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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한영제(漢靈帝): 가장 비지니스 마인드를 가진 황제

by 중은우시 2009. 1. 6.

작자: 미상

 

한영제는 비지니스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매매(買賣)였다.

 

황제가 매매에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출신과 관련있다. 그는 원래 보잘것없는 정후(亭侯)의 아들이다. 그러나 그는 황제가 되었지만,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았다. 황제는 천하의 주인이지만, 한영제의 눈에는 이것들은 모두 허망한 얘기였고, 자기의 손안에 들어와야 자기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외국, 각군(各郡), 각봉국(各封國)에서 매번 진공을 하면, 국고에 넣기 전에 그가 먼저 일부를 떼어서 개인소유로 했고, 직접 황궁으로 보냈다. 그리고 여기에 멋있는 이름을 붙여 "도행비(導行費)"라고 하였다. 이런 그의 행동에 심지어 그의 곁에 있는 환관인 여강(呂强)의 눈에도 거슬렸다. 그리하여 상소문을 올려 완곡하게 그에게 천자는 당연히 천하를 중히 여겨야지 소소한 돈을 욕심내어서 백성을 불안하게 하지 말라고 권했다.

 

한영제는 다 읽기도 전에 대노했고, 상소문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장양(張讓)"의 앞에서 "여강"을 나쁜 놈이라고 욕했다. 그러자, "장양"도 자연히 그를 따라 여강을 한바탕 욕했다. 이후, 한영제는 여전히 자기 하고싶은대로 했고, 도행비도 여전히 거두었다.

 

한영제가 도행비를 대거 거두어, 자신에게 상당한 돈이 생기자, 서원(西園)에 소금고를 만들어, 이들 돈을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는 적잖은 돈을 갖게 되자, 기세가 올랐다. 그리하여 자신의 비지니스를 시작한다. 그리고 후궁에 "상업가(商業街)"를 건설한다.

 

바깥의 시장을 본떠서, 각양각색의 상점과 가판을 두었고, 궁녀, 비빈의 일부를 각종 상인으로 분장시켜, 물건을 팔게 하고, 나머지 일부를 물건을 사는 손님으로 분장시켰다. 그리고 노래하는 사람, 원숭이 재주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파는 물건도 아주 풍부했다. 연지, 비녀, 옥패에서 여인의 내의까지 있었고, 금. 기, 서, 화에서부터 각종 서비스까지 제공하여 아주 요란했다.

 

황제 자신도 상인의 의복을 입고, 물건을 파는 상인으로 분장해서, 시장에서 왔다갔다 하거나, 혹은 주점에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점주, 고객과 서로 말싸움하고,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즐겁게 놀았다. 황제에게 이런 비지니스 마인드가 있었으니, 이들 '군중연기자'들도 이에 뒤지지 않았다.

 

이들 "상업가"에 있는 적지 않은 물건은 모두 긁어모은 기진이보들이었다. 궁녀와 비빈들은 속속 훔쳐갔고, 심지어 누가 많이가져가고 누가 적게가져갔는지를 놓고 서로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한영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손안에 돈이 있지만, 그래도 집도 있고, 땅도 있어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긁어모은 대량의 돈으로 "상업가"를 여는데 쓰는 외에 하간의 고향에 전답을 사고, 집을 짓는 등 부동산투자를 시작한다.

 

그가 긁어모은 돈은 너무 많았다. 전답을 사고 부동산을 사고나서도 남은게 적지 않았다. 총명한 한영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모든 돈을 한 곳에 투자해서는 안된다는 이치를; 그리하여 이 돈을 그가 총애하던 환관의 집에 보관시켜 둔다. 그리고 안전을 위하여,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에 모두 수천만씩 나누어 맡겼다.

