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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왕윤(王允)은 왜 채옹(蔡邕)을 죽였는가?

by 중은우시 2009. 4. 27.

글: 유병광(劉秉光)

 

왕윤은 죽기전 마지막 1년동안 2가지 큰 일을 한다: 하나는 권신 동탁(董卓)을 죽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인 채옹을 해친 것이다. 동탁은 조정대권을 장악하고 사람됨이 흉악하고 잔혹하여 그를 제거하는 것은 정치투쟁이면서도 백성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채옹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던 문인이고, 모든 사람들이 추앙하던 지식인이었는데, 왕윤은 동탁을 제거한 후 채옹들 그냥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채옹의 죽음은 후세인들로 하여금 아쉬운 마음이 들게 하면서, 또한 그를 죽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채옹이 죽은 이유에 대하여 3가지 버전의 3가지 주장이 있다. <<삼국연의>>에서는 동탁이 피살된 후, 채옹인 "그의 시신에 엎드려 대성통곡하였다"고 하였다; 사승의 <<후한서>>에는 채옹이 "동탁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탄식의 말을 했다"고 한다; 범엽의 <<후한서>>에서는 채옹인 "동탁이 주살되자, 부지불식간에 탄식하는 말을 했고, 얼굴색이 바뀌었다"고 적었다. 3가지 주장은 비록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채옹이 부적절한 상황에서 부적절한 태도를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역사적으로 근거있는 말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순수한 지식인으로서, 채옹은 정치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치를 얘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동탁이 주살되고, 왕윤이 권력을 장악하는 민감한 정치환경하에서 채옹은 동탁이 그를 알아주었던 은혜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시신에 엎드려 대성통곡"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공연히 나서서 왕윤에게 밉보이고, 어긋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무의식적으로 '탄식'하거나 '얼굴색이 바뀌는'정도의 일로 채옹을 동탁의 일당으로 보아서 감옥에 가두고, 죽여버렸다면, 그것은 왕윤이 일부러 핑계를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탁은 채옹보다 1살이 많고, 왕윤보다는 5살이 맣았다. 연대가 비슷하고, 연령이 비슷한 조건하에서, 동탁은 거친 야만적인 군인이었고, 채옹은 재주가 뛰어난 문화적 거장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왕윤의 성장은 비교적 복잡하다. 그는 조정중신이면서, 문화엘리트이다. 정의를 주재하면서 도량이 좁았다. 채옹이 살인마와 같은 동탁의 손에 죽지 않고, 재주가 넘치는 왕윤의 손에 죽었다는 것은 '문인상경(文人相輕, 문인들은 서로를 무시한다)'의 한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문인은 대부분 같은 문인들의 질투를 받았다. 조조가 미형을 대한 것이나, 종회가 해강을 대한 것이나, 왕안석이 소동파를 대한 것이나, 이것은 모두 같은 류끼리는 배척하는 사례이고, 이러하 사례는 수두룩하다. 문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못하고, 명성이 다른 사람만큼 날리지 못하면, 정치적인 수단으로 자기보다 뛰어난 문단의 적수를 비난하고, 죽이고 하는 것이 수천년이래 문단에서의 정치소인배, 혹은 정계에서의 문화소인배가 자주 했던 짓거리이다. 뛰어나면 시기를 받는 것이 채옹을 포함한 적지 않은 문인들이 역사적으로 박해받았던 근원적인 이유이다.

 

채옹(133-192)은 자가 백해(伯)이고, 진류 사람이다. 동한말기에 경사, 천문, 수학, 회화 ,서법, 음악등의 분야에 모두 뛰어난 문화천재였다. 그는 문단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았던 문화의 대가이다. 채옹과 비교하자면, 왕윤은 정객이면서 문인이다. 정치를 잘 알고, 그는 계책을 통하여 권력을 장악하는데 있어서는 일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에 있어서는 실력이 부족하다. 특히 채옹과 함께 선다면 그는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정변을 일으킨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왕윤과 채옹의 이력을 뒤져보면, 그들은 모두 애국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는 이론이 없다. 모두 일찌기 환관의 정치간여를 반대하는데 노력하고 희생했다. 모두 자기 마음과는 어긋나게 동탁의 편을 든 적이 있다. 이런 점으로 보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윤은 사상이 편집적이고, 도량이 좁았고, 모나났으며, 사람됨이 차가웠다. 그는 피곤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채옹은 생각이 활달하고, 사고가 개방적이며, 교우범위가 넓고, 비교적 시원시원하게 사는 사람이었다. 바로 성격상 두 사람은 전혀 맞지가 않았고, 활약하는 상태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리하여 두 지식인간에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채옹이 왕윤의 손에 죽는 것은 시간적인 문제였다.

 

채옹은 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사마천의 예에 따라 <<한서>>를 쓰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며, 사대부들도 그를 위하여 구명활동을 벌였다. 채옹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면 할수록, 인기가 조야에 올라가면 갈수록, 바로 왕윤이 채옹을 질투하는 마음에 불을 질렀다. 왕윤은 비록 왕을 보좌하는 인재이기는 하지만 매번 채옹과 설전을 벌일 때면, 말문이 막히곤 했었다.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굴욕에 말로는 당할 수 없지만 마음 속으로 인정하지 못하는 가슴속의 불길이 커져갔고, 문학에서 제대로 감각을 찾지 못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우울함에다가, 자신의 손에 생사여탈권을 쥐게 되자, 히스테릭한 발작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 한무제께서 사마천을 죽이지 않고, 그로 하여금 헐뜯는 책(謗書)을 쓰도록 하여 후세에 남겼다. 이제 국가의 기운이 다시 쇠하고 신기가 굳건하지 못한데, 아첨배(臣)로 하여금 어린 군주의 좌우에서 글을 쓰게 할 수 없다. '성덕(聖德)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아니라, 우리 당이 다시 헐뜯는 말(議)'을 들을 수 있다." 그는 <<사기>>라는 거작을 헐뜯는 책이라 칭하고, 사마천을 아첨배로 칭했다. 여기에서 왕윤은 본말을 전도했는데, 이미 살기등등함을 엿볼 수 있다. 그가 '성덕'에 해가 있을까 두렵다고 한 말도 거짓말이고, '헐뜯는 말'을 들을까 두렵다고 한 것도 거짓말이다. 그저 공적인 구실로 사적인 원한을 푼 것이다. 문신이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무장보다도 더 무서운 경우가 많고, 더욱 냉혈한 경우가 많다. 가련한 채옹은 그래서 죽었다.

 

여기까지 쓰다보니, 돌연 기효람의 <<열미초당필기>>에 있는 여우를 논하는 글이 생각난다. 글의 개략적인 내용은: 어떤 손님이 호선(狐仙)에게 무엇이 가장 무서운지 물어보았다. 호선은 '여우(狐)'라고 대답했다. 그 손님은 왜그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류인데 왜 무서워하는가'라고 하였다. 호선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천하에 같은 류가 정말 무섭다...재산을 다투는 자는 같은 부친의 자식들이오, 총애를 다투는 자들은 같은 남편의 처첩들이요, 권력을 다투는자는 같은 관직의 선비들이며, 이익을 다투는 자는 같은 시장의 장사치들이다. 세력이 가까우면 서로 걸리적거리고, 서로 걸리적거리면 분쟁이 생긴다." 이야기는 비록 황당하지만, 우의는 깊다. 아쉽게도 채옹은 너무 일찍 태어나서, 그 글을 볼 기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