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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거란황후 소관음(蕭觀音)은 어떻게 죽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 7.

글: 주상유(朱湘)

 

예전에 평서(評書)를 듣거나, 무협(武俠)을 읽었으면, 모두 소(蕭)씨집안이 요나라에서 얼마나 대단한 지위를 누렸는지 알 것이다. 거란인들이 요나라를 세운 이후, 요나라의 황제는 야율(耶律)씨집안에서 나왔다. 그러나, 황후는 모두 소씨집안에서 나왔다.

 

소동파가 4살되던 해에 소씨집안에 여자아이가 하나 태어난다. 이름은 관음(觀音)이라고 짓는다. 그녀가 자라자 성품(品), 용모(貌), 재주(才)를 모두 갖추게 된다. 자연스럽게 요도종(遼道宗) 야율홍기(耶律洪基)의 황후가 되어 총애를 받는다. 그런데, 소관음이 36살이 되던 해에 요나라궁중에 변고가 일어나서, 일대황후 소관음은 요도종에게 사사(賜死)된다. 궁궐 깊은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모두 취향이 초래한 화

 

이 사건은 하나의 상소문에서 시작한다: <<주의덕황후사령관소(奏懿德皇后私伶官疏)>>가 그것이다. 여기서 "의덕황후"는 소관음을 가리킨다. "사령관"은 창극배우과 간통했다는 말이다. 이 상소문은 당시 태자태부인 야율을신(耶律乙辛)이 써서 올린 것이다. 이 글에서 황후 소관음의 간통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였을 뿐아니라, 애정을 읊은 증거물인 <<십향사(十香詞)>>를 제출했다. 이것은 황후 소관음이 영관(伶官) 조유일(趙惟一)에게 보낸 사랑의 글이라고 했다.

 

일국의 황후인 소관음이 창극배우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아니면 야율을신이 너무 담대했던 것일까? 공공연히 황후를 모욕하고 황제에게 불명예를 안기다니. 이 궁궐의 수수께끼같은 사건을 분석해보자면, 소관음의 세 가지 개인 취미 즉, 시사(詩詞), 음률(音律), 서예(書法)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세가지 때문에 그녀는 한걸음 한걸음 암흑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비록 요나라의 개국군주인 야율아보기가 거란문자를 창제하기는 했지만, 요나라사람들은 무를 숭상하여, 자녀들에게 글을 읽도록 권장하지 않았다. 독서는 그저 시간낭비로 보았던 것이다. 요나라의 황후들은 대부분 가볍게 천군만마를 지휘하여 적진을 뚫고 들어갈 수는 있었지만 붓을 들어 글을 쓰고 시를 쓰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예외는 있는 법이다. 이 소관음은 바로 이 요나라황후들 중에서는 이단자 였다. 그녀는 거란복식을 하고 말을 타고 화살을 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오히려 붓을 놀리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여진문자를 숙련되게 익혔을 뿐아니라, 중원문화도 아주 좋아했다. 거의 광적인 수준이었다. 시사, 음율, 서예에 그녀는 모두 정통했다.

 

이 것들은 그녀의 생활에 무궁무진한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개인적 취향이지만, 나중에 소관음을 죽이는 '방흉(幇凶)'이 된다.

 

치명적인 <<회심원(回心院)>>

 

요도종에게 시집간 처음에, 소관음은 요도종의 총애를 받았다. 궁중에서 매일 저녁 함께 지냈을 뿐아니라, 궁밖으로 사냥갈 때도 데리고 갔다. 가끔 소관음으로 하여금 현장에서 시를 짓게 하여 자기의 사냥에 흥을 돋구기도 했다. 황태자를 낳은 후, 소관음은 더더구나 총애를 한 몸에 누렸다. 다만, 소관음은 글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사냥에 미친 요도종은 점점 조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조급해진 소관음은 글에서 읽은 현비(賢妃)들의 고사를 본받아 자신의 남편에게 간언을 한다. 그러자, 요도종은 이미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만 많은 여인을 멀리하기 시작한다.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하여, 소관음은 평생 배운 것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회심원>> 10수를 써서 거기에 곡조를 붙여서, 남편 앞에서 연주를 하기 위해서 연습을 한다. 하필이면 그녀는 이미 이렇게 사랑에 넘치는 사를 썼으면, 직접 바쳤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거기에 곡을 붙이려고 했다. 곡을 붙이려면 붙이는 것도 좋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곡을 아주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궁중에 그녀와 합주를 할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합주할 사람이 없으면 그냥 혼자 연주해도 되었을 터인데, 굳이 고수를 찾아서 합주를 하려고 했다. 그리고 고수는 모조리 남자들이었다.

 

생각해보라, 일국의 모후의 침궁에 수시로 젊은 남자가 드나들며 황후와 사랑이 넘치는 <<회심원>>의 곡을 연습하고 있으니, 문제가 생기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증하겠는가?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녀를 끌어내리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도 있는데...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

 

황궁은 정치투쟁의 중심이다. 역대이래로 모두 음모와 피바람이 충만한 곳이다. 소관음은 정치를 몰랐고, 혹은 자기를 보호할 줄을 몰랐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그 헛점을 파고들었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태자태부 야율을신은 요도종이 조정에 소홀한 틈을 타서 대권을 독점했고, 조정을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태자가 조정에 간여하기 시작한 후, 그의 권력은 점점 제한을 받았다. 태자가 승계하면 자기에게 불리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야율을신은 하루종일 눈을 똑바로 뜨고 태자나 황후에게 문제가 생기기만 기다렸다. 이때, <<회심원>>의 공연연습이 시작되었다. 야율을신은 아마도 마음 속으로 기뻐서 소리쳤을 것이다: "하늘이 나를 도우는 구나!"

