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사회/중국의 과학

중국인은 왜 트랙터를 발명하지 못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2. 24.

글: 학원출판사

 

중국고대에 이런 격언이 있다: "공욕선기사, 필선이기기(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 일을 잘 하려면 먼저 도구가 좋아야 한다)" 여기서 "기(器)"라는 것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각종 생산도구를 포함한다. 역사상 매번 민부국강(民富國强)의 국면이 나타날 때면 모두 선진적이고 효율이 높은 생산도구를 발명하고 보급한 것에서 시작했다. 우리가 오늘날 특별히 혁신형국가건설을 강조하고 있는데, 바로 혁신만이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역사가 반복적으로 증명한 진리이다. 중국의 전통 농기구는 중국문명발전에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을 뿐아니라, 일부는 주변국가 심지어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세계농업문명의 진보에도 공헌을 하였다.

 

고대 농기구역사상, 영향이 가장 큰 것은 이구(犁具, 쟁기)와 우경(牛耕, 소를 부려 밭을 가는 것)의 발명이다. 전통농업에서 사용된 쟁기는 원시사회의 뇌사(, 호미)가 점차 변모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고대문화에서는 "뇌사(호미)"를 "犁(쟁기)"라고 불렀다. 쟁기의 발전역사는 먼저 목석(木石)으로 만든 쟁기에서 시작하여, 금속으로 만든 쟁기로 변천한다. 후자는 다시 청동쟁기와 철쟁기로 나뉜다.

 

<<산해경>>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농신(農神)"인 후직(後稷)이 "백곡(百穀)을 내리고", 후직의 조카인 숙균(叔鈞)이 "경작을 시작했다" 다만, 전설상의 "경(耕)"은 아직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쟁기를 이용하여 땅을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갑골문에서 "물(勿)"이라는 글자를 어떤 사람은 "쟁기(犁)"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물(物)"이라는 글자를 소가 쟁기를 끄는 모양을 묘사한 상형문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商)나라때 이미 쟁기를 이용한 경작과 소를 이용한 우경이 나타났다고 본다. 다만, 또 다른 일부 학자들은 문헌이나 문물에서 모두 은상시대에 이미 우경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갑골문의 "물(物)"의 오른쪽 "물(勿)"은 피가 뭍은 칼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물(物)"은 칼을 이용하여 소를 잡는 것을 묘사한 상형문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춘추시대가 되면, 우경은 확실히 문헌상 기록으로 나온다. 이런 선진적인 생산방식은 당시 아마도 그다지 보편화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비교적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유행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은 "소(牛)"와 "경(耕)"을 가지고 이름을 많이 지었다. 예를 들면, 공자의 제자가운데 어떤 사람은 "염경자백우(耕字伯牛)"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마경자자우(司馬耕字子牛)"라고 한다.

 

우경이라는 생산방식은 새로운 생산력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단순히 인력에 의지하여 밭을 갈던 방식에서 가축의 힘을 이용하여 쟁기를 끌게 되었다는 것은 혁명적인 기술발전이다. 그것은 농업문명사상에서 근대에 발명된 트랙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이외에 우경에 사용되는 쟁기를 제작하는데에는 일정한 역학원리가 필요하다. 이는 당시에 이미 복잡한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공법이 발달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쟁기로 밭을 갈게 된 이후, 중국에서는 다시 씨를 뿌리는 수레인 루거(車)가 발명된다. 이는 가축의 힘으로 끄는 일종의 파종기계이다. 동한때의 사람인 최식(崔寔)이 지은 <<정론(政論)>>에는 이 '루거'의 용도와 기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파종용 농기구로서 '루거'는 이미 현대의 파종기의 원리와 원형을 지니고 있다. '루거'를 이용하여 파종을 하면 거리가 일정하고, 깊이기 일정하게 되며, 간격이 균등하다. 그리고 파종시에 구덩이를 파고, 씨를 뿌리고, 흙을 덮는 작업을 한꺼번에 진행할 수 있다. 그리하여 파종의 품질을 제고시킨다. 그리고 업무효율도 끌어올린다.

