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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북송은 어떻게 멸망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4. 17.

글: 진해(秦海)

 

북송의 제6대황제인 송신종(宋神宗) 조욱(趙頊)이 집정하고 있을 때, 왕안석(王安石)을 재상으로 기용해서 변법(變法)을 시행했다. 이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한차례 개혁이었다.

 

개혁이 시작되자, 바로 사마광(司馬光)을 대표로 하는 보수파의 견제와 반대에 부닥쳤다.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도 보수파의 편에 섰다. 다만 조욱은 비록 동요가 있더라도, 계속 개혁을 진행하고자 했다. 아쉬운 점이라면, 조욱은 겨우 18년간 권좌에 있다가 38세의 나이로 붕어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인 조후(趙煦)가 즉위하니 바로 송철종(宋哲宗)이다. 당시 조후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리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 즉 조후의 할머니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태황태후는 원래부터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일단 수렴청정을 시작하자 즉시 사마광을 재상으로 삼고, 왕안석의 변법을 모조리 뒤엎어버린다. 보수파가 득세하니, 개혁파는 좌천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8년후, 태황태후가 죽고, 조후가 친정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즉시 당초 변법을 지지했던 인사를 중용하고 보수파를 조정에서 몰아내거나 외지로 좌천보내기 시작한다. 조치가 강도는 보수파가 득세했을 때 변법파에 대하여 했던 조치를 훨씬 넘어섰다.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할 때의 연호가 "원우(元佑)"였으므로, 보수파는 "원우당인(元佑黨人)"으로 불리웠다. 이때 사마광은 이미 죽었지만, 사후에 관직을 낮추고, 거의 부관참시될 뻔한다. 그가 주편한 <<자치통감>>도 하마터면 훼멸될 뻔한다. 다행히 송신종이 서문을 써주었기 때문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소식 형제도 계속하여 좌천당한다. 개봉(당시 수도)의 상청저상궁에는 석비가 하나 있었는데, 그 글을 소식이 썼다는 이유로 역시 훼기(毁棄)당하고, 다시 채경(蔡京)의 글로 다시 새긴다. 원우연간에 각지에 세워졌던 비각기사등등은 모조리 없애버린다. 엄격한 조사로 원우당인은 약7,8백명에 이르게 되는데, 그들은 영원히 관직에 다시 오르지 못하게 되었을 뿐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 연좌된다.

 

송철종 조후가 진정 권좌에 앉아 있었던 기간은 6년여이다. 사후에 그의 동생인 단왕(端王) 조길(趙佶)이 즉위한다. 그가 바로 "수금체(瘦金體)"의 서법으로 유명한 송휘종(宋徽宗)이다. 송휘종이 집권한 초기에, 송철종때 쫓겨났던 원우당인에 속하는 몇몇 신하들과 사마광의 명예를 회복시켜준다. 이 "서예가" 황제는 줏대없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었다. 조금있다가 다시 원우당인들을 숙청하기 시작하는데, 종전보다 훨씬 정도가 심했다. 칭호까지도 "원우간당(元佑奸黨)"이라고 한다. 그는 사마광을 우두머리로 한 "간당" 309명의 이름을 돌에 새기게 하여, 조당(朝堂)에 세워두고, 각주, 각현에서도 마찬가지로 새겨두도록 했다. 소식, 진관(秦觀), 황정견(黃庭堅)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간당"에 이름이 들어간 사람들의 저작은 모조리 불태웠다. "간당"의 자제는 관직이 있건 없건 모조리 개봉으로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외지에만 거주할 수 있었다. 조씨종실은 "원우간당" 혹은 "간당"의 친척과 결혼할 수 없었고, 이미 정혼했지만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경우에는 파혼하도록 하였다. "원우"의 학술, 정사(政事)에 대하여 제자들을 모아 전수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

 

이런 험악한 정치분위기하에서, 관리들은 "원우간당"에 연루될까봐 전전긍긍했다. 자신의 입장이 확고하다고 밝히거나 승진을 위하여, 모조리 "간당"에 대하여 죽일놈이라고 떠들었다. 어느 관리를 공격하고자 하면, 그의 글에서 문장을 몇 개 끄집어내어, 하자를 골라내어 그가 "간당"이라는 흔적만 찾아내면 된다. 그리하여 전체 조정, 심지어 전체 관료사회가 정력을 "간당"에 대한 책임추궁과 투쟁에 쏟아부었다. 일시에 조정, 관료사회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되어 버린다. 2년여후에, 전체 관료사회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이처럼 조령모개는 관리들의 마음 속에도 약간의 거리낌이 있게 되고, 마음 속으로 따르지 않게 된다. 소식, 황정견의 시문은 금서가 되고, 수장자들은 반드시 불태워버려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바로 공격대상이 된다. 당시의 관료사회 당시의 사회는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송휘종 선화7년(1125년), "서예황제" 조길도 국면을 수습할 수 없다고 느꼈는지, 황위를 태자인 조항(趙恒)에게 물려준다. 그리고 자신은 즐기기만 하고 일은 하지 않는 태상황이 된다. 송흠종(宋欽宗) 조항은 겨우 1년여간 황제를 지낸다. 이 기간동안에 국면을 되돌리고자 노력하나, 북송왕조는 이미 병이 뼛속까지 파고들어, 아무도 회춘시킬 수가 없었다.

 

정강2년(1127년), 금나라병사가 대거 남하하고, 송나라군대는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황하의 천험도 지키는 병사가 없었다. 황급히 경성에서 파견한 군대에서 일부 사람은 말에 탄 후 두 손으로 안장을 꼭 붙잡고 놓지를 않아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런 군대가 싸울 수 있을까? 금방 금나라병사들은 개봉을 함락시키고, 송휘종, 송흠종 부자는 모조리 포로가 된다. 북송은 이렇게 멸망한다.

 

북송의 멸방이 완전히 '내분'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10년에 걸친 '간당'에 대한 숙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당나라사람 두목은 <<아방궁부>>에서 "육국을 멸망시킨 것은 육국이지 진나라가 아니다.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진나라이지, 천하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사실 북송을 멸망하게 한 것은 금나라사람이 아니라. 바로 북송 자신이다. 10년에 걸친 내부투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