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덕덕왜특(德德歪特)
요나라는 북송, 서하, 금나라와 함께 존재하며, 이들과 전쟁시기와 평화시기를 겪었으며, 한때는 중국 중세기후기역사의 주류가 되었다. 동시에 중국의 통일다민족국가를 형성하고 발전시키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당나라 함통13년(872년), 거란족의 걸출한 우두머리 야율아보기가 일랄부(迭剌部)의 한 신규귀족가문에서 태어난다. 당나라 천복원년(901년), 막 이립(而立, 삼십)의 나이가 된 야율아보기는 일랄부의 "이리근(吏離菫, 군사수령)"에 오른다. 그는 여러번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실위(室韋), 돌궐(突厥), 해(奚)등의 부락을 격파했고, 심지어 장성을 넘어 하동, 대북을 약탈했으며, 많은 가축과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하여 일랄부의 정치력과 군사력이 크게 증가된다. 당천우4년(907년), 거란8부는 일치하여 야율아보기를 연맹의 칸으로 추대한다. 칸의 지위에 오른 날부터, 야율아보기는 건국칭제의 준비를 적극적으로 진행한다.
911년 5월, 야율아보기의 동생인 랄갈(剌葛)등이 공동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야율아보기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반란을 평정한다. 전쟁은 비록 3년이나 지속되었고, 야율아보기의 병력을 견제하고, 그의 대외확장계획을 교란시켰지만, 야율아보기의 수령의 지위는 이로써 더욱 공고하게 된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거란(契丹)이라 하고, 연호를 신책(神冊)이라 한다. 야율아보기는 "천황제(天皇帝)"라 칭히고 그의 처인 술률씨(述律氏)는 "지황후(地皇后)"라 칭한다.
역사상, 거란의 국호는 여러번 변동을 겪는다: 947년 "요(遼)"로 개칭하였다가, 983년 다시 "대거란"으로 고치고, 1066년 다시 "대요"로 고친다. 이후에는 다시 고치지 않고, 1125년에 금나라에 의하여 멸망한다.
한인들 및 그들과 연맹을 맺은 중원할거정권의 영향하에, 야율아보기는 이미 초원 유목부락의 통치자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눈을 초원지역 이외로 돌린다. 야율아보기는 황제를 칭한 후, 주변에 병력을 출동시킨다. 그의 방대한 정복계획은 막북을 정복하고, 요동을 점령하며, 고려를 신하로 삼고, 남하하여, 유주, 계주를 차지하고, 통치범위를 황하이북에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남으로는 황하, 북으로는 막북에 이르는 북방대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신책2년(917년), 태원에 주둔하고 있던 군벌 이존욱(李存勖)이 역량을 모아 후량(後梁)을 공격하고, 신주(하북성 축록)에서 징병하게 되자 군민들의 불만이 크게 된다. 이준욱의 부하장수인 노문진이 병력을 이끌고 요나라에 투항한다. 이것은 거란에 절호의 남하기회를 제공한다. 야율아보기는 이 기회를 잡고, 중원을 향한 제1차대규모전쟁 - 신주,유주전쟁을 일으킨다. 그는 거란병을 지휘하여 노문진과 공동으로 신주를 합공하여, 이존욱의 부하장수인 주덕성을 물리치고, 유주를 반년간 포위공격한다. 이후 야율아보기는 이존욱의 지원군이 강력하게 공세를 취하자, 어쩔 수 없이 철군한다. 다만, 유주는 실제로 노문진이 통제하는데, 이는 거란의 재차 남하를 위한 중요한 통로를 남긴 것이 된다.
신책6년(921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산해관을 넘는다. 탁주(하북성 탁주)를 차지하고, 정주(하북성 정정)를 포위한다. 그리고 이존욱과 사하, 망도(하북성 사하시 및 망도현)에서 큰 전투를 벌인다. 공세는 맹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눈이 내림에 따라 거란의 군마는 양초가 모자랐고, 사상이 컸다. 야율아보기는 부득이하게 다시 철군한다. 두번의 실패이후, 야율아보기는 전략배치를 바꾼다. 지공방향을 서북과 동북으로 향한다. 먼저 초원의 여러 유목부락을 정복하여, 측면에서의 위협부터 제거하고, 다시 남하하여, 하북, 하동을 다투려고 하는 것이다.
