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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사투리와 애국

by 중은우시 2009. 5. 8.

: 사걸붕(史杰鵬)

 

난창(南昌)에서 푸퉁화(普通話, 중국의 표준어)를 말한다는 것은 우아하고 고상함을 나타낸다(십여년전의 느낌이므로 현재는 바뀌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광저우(廣州)에서 광동말(粤語, Cantonese)를 말하면 자부심을 느낀다. 그 근원을 따져보면, 역시 가난한 것을 싫어하고 부자를 좋아하는 것이 원인이다. 만일 해외에 난창말(南昌話)를 하는 부유한 도시가 있다면, 난창화는 분명히 아주 고귀한 신분으로 유행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따라배웠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 재물이 사람을 갖고 노는 것이 너무 심하구나. 세태의 염량도 너무 뿌리깊구나.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같다. 이것은 방언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

 

나는 어려서부터 난창말을 하는 것을 아주 부끄럽게 여기지는 않었다. 그러나 푸퉁화로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은연중에 그 사람이 나보다 한 등급이 높다고 느꼈다. 푸퉁화를 나의 외삼촌은 관료들이 하는 말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보아도 푸퉁화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백성의 고혈을 짜낸다는 것이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직을 대표하는 언어는 자연히 고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점차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북경에서 십여년을 지내다보니 오히려 난창말을 듣고 싶어진다. 어떤 때는 캠퍼스를 거닐다가, 가끔 귓가에 한두마디가 들려오면 아주 반갑고 기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난창화가 비천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오히려 푸퉁화보다 낫다고 느껴진다. 특히 우리가 중문을 배울 때, 난창말은 고전문학의 음률미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그 기능이 뛰어나다. 어떤 학생들이 나에게 그가 죽어라 공부해도 입성(入聲)을 구분하지 못하겠어서 시사의 음률의 아름다움으 느낄 수 없다고 토로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봐 난창말을 배워봐. 가끔 어떤 친구가 고대 성모의 청탁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봐. 난창말을 배워봐.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난창 고향출신이면서 나에게 상성, 거성, 입성의 음양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물어보면, 나는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쿠, 너는 왜 자기의 모어인 난창말을 충분히 활용하지 않는거냐? 난창말을 너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난창화는 바로 보배덩어리이다. 나는 거기에서 아주 눈부신 것들을 많이 끄집어내고 있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다.

 

내 가까운 친구 하나도 난창 사람이다. 그이 처는 상류사회에 융합되고자 애를 쓰고 있으면서, 아이가 난창말을 배우는 것을 극력 저지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의 아들이 배운 몇마디 난창말은 모두 남녀의 생식기와 관련된 것뿐이다. 이건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나의 그 친구는 푸퉁화로 귀화한 후에 평소에는 난창말을 전혀 하지 않지만, 격동하면, 어려서부터 입에 익은 난창의 욕설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마치 주머니속의 송곳처럼, 막을래야 막을 수가 없다. 사마천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막다른 처지에 놓이면, 근원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고통과 피로가 극에 달하면 하늘을 찾이 않는 사람이 없다. 질병의 고통이 아주 크면 부모를 부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사실 격동하여 흥분했을 때도 근원으로 돌아간다. 생식기는 천지, 부모와 같은 효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헐리우드영화에서도 하느님은 왕왕 fuck과 함께 나오지 않는가? 이것은 민족특색이 아니라 보편가치이다.

 

난창말을 배우지 않고 이미 오랑캐화된 푸퉁화만 배운다면, 성공적으로 전통문화를 드날릴 수 없다. 장쑤(江蘇) 진탄(金壇) 사람인 돤위차이(段玉裁)는 일찌기 강유고(江有誥)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렇게 말했다. 상고의 운부(韻部)에 지(), (), ()는 셋으로 나뉘는데, 그 연유를 모르겠다. 그는 아주 처량하게 자신이 늙었는데, 만일 강유고가 그에게 해답을 줄 수 있다면 그는 웃으며 죽을 수 있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안휘 흡현 사람인 강유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은 모두 우울하게 죽었다. 후스(胡適)는 이것을 우스개거리로 삼아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그들이 광동으로 가서 쟁기를 끄는 아무 농부나 붙잡고 물어봤어도,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광동방언에는 셋이 명확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회남자>>를 읽으면서, 흘독(禿)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청나라의 대유학자인 유태공(劉台拱)()의 뜻을 모르고 있어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난창말에서 대머리(禿頭)흘두()라고 부른다. 흘독은 바로 대머리를 뜻하는 두 글자를 병렬시킨 것이다. 만일 유태공이 당시에 난창으로 놀러라도 와서, 아무 늙은 농부라도 붙잡고 물어봤으면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방언의 역할을 적지 않다. 방언을 버리고, 관료말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전통문화를 받들 수 있고, 애국할 수 있을 것인가? ? 다른 이치라면 내가 당신을 설득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애국이라는 점에서는 내 말에 토를 달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