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은하(水銀河)
중국에서 황제 노릇을 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낮에는 한 무리의 남자(대신)를 상대해야 하고, 저녁에는 한 무리의 여자(후궁)를 상대해야 하며, 중간에 짬이 나더라도 이때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자(환관)들을 상대해야 한다. 고생한 결과는 바로 그들 중에 대부분이 단명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요(北遼) 시대에 1년에 3,4명의 황제가 바뀐 적도 있다. 이와 비교하자면, 황제의 여인들은 장수한 사람이 아주 많다. 모든 태상황을 다 합쳐봐야 한손의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이지만, 태후, 태황태후를 꼽는다면, 지네의 발가락을 다 써도 모자랄 정도이다. 오늘 얘기할 왕정군은 바로 이런 수퍼황후이다. 그녀는 일생동안 7명의 황제를 겪었고, 5명의 황제가 죽는 것을 보았다. 중국의 모든 황후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다.
왕정군(기원전70-기원후13)은 위군 원성(지금의 하북성 정정현) 사람이다. 대대로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전설에 따르면,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그녀의 모친은 태몽을 꾸었는데, 달이 제 자리를 벗어나 돌연 모친의 뱃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그녀를 회임하고, 그녀를 낳았다. 풍수이론에 따르면, 물은 음(陰)이고, 물의 정화가 달(月)이다(그래서 자금성의 후정서문을 월화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달은 황후의 상징으로 보았다. 과연, 기원전 53년(한선제 감로원년), 왕정군은 18세의 나이로 입궁한다. 이로써 황후가 되는 첫번째 발걸음을 내딛는다.
속담중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조비연이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얼굴 때문이고, 유아(劉娥)가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침상기술때문이다. 왕정군이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운때문이다. 만일 이런 운이 출현하는 빈도를 따진다면 가히 1만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운이라고 할 것이다. 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녀의 용모는 평범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궁했을 때, 마침 태자 유석(劉奭)이 사랑하는 태자비 사마씨가 병사한다. 죽기 전에 사마씨는 유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첩은 원래 죽을 게 아닌데, 다른 비빈들이 저주를 해서 죽는다." 사마씨가 죽고난 후, 유석은 아주 슬퍼하며, 사마씨의 말을 생각하면서 비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한선제는 태자가 너무 상심할까봐 걱정하여, 황후에게 궁녀 5명을 뽑아서 태자비로 삼게 하라고 한다. 왕정군도 그 안에 뽑힌다. 그녀는 붉은 꽃을 수놓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침 태자에게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다. 태자는 죽은 사마씨를 생각하며 비통에 빠져 있어서, 새로 태자비를 고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황후가 옆에서 재촉하자, 유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가락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궁녀 하나를 가르킨다. 황후가 보니 왕정군은 용모도 그럭저럭 보아줄만하고, 더구나 태자가 손가락으로 가르쳤으므로 사람에게 명하여 왕정군을 동궁으로 보내게 한다.
왕정군의 운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유석은 사실 왕정군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 밤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우연히 한번은 약을 잘못 먹었는지, 딱 한번 갔다. 바로 그 한번에 왕정군이 임신을 한다. 십개월후에 아들을 낳는다. 이후 유석은 다시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한선제는 적손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아주 기뻐하며 친히 이름을 오(鷔)라고 지어주고 자를 태손(太孫)이라고 지어준다. 그리고 자주 유오를 안아주며 놀았다. 모친은 아들이 귀해지면 같이 귀해지는 법이다(母以子貴). 왕정군의 황후지위는 이것으로 확실히 못을 박았다.
기원전 49년 십이월, 한선제가 붕어(죽은 첫 황제)한다. 유오는 3살이었다. 황태자 유석은 한선제가 붕어한 그날 미앙궁에서 용상에 오른다. 그가 바로 한원제(漢元帝)이다. 유오는 그의 장남이었으므로 황태자에 봉해진다. 다만, 왕정군은 아직 황후에 봉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석이 왕정군을 좋아하지 않아서이다. 그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은 부씨(傅氏)와 풍씨(馮氏)였다. 부씨는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렸다. 그래서 궁중의 인간관계가 아주 좋았다. 한원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다른 비빈들로부터 질투도 받지 않았다. 왕정군이 유오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부씨는 유강(劉康)을 낳고, 풍씨는 유흥(劉興)을 낳았다.
