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한)

풍료(馮嫽): 중국역사상 최초의 여성외교가

중은우시 2008. 12. 31. 01:12

글: 위목색자(韋木色子)

 

<<한서. 서역전>>에 따르면, 풍료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걸출한 여성외교가이다. 사서에서는 그녀를 "사서에 능하고 일처리를 잘했다. 일찌기 정절(旌節)을 들고 공주의 사신이 되었으며, 성곽의 여러 나라에 하사품을 내렸다. 그들은 그녀를 존경하고 믿어서, 그녀를 '풍부인'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그녀가 학식이 있을 뿐아니라, 정치적 재능도 있고, 외교에도 능하여, 서역각국에서 아주 높은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출신이 미천했으므로, 겨우 해우공주(解憂公主)의 시녀의 신분으로 공주가 오손(烏孫)으로 시집갈 때 따라서 오손으로 갔지만, 실제로 그녀가 한 역할은 해우공주의 정치고문이었다.

 

해우는 제3대 초왕(楚王)인 유무(劉戊)의 손녀이다. 그녀는 세군공주(細君公主)가 죽은 후, 서한과 오손의 화친동맹을 유지하기 위하여, 명을 받들어 서역의 오손국에 시집간다. 서한왕조때, 그녀는 대외화친공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군국대사(軍國大事)에 참여한 일품부인(一品夫人)이다. 그리고 그녀의 지모(智謀)는 대부분 풍료에게서 나왔다. 한나라와 오손의 군사동맹이 형성된 것과 양국의 연합군이 흉노를 협공하여 승리를 거둔 데에는 모두 풍료의 공을 무시할 수 없다. 마침 풍료가 오손을 떠나 있을 때 해우공주는 한가지 일을 잘못 처리하고 그것이 후환을 남겨서 오손이 분열되기에 이른다. 풍료는 그녀의 총명과 재지로 해우공주를 이끌었을 뿐아니라, 오손의 여러 신하들을 다독거렸고, 해우공주의 후예인 오손의 인민을 교육시키고 훈도했다. 이리하여 한나라와 오손의 양국은 대대로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풍료의 명성과 신망은 오손에 넘쳐났을 뿐아니라, 그녀가 진실하게 추진해온 "단결과 안정의 보호하고 평화국면을 개창하자"는 말과 행동은 서역제국으로부터도 존경과 인정을 받았다. 바로 이러했기 때문에, 서한왕조는 일찌기 그녀를 해우공주의 사신의 신분으로 흠차대사(欽差大使)가 되어, 한나라의 정절(旌節)을 받들고, 비단가마를타고, 천산이남의 성곽제국을 방문하도록 했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오십을 넘긴 나이였지만,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설산을 넘고 사막을 건너고, 엄동과 혹서를 견디면서 삼십여개의 성곽국가를 방문한다. 그녀는 도착하는 곳마다 모두 상하로부터 융숭하고 애정어린 예우를 받았다. 그녀는 각국의 내우와 외환을 해결해주었고, 예의와 도덕을 얘기하며, 선한 것은 북돋우고, 악한 일은 억제하도록 역설했다. 한나라 조정의 은혜가 많은 작은 오아시스국가에까지 미친 것이다. 그리하여, 성곽제국은 모두 그녀를 '풍부인'이라고 존경했다. 그녀의 방문은 성곽제국이 한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서역도호부의 건립을 추진하는데에도 좋은 추진역할을 했다.

 

나중에 오손에 내부권력투쟁이 발생했을 때, 서역도호는 할 수없이 그녀에게 나서서 조정을 해주도록 부탁한다. 풍료의 남편은 오손의 우대장(右大將)이었다. 사람됨이 강직하고 노련하여 무게가 있었다. 그는 분쟁쌍방이 모두 존경하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풍료 부부가 중간에 알선하여 서로 화해를 하게 된다. 오래지 않아, 한선제가 이 일을 듣고는 관심을 많이 가진다. 제대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하여 풍료를 장안으로 불러, 친히 그녀의 보고를 듣는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번 분쟁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한다. 그리고 특별히 그녀를 지절정사(持節正使)로 하고, 축차(竺次), 감연수(甘延壽)를 부사(副使)로 삼아 그녀를 따라 오손으로 가서 잘 조사처리하도록 시킨다.