 

중국의 선인들은 커다를 짐승, 예를 들어, 소, 말, 당나귀, 노새등으로 하여금 쟁기를 끌게 하고, 수레를 끌게 하고, 타고서 활을 쏘기도 하였다. 그리고 수력(水力), 풍력(風力)을 이용하여 곡실을 갈기도 하고, 물을 끌어올려 관개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다른 것의 힘을 빌리니, 그 이로움이 백배나 되었다" 중국은 한나라때 이미 가축의 힘을 이용한 방아()과 물의 힘을 이용한 방아가 있었다. 이는 곡식가공에 사용되었고, 껍지를 벗기고 가루로 가는데 사용되었다. 위진남북조시대가 되어, 더 많은 정교한 발명과 혁신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면, 위진남북조시대의 최량(崔亮)은 물수레바퀴로 8개의 마반(磨盤)을 돌리는 "팔마(八磨)"기를 발명하여, 양식가공의 효과를 8배나 증가시켰다. 서진때는 어떤 사람이 "팔마"를 좀 더 개량하여, 물수레바퀴로 돌리던 것을 소를 이용하여 끌어서 돌리게 만들었다. 역사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부른다: "책일우지임, 전팔마지중(策一牛之任, 轉八磨之重)" 이렇게 하여 물이 흐르지 않는 곳에서도 아주 효율성잇는 "팔마"를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나라때의 농학자인 왕정(王禎)은 팔마를 "연마(連磨)"라고 호칭하며, 우리를 위하여 입체적인 구조도를 그려놓았다.

 

또 하나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진 마거(磨車)가 있다. 이는 남북조시대의 발명가인 석호(石虎)가 제작한 것이다.

 

이것의 동작원리는 마차가 전진하는 동력을 이용하여, 일정한 연동장치를 통하여 석마(石磨)를 돌리는 전동기계이다. 마차는 전진하는 동시에 양식을 가공한다. 이는 아마도 유동성이 강한 특정환경에서(예를 들어, 이동중인 군대) 사용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런 기계장치는 분명히 복잡하였을 것이며, 후세에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다만, 석호의 발명아이디어는 아주 칭찬할만하다. 또 하나 남조의 저명한 수학자인 조충지(祖沖之)는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정확하게 "원주율"을 계산해냈다. 이것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조충지는 동시에 농기구발명가였다. 아마도 이 점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조충지는 구조가 복잡하지만 아주 실용적인 "수대(水, 방아)"와 "수마(水磨, 멧돌)"를 발명했다.

 

개략적으로 얘기하자면, 중국의 고대 농기구에 대한 중대한 발명은 위진남북조시대에 이미 기본적으로 완성된다. 전통적인 인력으로 조작하던 소형 농기구는 말할 것도 없고, 후세에 전승된 가축의 힘을 이용하는 농기구와 수력을 이용하는 비교적 복잡하고 교묘한 곡물가공플랜트장치까지 이때까지 연이어 발명되었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분명히 궁금하게 생각할 것이다. 중국고대에는 이렇게 많은 선진적인 농기구가 발명되었는데, 왜 근대에는 그렇게 많은 시대를 긋는 과학기술발명과 창조가 있었지만, 모조리 5천년 문명이 집적된 중국과는 인연이 없었을까? 왜 증기기관차, 내연기, 전동기, 트랙터등등 하나도 지혜가 충만한 중화대지에서 먼저 제조되지 못했을까? 이 무거운 주제에 대답하기 위하여는, 역시 역사를 통하여 해답을 찾아야 한다.