한원제는 황후의 봉관을 부씨에게 넘겨주고 싶어했다. 다만, 그 당시에는 유오가 이미 황태자에 올라 있었다. 황후의 봉관은 전통의 법도대로라면 당연히 왕정군의 차지였다. 한원제는 삼일간을 주저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왕정군을 황후로 삼게 된다. 그는 다만 궁중에 황후의 바로 다음가는 지위인 명호를 창설한다. 바로 소의(昭儀)이다. 소의의 지위는 승상과 같은 급이었다. 제후로 따지면 왕(王)에 해당했다. 그는 사랑하는 부씨, 풍씨를 소의로 삼고, 유강을 정도왕, 유흥을 신도왕에 봉한다.
왕황후는 황후라는 명분은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는 한구석에 밀려나 있었다. 다행히 왕정군은 성격이 유순해서 다른 후궁들과 다투지 않았다. 한원제는 황후집안의 사람들에게는 관례에 따라 은전을 베풀었다. 왕씨가족중에서 왕에 봉해진 자가 10명에 이른다. 이는 서한 말년 외척의 득세에 화근을 심는다. 다만 그녀의 아들인 황태자 유오에 대하여는 갈수록 불만이 커진다. 유오는 한때 책읽기를 좋아하고 공손하며 조심스러웠다. 한번은 한원제가 그를 불렀다. 유오는 급히 달려갔다. 다만 유오는 감히 황제의 전용도로를 가로지르지 못해서 먼 길을 돌아서 왔다. 원제는 태자가 늦게 왔다고 질책했고, 태자는 늦은 연유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한원제는 아주 기뻐했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유오는 경서를 점점 싫증냈고, 하루종일 놀거나 술을 마셨다. 한원제가 여러번 훈계해도, 태자는 고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원제는 유오를 쫓아내고 부소의의 아들인 유강을 태자로 세울 것까지 생각한다.
기원전 33년(한원제 경녕원년)에 한원제의 병이 심각해진다. 부소의와 유강이 곁에서 지켰다. 황후, 태자는 문밖에 쫓겨나 있었다. 하루는 한원제가 가까운 신하에게 태자를 폐출하고 유강을 태자로 세우고 싶다는 뜻을 밝힌다. 왕황후와 태자는 그 말을 듣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때, 한원제가 총애하던 신하인 시중 사단(史丹)은 한원제의 침궁으로 뛰어들어 머리를 숙이고 눈물콧물을 흘리며 말했다: "황태자는 명성이 천하에 널리 알려져서 신하들의 마음이 태자에게 있습니다. 이제 신이 폐하께서 폐립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시려면 먼저 신에게 사약을 내려주십시오!" 한원제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장탄식을 하고 말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황후는 근신하고 있고, 선제가 태자를 아꼈으니, 과인이 어찌 선제의 뜻에 어긋나게 하겠는가?" 이렇게 하여 유오는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왕정군도 황후의 봉관을 유지했다.
기원전33년 오월, 한원제가 미앙궁에서 죽는다. 향년43세였따. 유오는 황제위를 이으니 그가 한성제(漢成帝)이다. 왕씨는 황태후가 되어, 장락궁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성색에 빠져있던 한성제는 외삼촌 왕봉(王鳳)을 대사마 대장군 영상서사에 임명하여, 조정을 처리하게 한다. 한성제 자신은 매일 산으로 물로 놀러 다녔다. 조정대권은 실제로 황태후와 그의 동생인 왕봉의 손에 장악된다. 당당한 천자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였다.
한성제는 몸에 병이 많았다. 즉위한지 여러해동안 자식이 없었다. 정도왕 유강이 찾아오자 한성제는 그에게 경사에 남아서 같이 있자고 하였다. 그는 황제위를 유강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수화2년(기원전 7년), 한성제가 붕어한다. 정도왕 유강의 아들 유흔(劉欣)이 황제위에 오르니 그가 애제(哀帝)이다. 애제는 황태후 왕정군을 태황태후로 모신다. 애제가 즉위한 후, 그의 조모인 부소의, 모친인 정희(丁姬) 두 집안이 새로운 권력가문이 된다. 왕씨외척과 권력분배문제로 충돌이 발생한다. 태황태후는 왕망에게 사직을 명하고 모순을 완화시키고자 한다. 왕망은 마지못해서 사직서를 올린다.