 

이전에, 한선제는 일찌감치 장라후(長羅侯) 상혜(常惠)를 파견해서 삼교의 인마를 이끌고 오손국의 수도인 적곡성(赤谷城)의 둔전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하여 풍료는 오손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두 명의 부사와 상혜를 함께 불러서 오손내부분쟁을 해결할 방안을 상의한다. 이어서 풍료는 한선제의 명령을 전하며, 오취도(烏就屠)를 적곡성으로 부른다. 풍료는 직접 그를 대면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무기를 버리도록 권한다. 더 이상 유혈사건을 일으키지 말라. 너는 권좌를 빼앗기 위하여, 가족간에 죽고 죽이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형제간에 서로 죽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네가 이렇게 하면 적들에게 유리할 뿐이다. 네가 권고를 더이상 듣지 않는다면, 한나라의 대군이 올 것이다. 그러면, 너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오취도는 그 말을 듣자 두려워졌다. 그리하여 급히 말한다: "풍부인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싸움을 멈추겠습니다. 그저 소왕(小王)의 봉호만 내려주십시오."  협의를 거쳐 원귀미(元貴靡)를 오손대곤미(大昆彌, 大王)으로 세우고, 마취도를 오손소곤미(小王)으로 세웠다. 당시 오손은 인구가 십만이 조금 넘었으므로, 4:6정도로 인구와 땅을 나누어, 대왕이 6만을 관장하고, 소왕이 4만을 관장했다. 내란은 이렇게 평정된 것이다. 풍료는 처리결과를 천자에게 보고한다. 한선제는 보고를 듣고, 한편으로 파강장군(破羌將軍)에게 더 이상 군대를 이끌고 출관하지 말 것을 명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신에게 조서를 가지고 오손으로 가게 하여 대왕, 소왕에게 각각 관인수복(官印綬服)을 하사하고, 봉호를 선포한다.

 

감로3년(기원전 51년), 해우공주의 큰 아들인 원귀비, 작은 아들인 치미(鴟靡)가 연이어 병사한다. 해우공주는 이미 70세의 할머니였다. 그녀는 고향을 아주 그리워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원컨대 해골이 돌아가 한나라땅에 묻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한선제는 그녀가 반생을 이역땅에 살았고, 국가를 위하여 애를 썼고, 한나라에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그녀와 풍료를 모두 장안으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공주의 예로 해우의 음식기거를 돌봐준다. 풍료에 대하여는 풍성한 녹을 주어 대우해준다. 2년후, 해우가 병으로 죽고, 공주의 예로 안장된다.

 

원귀미가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성미(星靡)가 오손대곤미가 된다. 성미는 나이가 어렸으므로, 국정을 장악할 수가 없었다. 풍료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에게 글을 올려, 오손으로 되돌아가서 성미를 돕게 해달라고 하였다. 당시는 마침 한선제가 붕어한 때였고, 태자 유상(劉爽)이 즉위하니 그가 한원제(漢元帝)이다. 황제는 서역의 안전을 고려하여, 비록 칠십여세된 고령의 부인을 사신으로 차마 보내기 꺼려졌지만, 풍료가 진심으로 절실히 원하자, 할 수 없이 윤허한다.

 

초원원년(기원전48년), 이미 할머니가 된 풍료는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세번째로 비단길을 오른다. 그녀는 100여명의 한군관병의 호송을 받으며 다시 오손으로 되돌아간다. 오손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녀가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수백리 먼길을 나와서 영접했다. 그녀가 오손에 돌아간 후, 낮에는 성미와 대신들을 도와서 함께 국정을 처리하고, 밤에는 쉬지않고 성미에게 경사를 가르치고, 인군의 도리를 강의했다. 풍료는 이렇게 국가와 민족, 그리고 대한의 사직을 위하여 황막한 변방에서 그녀의 일생의 심혈을 바친 것이다. 그리하여 오손의 인민과 함께 그녀의 남은 인생을 보냈다.

 

"<<한서>>를 살펴보면, 비록 풍료에 대하여 독립된 전(傳)을 두지는 않았지만, <<서역전>>에 나오는 그녀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녀가 서역에서 얼마나 업적을 쌓았는지를 알 수 있다. 서한 시기에 모두 18명의 서역도호를 보내는데, 그들의 업적과 공로를 볼 때, 정길(鄭吉)과 단회종(段會宗) 만이 풍료와 비길 만할 정도이다. 그러므로, 풍료가 서역에서 강토를 개척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 지위와 역할이 어떠했는지는 이로써도 알 수 있다."

 

풍료라는 이 서천여걸(西天女傑)은 여러번 조정에서 정식 사절로 임명받고, 이국을 방문한다. 이러한 경우는 수천년 봉건사회에서 유일무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