 

중국은 과거 수천년간 농업사회였다. 주요한 특징은 농업으로 먹여살리고 농업으로 다스렸다는 것이다. 사람은 주로 농업이 제공하는 의식(衣食)에 의존했다. 국가정권이 정상적으로 운용되려면, 농업에서 재정수입이 계속 들어와야 했다. 역대군주는 모두 "국가의 대사는 농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농업을 본(本)으로 하는 중농정책을 써왔다. 다만, 역대봉건왕조는 거의 모두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것을 전제로 하는 중농정책을 썼다. 이러한 중농,중세의 정책을 밀어붙이기 위하여, 그들은 토지, 호적의 세금제도를 하나로 묶어서 점차 봉건제도의 틀을 갖추게 된다. 비록 몇번에 걸쳐서 농업세금에 대한 개혁이 있었지만, 그저 납세대상, 방식, 시간등의 측면에서 약간의 조정이 있었을 뿐, 세금징수총량은 항상 늘어났지 줄어들지 않았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중세의 본질을 바꾸지 못했다. 확실히 전통적인 중농사상은 농업생산을 중시하고, 농업세수를 중시하고 농민역량을 이용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들 중농정책의 결과는 항상 농민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봉건사회의 중농은 실질적으로는 민력(民力, 백성의 생산력)을 중시하고, 민리(民利, 백성의 이익)를 경시하는 것이었다. 봉건사회제도하에서 농민이 아무리 많은 농산품을 생산하더라도, 자신의 노동성과의 기쁨을 맛볼 수는 없었다. 심지어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 가렴주구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탄식만 나오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알아차릴 수 있다. 중농사상의 핵심은 "백성(民)"을 중시하는데 있다. 그러나, "백성"은 항상 권력의 주체가 아니었다. "군주"가 비로소 주재자였다. 중농의 결과는 그저 "황권"과 "관료"에 대한 복종과 순종을 길러냈다. 황권전제와 관료본위의 존재는 농민을 주체로 한 중국봉건사회에 민주의식이 결핍되게 만들었다. 농민은 한번도 평등하게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었다. 농민의 이익과 권익은 항상 침탈되고 착취당했다. 그리하여 무수한 참혹한 농민반란과 농민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천여년의 봉건사회는 모두 "치란교체(治亂交替, 평화와 혼란의 시기가 교체)"의 과정에서 발전했다. 봉건통치자들에 내놓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은 무겁고, 군주는 가볍다", "관리는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는 등등의 중농사상은 그저 계급갈등을 완화시키는 정치적인 구호에 불과했다. 대다수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제대로 보호해줄 수 없는 사회는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 사회가 주기적으로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과학기술의 진보와 발전을 저해했다.

 

6세기후반, 수나라는 과거시험제도를 창설하여 관리를 선발하기 시작한다. 시험내용은 주로 '사서오경'등 유가경전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공부를 잘하면 관리가 된다'는 유가사상이 더더욱 뿌리깊이 박히게 된다. 세대를 거듭하여 내려가면서, 지식인들은 하루종일 유가경전을 읽는데 매진하고, '관직에 나아가는'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지낸다. '관료본위'의 영향으로 인하여 봉건사회의 지식인들은 행정권력에 대하여 강력한 의존성을 나타냈다. 만일 한 민족의 엘리트가 모조리 관료로 진출하려고만 한다면, 이 민족은 발명창조의 동력과 기운을 잃어버릴 것이다. 심지어 과학기술발명은 '조충소기(雕蟲小技, 벌레나 깍는 보잘것없는 기술)'로 전락하여 아무도 돌아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반대편에서는 유럽각국이 14세기에 르네상스운동이 일어나고, 대량의 지식엘리트들이 과학실험을 통하여 진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과학기술발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했다.