원수2년(기원전1년), 애제가 붕어한다. 애제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태황태후는 애제가 붕어하는 날, 애제로 하여금 군정대권을 왕망에게 넘기도록 조치한다. 왕망은 다시 대사마의 보좌에 오른다. 그와 태황태후는 중산왕 유흥의 겨우 9살된 아들 유간(劉衎)을 황제로 세우니 그가 평제(平帝)이다. 평제는 나이가 어려서 조정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태황태후가 임조칭제한다. 즉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녀는 왕망에 의지했고, 왕망에게 정무를 맡겨버린다. 사실 왕망은 황제위를 노린지 오래되었다. 그는 당파를 모아서, 자기에 반대하는 자들을 내몰았다. 그리고 명예를 구하고, 널리 은혜를 베풀었다. 여러해동안 경영하여 그는 조정대권을 자신의 수중에 움켜쥘 수 있게 된다.
태황태후에 대하여는 왕망도 감히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가 많은 태황태후는 여전히 상당히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대권을 독점하기 위하여, 왕망은 끄나불로 하여금 상소를 올려서, 태후는 지존이시니,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은 좋지 않으니, 자잘한 일들은 친히 살펴보실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태황태후는 이 말을 듣고 아주 기꺼이 이후에는 봉후사작의 일만 그녀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 나머지 일은 모두 왕망이 알아서 처리하라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평제도 점차 자랐다. 왕망은 평제가 그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하여 먼저 손을 써서 평제를 독살한다. 그 후 나이가 겨우 2살인 유영(劉嬰)을 "유자(孺子)로 하여, 자신이 "섭황제(攝皇帝)"가 된다. 왕정군은 자기 손으로 기른 조카 왕망이 그녀 자손의 천하를 찬탈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후회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때의 조정대권은 이미 완전히 왕망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고, 자신은 유명무실했다. 더이상 왕망이 황제에 오르는 것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기원8년, 왕망은 소황제 유영을 폐하고, 신하들의 옹립하에 황관을 쓰고, 당당하게 용상에 오른 다음 태황태후를 알현하여 그 자신이 천명을 받아, 한나라를 대신하여 새로 신(新)나라를 세웠다고 말한다. 옛날에 실권을 장악했던 태황태후는 이제는 단지 분개하고 욕할 힘만 남았다. 다음 해 정월 초하루, 미앙궁에서 융중하게 신나라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된다. 왕망은 용상에 올라 황제를 칭한다. 백관의 인사를 받고, 태황태후를 "신실문모태황태후(新室文母太皇太后)"로 받든다. 한나라라는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왕망은 한나라의 옥새를 물려받아야 비로소 신나라가 한나라를 적법하게 대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가 황제를 칭한지 얼마되지 않아, 왕순을 장락궁에 보내어, 태황태후에게 전국옥새를 달라고 하게 된다. 태황태후는 대노하여, 왕순의 코를 가리키며 욕을 했다: "왕순, 너희 집안은 한나라황실의 황은을 빕었는데,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한황실의 사람이 적고 세력이 약한 틈을 타서, 왕망이 찬위하도록 돕다니. 너와 같은 사람은 개돼지만도 못하다. 나는 여전히 한황실의 과부이다. 얼마 더 살기 힘들다. 내가 죽으면 이 옥새도 묻을 것이다. 왕망에게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라." 왕순은 땅바닥에 엎드려 부끄러움에 온 얼굴을 땀으로 적셨다. 한참만에 고개를 들어 태황태후에게 말했다: "황상이 얻겠다고 결심했으니, 태후께서 오늘 내놓지 않더라도 내일은 내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황태후는 왕망이 전국옥새를 얻지 못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전국옥새를 꺼낸 후, 왕순의 얼굴에 대고 집어던지면서 욕했다: "나는 죽겠지만, 너희 형제는 분명히 멸족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태황태후는 한나라를 생각하고, 신나라의 예에 따르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시종들에게 여전히 한나라의 흑초(黑貂)를 입게 했다. 왕망도 이를 보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태황태후 왕정군은 그녀의 일생에서 마지막 시절을 비분속에 보냈다. 기원13년(신나라 시건국5년) 이월, 우울함과 비분 속에 왕정군이 병사하니, 향년 84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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