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주자(方舟子)
중의의 이론기초는 원기론(元氣論), 음양학설(陰陽學說)과 오행학설(五行學說)이다.
기(氣)는 만물의 본원이고, 사람은 만물의 하나로서 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라는 것은 사람의 근본이다"(<<난경.팔난>>). 기는 생명활동의 전과정에 유지된다. "사람의 삶은 모두 이 기에 의지하는 것이다"(<<유경.섭생>>). 어떤 사물, 어떤 변화도 모두 기의 형성, 변화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기가 시작되면 생명이 나타나며, 기가 흩어지면 형태가 있고, 기가 퍼지면 번식이 있고, 기가 마치면 상이 변한다, 그것은 일치하는 것이다"(<<소문.오상정대론>>). 기는 마치 일체의 사물을 구성하는 것이면서도 기본입자처럼 실재하는 물질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현지우현(玄之又玄, 그윽하면서도 또 그윽하다는 노자의 문구)의 모후하고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기를 이용하여 만사만물을 해석하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해석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음양(陰陽)도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음양이라는 것은 유명무형(有名無形)이다"(<<영추.음양계일월>>). 음양은 없는 곳이 없다. 어떤 사물도 음양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음과 양의 가운데에서도 다시 음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나눠갈 수 있다. "음양이라는 것은 수가 10이 될 수도 있고, 100이 될 수도 있다. 수가 천이 될 수도 있고, 만이 될 수도 있다. 만은 크다는 것이고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요점은 하나이다"(<<소문.음양이합론>>. 그러나, 무엇이 음이고 무엇이 양인가? 명확한 기준이 없다. 내장 중에서 육부(六腑)는 물질을 전화시키고 저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양이라고 하고, 오장(五臟)은 정기를 축적하고 배설하지 않는다고 하여 음이라고 구분했다. 모두 주관적인 구분이다. 그런데, 원래 음에 속하는 오장중에서 다시 음양을 구분하는데, 가슴에 있는 심장과 폐는 양이라고 구분하고, 배에 있는 비장, 간장, 신장은 음이라고 구분한다. 역시 주관적인 구분이다. 하나의 장기도 다시 음양을 나눌 수 있다고 하는데, 무슨 심음(心陰), 심양(心陽), 신음(腎陰), 신양(腎陽)이 있는데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더욱 설명하기 어렵다. 음양이 상호 대립하면서 제약하면서 다시 상호 작용을 하고, 서로 의존한다. 양자간에는 계속하여 이쪽이 줄면 저쪽이 늘어나는 운동변화에서 서로 전환되기도 한다. "음이 성하명 양이 병들고, 양이 성하면 음이 벼은다. 양이 승하면 열이 나고, 음이 승하면 한기가 든다"(<<소문.음양응상대론>>). "양이 허하면 바깥이 차갑고, 음이 허하면 안이 뜨겁다"(<<소문.조경론>>) . "음이 겹치면 반드시 양이고, 양이 겹치면 반드시 음이다"(<<소문. 음양응상대론>>). 비록 만물을 임의로 음양으로 나눌수 있다고 하고, 음과 양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하며, 이런 학설은 당연히 온갖만물과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해석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행(五行)의 상생상극(相生相克)은 최초에는 나무(木), 불(火), 흙(土), 금속(金), 물(水)의 다섯가지 속성에 대한 관찰에서 시작되었다. 목생화(木生火, 목에서 불이 나온다. 이것은 나무를 태우면 탄다는 것에서 나옴), 화생토(火生土, 화에서 토가 나온다. 이것은 불을 태우면 재로 된다는데서 나옴), 토생금(土生金, 토에서 금이 나온다. 이것은 흙속에서 금속을 캐낼 수 있다는데서 나옴), 금생수(金生水, 금에서 수가 나온다. 이것은 금속을 녹이면 액체가 된다는데서 나옴), 수생목(水生木, 수에서 목이 나온다. 이것은 수분이 수목을 자라게 한다는데서 나옴); 목극토(木克土, 목이 토를 이긴다. 이것은 나무가 흙을 뚫고 들어가면서 자란다는데서 나옴), 토극수(土克水, 토가 수를 이긴다. 이것은 흙으로 댐을 만들어 물을 막을 수 있다는데서 나옴), 수극화(水克火, 수가 화를 이긴다. 이것은 물로 불을 끌 수 있다는데서 나옴), 화극금(火克金, 화가 금을 이긴다. 이것은 금속이 불에 녹는다는데서 나옴), 금극목(金克木, 금이 목을 이긴다. 이것은 금속인 낫등으로 나무를 벌채할 수 있다는데서 나옴). 