 

황제의 거래는 하면 할수록 커졌다. 도행비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리하여, 한영제는 그의 머리를 굴려, 각양각색의 돈을 긁어모으는 방법을 강구했다. 장양, 조충(趙忠)도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그에게 궁전을 새로 짓고, 동인(銅人)을 주조한다는 명목으로 전세(田稅)를 거두게 하였다. 1무당 십전을 더 내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또 한재산을 긁어모았다.

 

그래도 한영제는 만족하지 않았다. 다시 각 주,군(州,郡)에 명하여 목재, 석재를 낙양으로 보내라고 명한다. 그리고 환관들에게 검수권한을 부여해서, 검수할 때 이렇게 저렇게 트집을 잡아서 불합격판정을 하게 한다. 그렇게 하여 불합격 목재를 원가의 10분의 1 가격으로 싸게 팔도록 한다. 환관은 그 후에 다시 이 목재를 각 주,군에 되팔아서, 차액을 챙긴다. 그리고 주,군은 이들 불합격했던 목재를 사서, 다시 낙양으로 운송하지만, 환관들은 여전히 불합격판정을 내린다.

 

이렇게 반복하여 가지고 놀면서, 운송해온 목재들이 산처럼 쌓였고, 나중에는 다 썩어버렸다. 궁전은 몇년이 지나도록 만들지 않았다. 한영제는 그 과정에서 큰 돈을 번다. 그러나 각 주, 군은 크게 손해를 본다. 그리하여 주, 군은 다시 손실을 백성들에게 떠넘기지만,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한영제는 점차 깨닫게 된다. 온갖 신경을 써가면서 생각해낸 이런 돈을 긁어모으는 방법들은 비록 효과는 괜찮지만, 그래도 너무 귀찮았다. 마침내 그는 황제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인기상품 즉 관직을 발견한다.

 

이 절묘한 방식은 그의 모친인 동태후(董太后)가 가르쳐 준 것이다. 동태후도 변변찮은 집안 출신으로, 원래 재물을 목숨처럼 아끼는 인물이었다. 돌연 하룻만에, 신분이 격상하여 태후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탐욕이 극도로 커지게 된다. 한영제가 사방에서 돈을 긁어모으고, 고향에 전답을 사모은 것은 바로 그녀가 뒤에서 극력 지지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아들이 돈을 어떻게 긁어모을까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와 한 마음 한 뜻인 동태후도 똑같이 고민을 거듭한다. 그러나, 다만 세금은 이미 충분히 많이 거두고 있어서 더 올리기 힘들었고, 진공품은 일찌감치 한영제가 개인적으로 챙겼다. 다시 돈벌 방법을 찾으려니 그다지 쉽지가 않았다.

 

이때, 동태후는 이전에 매관매직했다는 것을 생각해낸다. 갑자기 이것이 거대한 돈줄이라고 느끼게 된다. 즉시 기뻐서 아들에게 얘기해준다. 비지니스마인드를 가진 한영제는 즉시 조서를 내린다. 상림원에 매관매직기관을 설치하고, 공개적으로 관직을 팔기 시작한다.

 

동한의 매관매직은 등태후(鄧太后)때부터 시작하지만, 그때는 가끔 하는 정도였고, 비교적 온화한 방식이었으며, 부자들의 돈을 거두어 '국가의 급한 돈'으로 쓸 뿐이었다. 이것을 돈버는 도구라고 보지는 않았다.

 

다만, 한영제는 이것을 가장 좋은 매매거리로 보았다. 그리하여 각각의 관직에 가격을 붙여서 아예 가격표를 만들었다.

 

당시에 정했던 가격은 연봉600석의 관직은 600만전, 2000석의 관직은 2000만전...이렇게 계산해서 관직의 가격을 정했다. 황제의 자리를 팔지 않을 뿐, 위로는 삼공(三公)에서 아래로는 현령(縣令)까지 모조리 돈으로 살 수가 있었다. 비록 국가가 선발한 특별한 인재라 하더라도 절반 혹은 1/3의 비용을 납부해야 했다.

