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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중국 고대의 농기구(農器具)

by 중은우시 2009. 4. 19.

글: 장력군(張力軍), 호택학(胡澤學)

 

중화문명은 휘황찬란하다. 만년역사의 강물속에 최소한 100억이상의 인민이 중화대지에서 생활했다. 무엇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수요를 해결해주었는가? 무엇이 중국인들로 하여금 어려웠던 시기에도 여전히 발전할 수 있게 해주었는가?

 

이 백억명의 먹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기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주 어렵다. 계속적으로 농경기술을 발전시켜야 하고, 계속 새로운 농경도구를 개발해야 한다. 많은 전통농기구의 발명은 전설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에 백억이 넘은 인구를 먹여살린 농기구에는 도대체 어떤 것들이 있을까? 중화역사상 4가지의 놀랍고도 대단한 농기구를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보기드문 고서의 그림을 덧붙여서 이들 위대한 발명품의 진면목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통차(筒車, 물레방아)

 

 

수전통차(水轉筒車)

 

고전통차(高轉筒車)

 

 

통차는 물의 흐름을 동력으로 하여 자동적으로 냇물을 끌어올리는 관개도구이다. 외형은 거대한 바퀴를 연상케 한다. 주위에는 여러개의 죽통(竹筒, 혹은 木筒)이 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모양을 물레방아(水輪)라고 부르는 것이다. 통사는 목재로 만든 대형의 서있는 수레바퀴이다. 횡축을 걸어놓고, 바퀴의 주위는 기울어지게 설치한 작은 죽통(목통을 쓸 수도 있다)을 단다. 수레바퀴의 아래에는 일부가 물 속에 들어간다. 물이 흐르는 충격으로 수레바퀴는 돌게 되는 것이다. 물을 가득 담은 작은 통은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에 자동으로 물을 나무통에 쏟아붇는다. 그러면 그 물은 논으로 흘러들어가서 벼를 키우는데 쓴다.

 

통차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당나라때이다. 당나라때 진정장(陳廷章)이 쓴 <<수륜부(水輪賦)>>를 보면, 통차의 구조, 공능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바퀴는 곡선으로 되어서, 오르고 내리면서 농부들에게 쓰인다." "나무를 잘라서 만들고, 강물에 의지하여 끌어올린다" 통차는 수륜(水輪), 위전통차(衛轉筒車), 고전통차(高轉筒車)등의 여러 형태가 있다. 뒤의 두 가지는 구조가 복잡하여 사용하기가 불편하여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수륜(통차)는 강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추진되므로, 외부에서 힘을 가할 필요가 없고, 효능이 좋고, 구조가 간단하여, 계속하여 농촌에서 전해내려왔다. 지금도 북방의 황하가에와 남방의 일부 산지에서는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

 

통차의 최대장점은 흐르는 물을 동력으로 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논에 물을 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곡원리(曲轅犁, 쟁기)

 

 

 

 

 

 

남방에서, 가장 두드러진 논농사농기구는 곡원리이다. 이는 강동리(江東犁)라고도 부른다.

 

당나라이전까지 무거운 장직원리(長直轅犁)를 썼는데, 회전이 어렵고, 땅을 가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그리하여 땅이 좁고 긴 계단형 논밭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강남의 농민은 장기간 농사경험에서 가볍고 편리한 단곡원리(短曲轅犁)를 만들어 냈다.

 

당나라때 육귀몽(陸龜蒙)의 <<뇌사경(經)>>(뇌사는 쟁기와 보습. 즉 농기구일반을 가리킴)에 기록된 강동리는 바로 곡원리이다. 강동리는 모두 11개 부품으로 구성된다. 이엽(犁)과 벽(壁)은 쇠로 만든다. 이저(犁底)와 책액(策額), 압참(壓), 이전(犁箭), 이원(犁轅), 이초(犁梢), 이평(犁評), 이건(犁建), 이반(犁盤)은 모두 나무로 만든다. 곡원리는 직원리와 비교하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이원이 짧고 고부러져 있으며, 끝부분에는 방향을 조절할 수 있는 이반이 달려 있다. 밧줄로 소의 어깨에 걸고 끌대 자유롭게 옴직이거나 방향을 바꿀 수 있다. 그리하여 한,위 시대의 장직원리로 땅을 갈 때 논밭의 끝부분에 도착하면 방향을 뒤집느라고 애를 먹던 수고를 덜게 되었다. 조종이 간편하고 소 한마리로 땅을 갈 수 있으며, 가축의 힘도 덜 수 있어, 땅이 협소한 강남의 논에 적합했다. 둘째, 이평을 두어서, 이전을 상하로 조정할 수 있었다. 견인점의 고도를 조정하는 것이다. 땅을 갈 때의 깊이를 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셋째, 이벽을 개선했다. 이벽은 이엽의 위에 수직으로 올라가는데,  양자는 연속한 곡선을 이룬다. 당나라때의 이벽은 원형이어서 이경(犁鏡)이라고 불렀었다. 이는 뒤엎은 흙을 한켠으로 밀어낼 수 있어, 전진하는데 저지력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땅을 가는데 시간이 빠르고, 풀뿌리가 자라지 못하게 근절할 수 있었다. 곡원리는 조작하는 것이 장직원리보다 훨씬 편했다. 각종 토양과 서로 다른 용도에 맞추어 땅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경작효율을 끌어올렸고, 경작의 질도 끌어올렸다. 넷째, 이초와 이저는 이초의 움직임과 폭을 조절할 수 있었다. 이는 갈아엎는 너비를 조절할 수 있었다. 곡원리는 중국전통 쟁기의 주류였다.

