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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한자혁명과 문화단절

by 중은우시 2009. 4. 16.

글: 주대가(朱大可)

 

신문화운동의 중요한 영향은 바로 현대성 숭배와 혁명의 광상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문화가 국민개조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확인해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저 "혁명"적인 청소수단에 의하여 일거에 문화폐단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제도전환에 기초를 닦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이러한 "혁명적인 사고"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1950년에 <<상용간체자등기표>>를 제정한 때로부터 시작하여, 1956년 <<한자강화방안>>이 정식으로 공포되기까지 짧은 7년동안에 진나라제국에서부터 근 2000년간의 문자혁명이 완성된다. 이는 1957년의 경제대약진운동, 1966년의 "문화혁명"로 가는 길을 닦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번 한자혁명은 더욱 격렬한 문자혁명의 모종의 서곡에 불과할 뿐이었다는 것을. 1950년, 모택동 주석은 동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병음(알파벳)문자는 비교적 편리한 일종의 문자형식이다. 한자는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현재는 그저 간체화개혁을 할 뿐이지만, 장래 언젠가는 근본적인 개혁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최고지도자의 전략적 설계이다. 모주석은 가장 간결한 말로, 문자혁명의 첫번째 기획안을 내놓은 것이다.

 

호풍(胡風)선생이 말한대로, "시간은 개시"될 때, "하나의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자"는 유토피아적인 꿈이 전 중국을 휩쓸었다. 그리고 한자는 바로 이 문화고열현상에서 첫번째 목표였다. "과학"을 모르는 "과학원장"인 곽말약 선생의 주재하에, 한자는 문화에 제사지내는 첫번째 희생양이 된다. 한자는 형장으로 끌려가서, 신랄한 심판을 받고 사지가 분해된다. 신월파 시인이면서 고문자학자인 진몽가 선생은 문자개혁을 반대한다고 하여 '우파분자'로 몰려서 문화혁명중에 자결하게 된다. 그는 한자혁명에서 가장 유명한 제물이었다. 간체화운동의 탱크에 깔려죽은 것은 진몽가 한 사람만은 아니다. 방대한 '우파' 무리와 문화대약진에 대하여 감히 'No'라고 말했던 지식분자들도 포함되었다.

 

사실상, 소수의 지나치게 복잡하 문자들은 적절한 수술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의 한자필획은 받아들일만한 범위내였다. 다만 이번 병음화운동의 서곡은 그저 일종의 문자 자체의 변혁만이 아니었고, 더욱 복잡한 정치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일석수조로 아래의 전략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첫째, 민중에게 문화대통일의 권위를 세우고 진시황의 '서동문(書同文)'에 비견할만한 역사적인 위업을 세우고자 했다. 둘째, 스탈린을 영수로한 소련진영에 '자모공산주의화'의 결심을 전달하고자 했다. 셋째, 홍콩,대만의 자산계급반동정권과 철저하게 문화적으로 선을 긋고자 했다.

 

1956년에 한자혁명을 완성한 다음 해, 즉 1957년에 한자병음화는 추가로 의사일정에 오른다. 오옥장(吳玉章)이 이끄는 문자개혁회는 <<한자병음문자방안>>을 작성하여 국무원에 보고한다. 주은래는 마치 지나치게 서두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는 것같았다. 그리하여 "문자" 두자를 삭제하도록 함으로써, "병음방안"이 "병음문자"로 급변화하는 것을 막았다. 다만, 병음화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1960년, 당국은 여전히 완강하게 병음문자에 대한 지방에서의 실험을 계속한다. 산서 만영(萬榮)등지에서 배훈반(培訓班)을 조직하고, 심지어 모조리 병음문자로 이루어진 신문까지 창간했다. 이렇게 이번 간체화운동은 전중국에서 병음(알파벳)문자를 향하여 진행되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한자간체화운동은 병음화운동의 단계적 완성품이다. 이 점을 보지 못한다면, 이번 운동의 본질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간체화는 그저 과도적인 수단이었다. 최종목표는 바로 한자를 소멸시키고, 일체의 이들 문자로 이루어진 역사전통을 소멸시키고, '문화공산주의'의 위대한 비약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번 병음문자혁명은 결국 흐지부지 끝이 나고 만다. 병음화운동과 동시에 실패로 끝난 것에는 "1무(200평)당 만근"을 생산하겠다던 농업혁명이 있다. 그리고 전국에서 강철제련으로 대표되던 공업혁명도 있다. 이 세가지 혁명은 서로 호응하는 것이었고, 신성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던 것이었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유토피아의 청사진을 완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모두 '천의(天意)'를 거스르다보니 실패로 끝난 것이다. 그리고 민중들에게는 거대한 상처와 기억만을 남겼다. 다만 병음화운동의 반제품인 간체자는 살아남게 된다. 반우파투쟁의 위대한 성과들과 함께, 문화쇠퇴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이런 '간체자원죄'는 바로 오늘날 보편적인 의문을 자아내는 이유인 것이다.

