다. 그러나 "수학(數學)"은 없다. 중국인은 수학은 없고 산술만 있었다. 계산은 할 수 있다.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고...예를 들어 중국인들은 사용할 줄은 알지만, 그것을 이론화하지는 않았다. 중국인에게 건축은 있다. 그러나 건축학은 없었다. 즉 중국인들에게는 많은 술(術)이 있었고, 많은 기술이 있었지만, 이 기술을 이론적인 단계의 "학"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했다. 무엇이 "학"인가? "학"에는 이론이 있어야 한다. 이론이 없으면 "학"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 있어서 나는 중국에 과학이 있었다면 유일한 과학은 바로 중의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의는 자신의 이론이 있다. 그리고 중의의 이론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도의학(道醫學)은 진정한 중국의학이고, 중국중의학 이론의 핵심인데, 바로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그러한 이론이다. 나는 아주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많은 중의학자들은 얘기하다보면 주역으로 가버린다. 그리고 그 팔괘부호의 명칭으로 가버린다. 건, 곤, 감, 리, 손, 태, 간, 진. 솔직히 얘기하면, 이런 괘화의 명칭을 쓰고, 그 괘명, 사명 및 그들 해석을 얘기할 때면 완전히 길을 벗어난다. 즉, <<도덕경>>과는 상반된 길로 가버린다.

 

중국에 <<도덕경>>은 이천여년간 존재해왔고, 이천여년동안 <<도덕경>>을 해석한 서적이 많이 나타났다. 아쉽게도, 중국인들의 <<도덕경>>에 대한 이해는 대부분이 잘못된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도덕경>>에 대하여 유가의 각도에서 해석했는데, 이는 아주 멍청한 짓이었다. 분명히 철학이고 분명히 논리가 있는 것을 논리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이치대로라면 혼란에서 질서로 가야 하는데, 중국인들은 그 반대로 질서에서 혼란으로 향했다.

 

왜 중의는 나중에 이론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는가? 지금까지도 중국의 중의는 많은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처리하기 어렵다고 본다. 기술적으로는 진보가 있었지만, 이론적으로는 정체된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그 내면에는 우리가 엄격하게 <<도덕경>>의 이론에 따라 전진하지 않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다시 옆길로 샜다고 본다. 왕필(王弼)이 <<도덕경>>에 대하여 이해를 잘못하면서부터 문제는 시작되었다.

 

한 가지만 얘기하겠다. 현재 의학을 배우는 중의들은 모두 음양오행을 얘기한다. <<도덕경>>에서는 음양삼행(陰陽三行)을 얘기할 뿐이다. 우리가 일단 음양오행으로 들어가버리면 이론은 끝이 난다.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 단 3개이다. 그래야 활력이 생긴다. 셋, 그게 전부이다. 셋, 그게 동력이다. 노자는 말했다.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노자는 오생만물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五)는 바로 죽음이다. 오는 만물을 낳지 못한다. 오는 중단이다. 이것이 우리 중의의 이론이다. 왜냐하면 <<도덕경>>의 이론과 배치되게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유가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가의 상서(尙書), 오행(五行)은 어디서 왔는가? 오행은 바로 유가의 경전 상서에서 왔다. 상서의 헛소리들이 <<도덕경>>을 이해하는데 끼어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중의이론에서 발전이 없게 된 것이다. 내가 금방 얘기했지만, ㅈ서방의 과학, 중국의 과학, 사실 그렇게 나눠서 얘기할 것도 없다. 과학은 그저 하나이다. 진리는 단지 하나이다. 서방에서 진리인 것은 우리에게도 진리이다. 우리 중국인에게 진리인 것은 서방인들에게도 진리이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다시 <<도덕경>>을 이해하고, <<도덕경>>을 인식하여야 한다.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철학상 최고의 것이다. 최고인 이유는 그 자신의 언어로 진실되게 복희의 72개부호를 해석해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겠다. 현재 유전자이론이 아주 성행한다. 다만 유전자의 이론핵심은 우리의 64괘에서 이미 설명되어 있다. 이미 이론적으로 아주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유전자의 구성을 보라. 그것은 바로 음양삼행이다. 그것은 바로 이중나선형이다. 음양삼행은 바로 노자의 <<도덕경>> 이론의 핵심이다. 바로 삼생만물이다. 그리고 노자는 분명하게 얘기했다: "반자도지동, 약자도지용(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돌아가는 것은 도가 움직이는 것이오, 약한 것은 도가 쓰이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약(弱)"은 "월(越)"이어야 한다고 본다. 아마도 이것은 베낄 때 잘못 베낀 것일 것이다. "월자도지용(뛰어넘는 것은 도의 씀씀이이다)" 천하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그 무는 바로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 잠재에너지, 잠재물질이다. 사실 <<도덕경>> 5천자중에서 진정으로 철학과 관련되는 부분은 500자 정도이다. 그중 10분의 1정도이다. 다른 10분의 9는 모두 이 500자를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도덕경>>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도덕경>>의 중화민족의 제일경이다. 유일한 철학의 경전이다. 그리고 <<도덕경>>의 이론, 도덕경의 철학이론은 세계 최고의 것이다. <<도의학>>은 <<도덕경>>을 기초로 탄생한 것이다.