 

만일 중요한 직위나 돈이 많이 생기는 관직은 추가로 돈을 더 거두었다. 당연히 이것을 직접적으로 돈을 내고 관직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다지 듣기에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것에 전문적인 명칭을 붙이니 "예전(禮錢)"이라고 하였다. 그저 충성심에 넘치는 관리가 조정에 선물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파는 측이건 사는 측이건 그다지 쑥스러울 것이 없었다.

 

한영제의 이런 대규모 매관매직은 광화원년(178년)부터 중평원년(184년)까지 계속되었다. 매매가 오래되니, 가격도 시세에 따라 조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은 백성을 직접 대하므로, 돈을 긁어모이기가 좋았다. 판매가격도 중앙관리보다 배나 높아졌다. 각 현은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 현관의 판매가격도 지역에 따라 달라지기 시작한다. 돈을 적극적으로 내도록 하기 위하여, 관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가격을 적어서 입찰식으로 가장 가격을 높게 쓴 사람을 임명하기도 했다.

 

당연히 매관의 가격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관직을 원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아니면 그가 보유한 재산에 따라 수시로 증감되었다. 예를 들어, "최열(崔烈)"은 사도(司徒)가 되고자 했는데, 그의 출신이 북방의 명문거족이고, 유명인사였다 그리하여 관계를 동원하여 500만을 쓰고, 1천만의 가치가 있는 사도의 관직을 얻어냈다.

 

그가 취임하는 날, 궁중에서는 융중한 임명의식을 거행했다. 한영제가 친히 나갔고, 백관들도 계단아래에 정열해 있었다. 최열이 득의만면한 표정을 보고, 한영제는 돌연 생각했다. 이 사됙을 너무 싸게 판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아쉬움을 참지 못하고 측근에게 투덜거리게 된다: "이번 관직은 손해보고 팔았다. 원래 1천만을 받았어야 하는데...."

 

곁에 있던 중상시가 끼어들어 말했다: "그가 500만을 낸 거도 이미 괜찮은 것입니다. 최공과 같은 기주의 명사들이 어찌 관직을 돈주고 사려 하겠습니까. 현재 그도 폐하의 상품을 인정했으니, 이후 이 관직은 더욱 잘 필릴 것입니다. 폐하께서 손해볼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중에 최열의 아들이 그에게 말했다: "대인께서는 이 삼공의 자리를 사셔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의론이 분분합니다. 모두 이 관직에 돈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돈냄새(銅臭)"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해도, 한영제는 관직을 할인해서 파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는 규정했다. 이후 관리의 이동, 승진 혹은 신규임명은 모부 반드시 1/3 혹은 1/4의 관직기준가격을 납부해야 한다. 이것은 관리가 되려면 그의 25년이상의 합법적인 수입을 미리 납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관리들은 이처럼 고액의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여, 관직을 버리고 떠났다. 아무도 관리가 되려하지 않으면, 한영제의 매매는 손해보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탐관오리가 되고 싶지 않고, 관리가 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관직을 맡아야 했다.

 

예를 들어, "사마직(司馬直)"은 저명한 청백리이다. 황제는 특별히 가격을 깍아서 그에게는 300만전만 받고 그를 거록태수로 보냈다. 조서를 받은 후, 사마직은 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휴가를 청하는 식으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지만,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어서 억지로 응락한다. 그는 부임하는 길에 생각하면 할수록 황제에게 화가 났다. 그는 경전을 인용하여 시정의 폐해를 공박한 후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물론 사마직과 같은 인물은 정말 너무나 적고도 적었다. 한영제에게 비지니스 마인드가 있었지만, 그의 밑에서 관직을 얻은 자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임하자마자 죽어라 돈을 끌어모았고, 최단시간내에 관직을 사느라 들인 원금을 회수했다. 이렇게 하여 백성들에 대한 착취는 더욱 심해졌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