천찬3년(924년), 그는 친히 대군을 이끌고, 토혼, 당항, 저복등 부락을 정벌한다. 군대는 북으로는 오고산(몽골국 긍특산), 서로는 알타이산의 광대한 지역에 이른다. 다음 해, 야율아보기는 병력을 이끌고 동으로 발해를 정벌한다. 발해는 동북지구의 한 정권이고, 정치와 문화가 모두 북방민족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해동성국"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다만, 당시의 국력은 이미 하락하여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정복한 후, "동단국(東丹國)"으로 이름을 바꾼다. 그 뜻은 동쪽의 거란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황태자 야율배출이 동단왕이 되어, 동단의 일을 처리한다. 이렇게 하여 야율아보기의 세력은 발해연안에까지 이른다.
요나라가 건국되기를 전후하여, 대량의 한인들이 초원지역으로 들어간다. 야율아보기의 통치는 신축성있게, 거란족등 유목민족과 한조긍 농경민족을 모두 돌본다. 이리하여 요나라는 한족과 오랑캐를 동시에 통치하는 다원정권이 된다. 그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본족과 처족의 자제들로 하여금 거란의 여러 부를 지배하게 할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한족의 선비를 끌어들인다. 한연휘, 한지고, 강묵기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야율아보기를 도와 한족을 관리하고, 한족의 여러 일들을 처리한다. 장기적 안목을 가진 신흥유목민족의 수령인 야율아보기는 본민족의 문화건설을 중시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한자를 참고하여 거란대자(契丹大字)를 만들게 하고, 회흘문자를 참조하여 거란소자(契丹小字)를 만들게 한다. 거란문자는 나중에 실전되는데, 해방전에, 고고학자는 요경릉(내몽고 적봉시 파림우기의 북쪽)에서 출토된 "애책"에서 기괴한 문자를 발견하는데, 연구를 거쳐 오래된 거란문자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야율아보기는 군사, 정치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초원 각 유목민족과 북강의 큰 영토를 통일한다. 그리하여 거란민족과 북방의 각 유목, 수렵민족의 역사발전을 가속화시킨다. 천현원년(926년) 7월, 야율아보기는 발해국에서 회군하는 도중에 부여부(扶餘府, 지금의 길림성 농안현)에서 병사한다.
요태조 야율아보기의 정치생애에서, 한 여인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바로 황후인 술률평(述律平)이다. 술률평은 여러번 야율아보기가 전쟁을 벌이는데 도와주어 명성이 여러 이족에 떨치게 하였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야율아보기를 위하여 인재를 끌어모았다. 요나라의 개국공신중 하나인 한연휘는 바로 그녀가 추천한 사람이다.
요태조가 죽은 후, 술률평은 황후의 신분으로 칭제했고, 군국대권을 장악한다. 당시 공신 중신들은 그녀의 지휘를 받는데 반발했다. 술률평은 부족의 전통을 내세워 공신중신들을 태조를 위하여 순장하라고 명령한다. 한인인 조사온은 이렇게 반박했다: "가까운 사람으로 따지자면 태후만한 사람이 없는데, 태후는 왜 순장되지 않습니까?" 그러저 술률평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칼을 빼들고, 자기의 오른 손을 잘라버린다. 그리고 오른손을 요태조의 관에 넣는다. 그리고는, "자녀가 어려서 어미가 없으면 안된다. 잠시 지하에 까지 따라갈 수 없으니, 손으로 대신하겠다." 신하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할 수없이 태조를 위하여 순장된다. 술률평은 이로 인하여, "단완태후(斷腕太后)"라는 별명을 얻는다.
술률평의 통치기간동안 일찌기 후당에 사신을 보내어 관계를 좋게 하고, 오랫동안 전란을 겪은 여러 민족들은 잠시동안 평화와 안정을 얻는다. 야율아보기가 죽은 후, 술률평의 주재하에, 차남 야율덕광이 거란의 새 황제가 된다. 그가 바로 요태종이다. 야율덕광은 20세때 거란 병마대원수가 되어, 야율아보기를 따라다니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가 즉위한 후, 거란족의 정치와 경제는 크게 발전하고, 요나라는 점차 강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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