 

두 가지사건이 거의 동일한 시간내에 발생하였다. 그 점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한 가지 사건은 1665년, 뉴튼(1642-1727)이 캠브리지대학 수학과에서 졸업논문 답변을 할 때, 중국에서는 일대의 명군 강희제가 "자격경어위(子擊磬於衛)"(논어.헌문)와 같은 제목을 내걸고 과거시험을 보고 있었다. 나중에 뉴튼은 역학의 3대법칙을 발견하지만, 강희제가 그 해에 뽑은 진사들은 모두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관리가 되었따. 또 한 가지 사건은, 저명한 생물유전학자인 멘델은 19세기중엽 식물교배시험을 통하여 식물유전변이의 법칙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생물육종생산에 있어서 시대를 긋는 변혁을 이룬다. 이때 청나라정부는 천맥년간 경험을 집대성한 <<수시통고>>를 반포하고, 이를 지방관리들이 농업기술을 보급하는 근거로 삼는다.

 

위에서 두 가지 사례를 보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왜 중화민족은 수천년간 강성한 이후, '역사의 일순간' 낙후되고 지리멸렬하게 되었는지. 이미 언급했듯이, 중국전통의 농학사상은 농업과 환경을 중시하고, 사람과 사회의 관계를 중시하고, 치국안방의 실용성을 강조한다. 역대의 통치자들이 제정한 농업정책은 효과적으로 농업사회의 운행을 통제했고, 고도의 농업문명을 구가했다. 다만, 중국전통문화는 정치적인 공리에서 독립하여 별도의 진리를 추구하고, 과학을 추구하는 정신이 결핍되어 있었다. 중국이 근대이래로 낙후한 것은 근본적으로 과학기술의 낙후에 있고, 이는 농업문명이 공업문명보다 낙후된데서 온다.

 

봉건사회의 모든 제도는 소농경제의 사회기초를 안정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항상 공상업의 발전을 소농경제의 범위내로 제한하려 했다. 그리하여 폐쇄적인 민족성격을 낳았다. 중국은 광활한 영해와 길다란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고, 자고이래로 선진적인 조선술과 항해술을 지니고 있었고, 항해에 반드시 필요한 나침반기술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쳔년동안 중국은 해양교통에서 이익은 거의 보지 못했다. 명나라때 유명한 항해가인 정화(鄭和)는 컬럼버스보다 100년이나 앞서서 미주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정화가 일곱번이나 서양으로 항해하면서, 한번도 중국을 세계무대로 끌어내지 않았다. 중국을 개방시키지도 않았다. 정화하서양이후 400여년이 지나서, 서구열강의 원양함대가 중국을 반식민지의 심연으로 몰아넣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의 명나라말기에 중국으로 온 전도사들을 통하여 서양근대과학을 접촉한다. 저명한 농학가인 서광계(徐光啓)는 전도사들과 친구가 되고, 전도사들의 소개를 받아 <<태서수법>>을 쓴다. 중국은 서방근대과학에 접촉한 시기가 일본보다 훨씬 앞섰다. 그러나, 뒤에 출발한 일본은 서방의 근대문명을 배운 후에 금방 강대해져서 무력으로 중국을 침략한다. 그리고 중국에 침중한 역사적 재난을 안긴다. 이 침통한 역사는 영원히 중화민족들이 기억하고 반성해야 한다.

 

만일 이천여년동안 인류문명이 집적한 것을 개략적으로 회고해본다면, 이렇게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앞의 천년간 중화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과학기술등 여러 방면에서 세계에 앞섰다. 그리하여 혼자서 1천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뒤의 천년간 전반기에는 중국이 서양국가와 공동으로 발전했고, 고하를 따지기 힘들었다. 후반기에 중국은 점차 낙후하여, 결국 열강의 침입을 받고, 낙후되고 얻어터지는 역사적 비극을 가져왔다. 고대의 농기구발명의 보급사를 보면, 역사의 맥락은 기본적으로 이렇다. 중국이 가장 먼저 트랙터를 발명하지 못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역사의 필연이다.

 

중국은 휘황한 역사가 있다. 중국은 현재 다시 굴기하고 부흥하려 한다. 중국은 인류의 세번째 천년에서 다시한번 휘황함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결론으로는 손중산의 말을 차용하고자 한다: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 동지들이여 계속 노력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