이런 관찰은 당연히 매우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것이며, 깊이있는 검토를 거친 것은 아니다. (도대체 수은(水銀)은 물인가 금속인가? 많은 금속과 비금속원소는 모두 불에 탄다. 왜 금생화, 토생화는 안되는가?) 우주만물의 변화를 모두 이 다섯가지 요소의 상생상극으로 설명하는 것도 더욱 견강부회이다. 예를 들어, 오행과 대응시키기 위하여, 억지로 4계절을 5계(五季)로 늘려서 장하(長夏)를 추가하였다. 오색(적, 청, 황, 백, 흑)도 현대의 삼원색의 개념과 맞지 않는다. 인체에서도 오행와 상응하는 오장(간장, 심장, 비장, 폐, 신장), 오부(담, 소장, 위, 대장, 방광), 오관(눈, 혀, 입, 코, 귀), 오체(근, 맥, 육, 피, 골), 오지(五志, 즉 怒, 喜, 思, 悲, 恐), 오액(五液, 淚-눈물, 汗-땀, 涎-침, 涕-눈물, 唾-침), 오성(呼, 笑, 歌, 哭, 呻). 다섯 개로 만들기 위하여, 중의는 원래의 육부(六腑)에서 하나(三焦)를 빼버렸고, 칠정(七情)에서도 두가지(憂, 驚)를 빼버렸다. 다섯가지에 맞추기 위하여 임의로 지정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왜 간이 목에 속하는가? 이유로는 간의 성격이 펼쳐지기를 좋아하므고 올라가기를 좋아하므로 목으로 했다(<<중의학>>. 정수증 주편, 인민위생출판사. 2000년)고 한다. 그러나, 간이 어떻게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또한 "나무는 가지가 발달하여, 위로 향하고, 바깥으로 향하고, 생장하고, 펼쳐지는 특징이 있다. 간은 목에 속하므로, 그 성격도 펼쳐지고 소통하며 억제하고 막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간은 소통과 배설을 주로 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은 순환논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견강부회하게 귀속시키게 되면 상생상극의 관계를 쉽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어려워진다. 그래서, 변통할 수밖에 없고, 오행의 상생상극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어느 일행은 다른 사행에 영향을 받고, 또한 어느 일행은 다른 사행에 영향을 주어, 상극관계도 변화가 생길 수 있고, 상생상극관계도 그래서 상대적인 것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금생수이지만, 물이 금속을 도울 수도 있고, 토생금이지만, 금속이 흙을 도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생상극외에 다시 상승상모(相乘相侮)가 있다고도 한다. 한쪽이 지나치게 강하거나, 지나치게 약하면, 과도한 극(克)은 승(乘)이 되고, 반대가 되면 극(克)이 모(侮)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보면, 오장, 오부...의 각종관계는 모두가 서로간에 상생상극, 상승상모하게 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로써 볼 때, 기, 음양, 오행이라는 것은 모두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며, 확정하거나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고 존재하며, 수시로 변화하며, 각종 가능한 관계를 모두 포괄하므로, 무소불위, 무소불능, 무소불포이다. 그리하여 일체의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고 이를 가지고 알거나 모르는 일체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게 되는 것이다.그리하여, 중의에서는 모르는 병이 없고, 치료할 수 없는 증상이 없다. 만일 중의(한의사)가 치료하지 못하면 그의 기술이 떨어지는 것이거나 환자의 운명이 그러한 것이다(소위 병은 치료하지만 운명은 치료할 수 없다는 治病不治命). 그리고 중의이론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이론체계는 사실상 검증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과학으로는 성립될 수 없고, 그저 철학이나 현학(玄學)으로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리하여 변증법적으로 보자면, 중의는 현학계통으로 표면적으로는 진선진미하여, 전체적으로는 정-반-합에서 반을 이끌어낼 수 없다(특별한 경우의 부정은 제외). 그리고 자체개선능력이 없어서 그저 외부적인 역량에 의하여 버려질 수밖에 없다. 