 

1950년대 하반기에 입학한 초등학교 신입생들은 처음부터 간체자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간자체를 문화인식의 바탕으로 삼는다. 이것이 소위 '간체자세대'이다. 이 세대의 구성원들은 '번체자'문자로 된 글에 대한 존경심이 퇴화하고, 역사적인 감정이 날로 희박해지고 있다. 이런 문자계승이 단절된 것은 바로 문화대혁명이 대규모로 폭발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간체자를 추진한 딱 10년이 돈 후에 즉 1966년에 혁명의 푹풍이 다가올 때, 이미 자란 "간체자세대"는 앞장서 일어서서 역사를 쉽게 단절시켰다. 번체자로 된 책은 '독이 있다'고 하면서 '봉건주의'를 불사른다는 명목으로 구문화를 다 죽여버렸다. 문혁때 "소사구(掃四舊, 네가지 구악을 일소하다)"운동과 간체자세대간에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논리관계가 있다.

 

더욱 음미할만한 것은, 비록 두가지 문자가 교과서에 나란히 실렸던 쌍동이현상이 있은 적이 있다. 문화혁명때 제1차홍위병은 대부분 '간체번체혼혈세대"였다. 번체자문명과 밀접한 혈연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번체자에 대하여 표출한 적의(敵意)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들의 정치적 순결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들은 젊은 '간체자세대"보다 더욱 격렬한 혁명적 자태를 보였다.

 

세로쓰기 번체자도서를 불태우는 운동은 하나의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은 바로 번체자로 된 도서를 거의 남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겨우 극수소만이 겁없는 민중에 의하여 보존되어 요행히 살아남았다. 1972년이후, 그들은 글을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문득 나타났는데, 마치 일종의 외계문명이 보내온 선물같았다. 지하에서 책을 읽던 사람들은 왕왕 번체본과 간체본을 구별하여 도서가치를 판결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번체자문헌이 희귀하였으므로, 번체자가 싣고 있는 역사문화코드는 바로 그것이 진귀하게 취급받는 원인이 된다. 구판 <<삼국연의>>, <<요재지이>>와 <<안나카레리나>>등등은 각종 '혁명'서적의 외피를 달고 비밀리에 전해졌다. 마치 잿더미속에서 부활하는 문화의 불꽃과도 같았다. 이는 책을 읽는 사람들의 기갈과 영혼을 밝혀주었다. 그들 "문화마약중독자(그중 많은 사람들은 당시 도서를 불태우는데 참가했던 홍위병들이다)"ㅡㄴ 나중에 신3기대학생의 주류가 된다. 극단적으로 순결한 혁명의 시대에 번체자문헌은 바로 문화부흥의 비밀요람이었다. 번체자문헌의 역사적 공헌은 지금까지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문혁기간동안 출판된 혁명도서는 모조리 간체자로 쓰여졌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민문학출판사와 상해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수호전>>의 간체자본이다. 그들은 고전문헌을 간체화한 모델이었다. 광대한 "무산계급'에게 문화현대화의 도식을 제시했다. 가로쓰기로된 간체자방식으로 인쇄된 고전문헌은 바로 첫번째 정치적 감정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문자학의 입장에서 <<수호전>> 내지 <<홍루몽>>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더 많은 번체문헌은 계속 유죄를 받아 금지되었다. 문혁의 극단적인 언어환경하에서, 번체로된 책 그 자체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는 문명의 기억을 대표하고, 흘러간 세월과 따스하게 남아잇는 부분을 의미했다. 간체자는 혁명이었다. 현대성과 냉혹의 상징이었다. 글자모양은 시간의 칼이 되어, 문명의 단절을 불러왔다.