 

셋째, 앙마(秧馬)

 

 

 

 

 

앙마는 앙선(秧船) 또는 앙등(秧)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논농사에서 모를 옮겨심을 때 앉는 기구이다.

 

앙마는 개략 북송중엽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집에서 쓰는 네발달린 의자가 변해서 된 것이었다. 기본구조는 4발달린 의자의 아래에 약간 크게 양쪽으로 솟아오른 미끄럼판이 추가되었다. 왜냐하면 네 발이 있어서 모습이 말을 타고 있는 것같기 때문에, 그리고 모내기할 때 사용하므로, 사람들은 이를 "앙마"라고 부른 것이다. 앙마의 사용방법은 조작자가 앙마의 위에 올라탄 다음에 약간 앞으로 기울여서, 두 발을 흙속에서 약간 힘을 두면 앙마는 앞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이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소동파는 원풍연간에 황주에 유배가 있었는데, 무창의 휴전(畦田)에서 농민들이 모두 앙마를 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소동파는 흥미를 느끼고, 자세히 관찰했다. 앙마는 "유조(楡棗)를 배로 하여(느릅나무)(쉽게 미끄러짐), "추오(楸梧, 오동나무)를 등으로 하여(가벼움), 머리와 꼬리가 치솟아 오르고 중앙은 오목하게 들어갔다. 형태는 작은 배와 같은데, 농민이 앙마에 타고서 모를 뽑는 것은 마치 참새가 진흙 속에서 뛰어오르는 것과 같다. 하루에 천휴(千畦)를 모낼 수 있다. 모를 뽑을 때는 경쾌하고, 허리를 굽히거나 등을 구부릴 필요가 없다. 앙마의 또 다른 작용은 앞머리에 모를 놔둘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아주 모내기에 아주 편리했다. 소동파는 앙마를 크게 칭찬한다. 매번 어느 지방에 갈 때마다 이를 보급했다. 소동파가 혜주(광동성 혜주)로 좌천되어 가 있을 때, 남하하는 길에 여릉(강서성 태화)에 들러서 <<화보(禾譜)>>를 편찬한 증안지를 만난다. 소동파는 <<앙마가>>를 지어서 준다. 이 시는 앙마의 형태와 작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후인은 <<앙마가>>를 석비(현재 태화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를 새겨서 후대까지 전해지도록 하였다. 앙마가 나타난 후, 역대 문헌에서도 여러군데 기록이 나타난다. 원나라때의 <<왕정농서>>, 명나라 서광계의 <<농정전서>>, 청나라 흠정의 <<수시통고>>등의 농서에도 모두 그림과 함께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도 앙마는 남방의 농촌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넷째, 호두(斗, 두레박)

 

 

 

 

 

호두는 일종의 소형 인력으로 물긷는 관개도구이다. 형상은 두레박과 같다. 양쪽에 밧줄을 달고, 두 사람이 밧줄을 당겨 두레박에 물을 긷는 것이다. 수위낙차가 크지 않은 곳에서 배수용으로도 쓰고, 관개용으로도 쓴다. "호두"는 아마도 훨씬 이전부터 발명되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한 자료의 기재가 없다. 원나라때의 <<왕정농서>>에는 호두의 작용, 사용방법과 제작재료등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호두는 물의 높이가 높지 않은 밭가나 용수차로 물을 끌어올릴 필요가 없는 논에서 사용한다. 사용방법은 호두에 두 줄의 밧줄을 매달고 두 사람이 공동으로 조작한다. 물을 두레박에 담아서 논밭으로 끌어올린다. 호두는 통상 버드나무가지, 등나무가지를 사용하여 짠다. 이 농기구의 제작은 어렵지가 않다. 어려운 것은 실제로 조작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협력을 잘 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손으로 밧줄을 잡고, 반드시 끌어당기고 밀고 하는데 잘 협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두레박에 물을 담아서 물을 길을 수가 있는 것이다.

 

호두는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인력으로 물긷는 농기구로서 제한된 범위내에서 관개 혹은 배수용으로 쓰인다. 아주 간편하게 쓸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