만일, 현대과학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마도 중의의 많은 황당한 이론을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천년전에 중의가 이 정도 수준이었는데, 지금도 중의는 이정도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이전에 중의는 파상풍, 폐결핵, 수종, 천식, 매독등등에 속수무책이었고,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현재도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모두 서양의학에 의지하여 치료하고 있는데, 서양의학도 이전에는 치료하지 못하던 것들이다. 일반적인 질병도 중의의 손에 들어가면 의난질병(疑難疾病, 무엇인지 잘모르는 병)이 되어, 어떤 병이라고 논쟁이 끊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학연구는 다른 실험과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 "관찰-모델수립-예측-검증"의 방법을 거친다. 반대로, 중의저작에서는 검증할 수 없는 예측이 많다. 예를 들어, 지금도 중의는 한밤중에 수태하면 낳은 아들은 반드시 수명도 길고 부귀하다고 한다. 어떻게 검증할 수 있는가? 손사막(孫思邈)은 이렇게 단언했다: "다만, 능히 열두여자를 거느리면서도 배출하지 않으면, 늙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만일 아흔세여자를 거느리면서도 이러할 수 있다면, 만년을 살 수 있다"(<<방내보익>>). 이것은 또 어떻게 검증한단 말인가? 그저 아름다운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의 검증은 반드시 객관적이어야 하고, 실증과 이성의 원칙을 지켜야 하며, 주관적인 편차를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러나, 중의는 주관적인 "심법(心法)"을 강조하고, 비이성적인 "깨달음(頓悟)"를 중시한다. 초기저작들이 "갑자기 깨달았다" "어느날 분명해졌다"고 하고 있고, 후기저작들은 "선오(禪悟)", "심오(心悟)"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히 현학의 방법이지, 과학의 방법은 아니다. 현재 심지어 어떤 사람은 중의이론은 완전히 "내증실험(內證實驗)"을 근거로 하여 "창조"해냈다고 한다. 이런 "내증실험"은 반드시 자신의 수련을 통하여 "내시반관(內視反觀)"의 능력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지만 경락, 혈도, 오장, 육부, 혈기운행등등을 분명히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신비주의자들의 말이다.
바로 검증의 객관성을 도모하기 위하여, 과학적인 방법이 강조하는 것은 반복성과 예측가능성이다. 중의는 전혀 다르게, 특별히 반복불능성과 불가예측성을 강조한다. 상술한 "심법" "돈오" "내시반관"등등은 모두 개인의 순수한 주관적 체험이다. 당연히 독립적으로 반복되거나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료실무에서 중의들은 인시, 인지, 인인제의(因時,因地, 因人制宜, 시간 장소 사람에 따른 처방)를 중시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항상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것은 반복성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중의의 예측가능성도 마찬가지로 문제된다. 정기, 음양, 오행은 원래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측정할 수가 없다. 장기는 그래도 측량한다고 치고, "삼초(三焦)"는 유명무형(有名無形, 이름은 있고 형태는 없다)인데 또 어떻게 측량할 것인가? 후세의 중의들은 중의의 오장육부에 대한 기능묘술이 해부생리학과 맞지 않는 난감한 사태를 회피하기 위하여, 오장육부는 추상적인 부호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장기는 더더구나 측정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 과도한 추상화이외에 중의가 예측불가능한 또 하나의 이유는 대량으로 모호한 묘사와 비유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맥을 집을 때의 묘술에서 혁맥(革脈)은 북가죽을 만지는 것같고, 삽맥(涩脈)은 칼로 가볍게 대나무를 긁는 것같고, 활맥(滑脈)은 쟁반에 구슬이 구르는 것같고, 현맥(弦脈)은 거문고의 현을 뜯는 것같고, 긴맥(緊脈)은 노끈을 끌어 묶는 것같다는 등이다. 그저 중의들의 주관적인 느낌과 상상일 뿐이고, 서로 다른 중의는 서로 다른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이며 객관적으로 측량할 수가 없다. 이런 모호성은 임의로 해석하는데 유리할 뿐이고, 이론의 실패에 도망갈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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