 

필자가 쓴 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서방철학은 죽었다" 이 책은 서점에서 아직도 팔리고 있다. 나는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서방철학을 연구하는데 보냈다. 내가 서방철학을 연구한 결과는 서방철학이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노자 <<도덕경>>의 철학이 그들보다 훨씬 고명하기 때문이다. 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철학의 핵심은 논리이다. 서방철학의 논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고명해 보인다. 형식논리에서 변증논리까지. 그리고 현재 대거 발전하고 있는 수리논리까지. 그리고 수리논리는 오늘날의 컴퓨터로 발전되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얘기하겠다. 이 컴퓨터는 아주 단순무식하다. 그것이 근거하는 논리이론은 사실 "0"과 "1"이다. 바로 이원론의 "0"과 "1"인 것이다. 노자는 다르다. 노자는 "삼생만물"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얘기하고자 한다. 당연히 나는 아직 이를 완성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서방의 논리를 추진했는데, 서방의 수리논리는 이미 죽었다. 그것은 우리의 컴퓨터까지 발전한 후, 이미 끝장을 본 것이다. 왜 끝장을 보았다고 하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삼생만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컴퓨터는 지금까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손위의 도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저 우리의 도구가 될 뿐이다. 현재 서방에서 하고 있는 로보트도 모두 사람이 뒤에서 조종하는 것이다.

 

나는 중국인들이 노자 <<도덕경>>의 철학이론을 이용하여, 미래의 로보트를 완전히 사람처럼 활동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로보트를 만들어 그것을 달로 보내면 우리가 그것을 조종할 필요가 없이, 문제에 부닥치면 스스로 해결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이 바로 새로운 논리이론이다.

 

서방인들은 음양삼행측면에서 우리보다 앞서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그것이 운용하는 것은 바로 "음양삼행"이다. 그것은 음양오행이 아니다. 다만 음양삼행으로는 부족하다. 컴퓨터가 쓰는 "0"과 "1"은 잘못이다. 이 "0"과 "1"은 한도에 도달해서 죽었다. 노자 <<도덕경>>을 이용하여 우리는 현재 4진법을 발명하고 있다. 나는 사진법을 가지고 노자의 삼생만물을 구현할 수 있다.

 

서방인들은 이진법을 가지고, 일원론적 세계를 만들어 냈다. 나는 현재 삼원론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다. 일원론의 세계는 단지 우리의 현재와 같은 컴퓨터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삼원론으로 장래 만드는 컴퓨터는 완전히 사람처럼 활동하는 컴퓨터가 될 것이다. 맞다. 인류는 장래에 스스로 소멸될 것이다. 다만 반드시 인식해야 할 것은, 장래 전체 세계에서 로보트가 사람을 죽일 것이다. 이 날은 반드시 온다. 만일 전체 인류의 사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지구가 자연스럽게 인류를 소멸시켜주지 않는다면, 인류 자신이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래서, 21세기를 나는 사고혁명의 시대라고 본다. 그리고 이 혁명의 발원지는 중국이 되어야 한다. 근거하는 이론은 노자 <<도덕경>>의 철학이론이 되어야 한다. 바로 노자 <<도덕경>>의 음양삼행육도의 완전히 새로운 논리여야 하지, 현재 서방이 말하는 수리논리가 아니어야 한다. 룻소의 이론은 그 자신은 전체계세의 수학에 큰 추진을 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는 그저 부호시스템에서 스스로 골치거리를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만일 그가 노자의 음양삼행이론을 활용해서 전체 철학체계를 만들었더라면, 전체 수학체계, 물리체계를 만들었더라면, 이런 자아모순은 자연히 사라졌을 것이다.

 

중화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 다만 위대한 것은 국가가 아니다. 공자는 아마도 나의 블로그를 자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중화민족의 악몽이다. 노자는 중화민족의 희망이다: 공자는 절대로 철학이 없다. 절대로 논리가 없다. 공자는 반자연, 반논리, 반진리적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상, 위대한 이론은 <<도덕경>>에 있다. <<도덕경>>이 표현하는 논리에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음양오행은 그것를 바꾸기 아주 어렵다. 다만 어렵기는 해도 불가능은 아니다. 만일 음양오행을 음양삼행으로 바꾼다면, 그것의 전도는 유망하다. 나는 우리의 중의중약학이 확실히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의학이라고 믿는다. 다만 이 의학은 현재 이론적인 곤경에 빠져 있다. 모두 곤경에 빠져있다는 것을 인식하면 처리하기는 좋다. 우리는 반드시 이론적인 곤경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야 한다. 그리하여 중의중약학이 세계로 뻗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전체인류의 심령, 생리를 치유할 뿐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인류에게 위대하고, 사변적이며, 논리적인 방법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