 

이렇게 간체화개조를 거친 문자는 바로 이데올로기의 중대한 은유와 참언이 된다. 마치 일부 연구자가 드러내보여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愛)"에서 "애(爱)로의 번화는 바로 "마음(心)"과 "영혼"이 대거 타락하는 상징인 것이다: 그리고 "성(聖)"이 "성(圣)"으로 바뀐 것은 바로 정신적인 고도에서(귀는 듣는 것을 대표하고, 입은 말하는 것을 대표한다, 바로 정신적인 철학의 상징이다), 더욱 저급의 토목건축의 고도로 퇴화한 것이다. 또한 "육(陸)"에서 "육(陆)"으로의 변화는 계급투쟁(击는 擊의 간체자임)과 내분형생활이 중국대륙에서 성행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외에 이상야릇한 부호인 "X"와 "又"가 문자내부로 스며들어왔다. 그리하여 한자의 영혼을 부식시키고 문자들을 가소로운 잡물로 만들어버렸다. 신조(神鳥)인 "봉(鳳)"은 "凤"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마치 부결(又와 X는 비슷하다)의 방식으로 문자의 신화, 신성, 상상력과 은유관계를 말살시켰다. 그리고 글을 읽거나 쓰는 자의 역사적인 기억과 문화적인 혈맥을 단절시켰다. 다만 이렇게 폭력적인 단절방식은 혁명적인 진화원칙에는 완전히 부합한다.

 

이 단절은 1977년부터 서서히 미봉되기 시작한다. 인민문확출판사는 대량의 중국과 외국의 문학명저를 출판하고, 간체자는 급진적인 '문화혁명'의 프로세스에서 벗어나서 구문명과 괴이한 화해를 달성한다. 그리고 구문명의 정신성과를 담기 시작한다. 간체자의 원죄는 이렇게 하여 감추어지게 된다. 이러한 문화타협은 간체자의 면목을 일신시키고, 마치 간체자는 무고한 것처럼 보이게 해주고, 마치 도덕적으로 순결한 킬러인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다. 간체자는 성공적인 탈권자이다. 신한자의 면목으로 세상에 나와서, 현대성의 명목하에, 한자의 은유적인 천성을 뜯어고치고, 전통문화부흥의 진전을 저지했다.

 

21세기의 중국대륙에, 간체자의 젖을 마시고 성장한 세대는 번체자에 대한 문화적인 친근감이 없고, 고전문화에 대한 애정이 있지도 않다. 그들은 간체자의 원죄를 무시하고, 그것이 한자를 멸절시킨 도구라는 역사도 인정하지 않는다. 신간체자세대는 심지어 공개적으로 "번체자를 회복시키겠다는 것은 80후(80년대이후출생자)를 병신으로 만는 것이다"라고 공격한다. 이것은 심각한 죄명이다. 번체자가 만일 젊은세대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바로 차디차게 버려져서 소멸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뿐아니다. 앞뒤로 적을 맞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가언어위원회의 행정권위에 의하여, 번체자는 비정식의 한자에 속한다; 학교교육에서 번체자로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고; 공공장소에서 번체자를 사용할 수 없다. 이들 법령은 바로 문자수정과 중화문명부흥의 중대한 장애이다. 이상의 원인에 비추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바로 즉시 번체자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찌감치 50년전에, 번체자는 대약진의 미친 짓 속에서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P.S. 번체자의 정확한 명칭은 당연히 '본체자(本體字)'여야 하고, 간체자는 마땅히 '모체자(毛體字)'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교류의 편의를 위하여, 본문에서는 두개를 통상적으로 부르는데로 적었다. 이것은 필자가 그 두가지 명칭에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