 

그러나, 대신으로서 야율을신이 궁내로 들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황후가 자주 젊은 창극배우와 곡을 연습하는 걸 알았을까? 자연히 궁내에 이목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바로 황후의 곁에 있는 시녀인 단등(單登)이었다. 이치대로라면 황후를 곁에서 모시는 시녀이므로 황후의 심복이어야 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따. 단등은 황후에게 충성하지 않을 뿐아니라, 심하게 황후를 미워했다. 왜 그랬는가? 원래 이 단등은 바로 음륭에 정통한 궁녀였다. 비록 시합에서 조유일에게 일패도지하기는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실력이 남못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히려 황후가 조유일을 편들어주어서 자기가 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후가 왜 조유일을 편들었을까?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다. 그래서, 단등은 자주 여동생에게 불평을 해댔다. 마침 그녀의 여동생은 야율을신과 좋아하는 사이였다. 이 말은 자연히 야율을신의 귀에 들어갔고, 이렇게 연결이 이루어진 것이다.

 

<<십향사>>, 최후의 최명부(催命符)

 

단지 황후와 영관 조유일이 서로 그윽한 마음을 가지고 <<회심원>>의 합주를 연습한 것뿐이라면, 황제는 기껏해야 조유일을 죽이고 끝났을 것이다. 그 후에 계속 소관음을 냉대했겠지만. 황후와 비천한 영관과의 사이에 외도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보다 더 폭발력있는 증거가 필요했다. 당시는 메세지도 없으니, 가장 좋은 증거물은 바로 친필로 쓴 사랑의 서신이었다.

 

이 증거물은 적당한 시기에 나타난다. 색깔비단위에 소관음이 친히 사랑의 노래 <<십향사>>를 썼다. 그리고는 소관음은 7률 <<회고>>라는 시를 쓴다:

 

궁중지유조가장(宮中只有趙家粧)

패우잔운오한왕(敗雨殘雲誤漢王)

유유지정일편월(惟有知情一片月)

증규비연입소양(曾窺飛燕入昭陽)

 

어떤 사람은 이 <<십향사>>는 사실 야율을신이 다른 사람을 시켜 만든 후에 단등에게 건낸 것이라고도 한다. 그 후에 단등이 소관음에게 이 <<십향사>>는 송나라 황후가 지은 것이라고 거짓말하고, 소관음으로 하여금 그것을 베껴쓰고 다시 거기에 곡을 붙이게 해서, 양국의 황후가 하나는 사를 쓰고 하나는 곡을 붙이는 "이절(二絶)"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도록 권했다. 비록 <<십향사>>의 내용은 약간 방탕했지만, 당시 소관음의 심정을 잘 대변했다. 그래서 소관음은 친히 색깔비단에 옮겨썼을 뿐아니라, 그 뒤에 시까지 곁들여 붙인 것이다.

 

내막이야 어찌되었건, 공연은 여기서 끝난다. 소관음이 친히 쓴 <<십향사>>를 가지고, 야율을신은 즉시 선동적인 상소문을 써서 요도종에게 올린다. 그리고, <<회고>>라는 시는 실제로 "조유일(趙惟一)"이라는 이름을 암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황후가 이 <<십향사>>를 확실히 그녀의 정부를 위하여 쓴 것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사지는 발달했지만, 두뇌는 간단한 요도종의 분노가 폭발한다. 즉시 황후를 불러서 한바탕 때리고는 흰색 비단을 주고 자결하도록 명한다.

 

소관음이 자결한 후, 요도종은 여전히 화를 풀지 못해서, 소관음의 시신을 발가벗긴 후, 갈대자리로 대충 둘둘 말아서 묻어버린다. 나중에 소관음의 손자가 황제가 되고서야 다시 소관음의 시신을 파내서 "선덕황후"의 명호로 요도종과 한 곳에 합장해준다. 이후 후금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병사들이 요나라 경성을 함락시킨다. 그 때 다시 소관음의 시신은 파내어져서 몸에 걸친 금은보석은 모조리 걷어가고, 우마에 짓밟힌다...

 

두가지 주장 한가지 수수께끼

 

이 역사의 수수께끼사건은 역대이래로 여러 설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완전히 야율을신의 음모라고 보아, 소관음은 억울하다고 본다; 또 어떤 사람은 소관음은 확실히 영관 조유일과 정을 통했고, 다만 불행히 정치투쟁의 희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거란은 비록 이미 한화된 민족이었지만, 도덕관념에서는 특히 남녀교류방면에서는 중원왕조처럼 그다지 단속이 심하지 않았다. 소관음과 같이 공공연히 남자 영관을 침궁에 불러서 연주를 했다는 것만 보아도, 중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도덕적인 구속이 그다지 없는 상황하에서 총애를 잃은 황후가 재능이 뛰어난 영관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단지 이런 사정이 발생했다고 치더라도, 거란의 습속으로 봐서는, 소관음을 죽일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는 운이 너무 나빴다. 야율을신과 같은 '말잘하는' 정치적 적수가 있었던 것이 문제이고, 요도종과 같이 박정한 남편을 만난 게 탈이다.

 

그녀가 죽은 후 여시인의 영혼은 편안히 쉬지를 못하였다. 이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로 인하여 생긴 이 궁중수수께끼사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알기가 더욱 어렵게 되었다. 그저 후세인들이 약간의 단서를 가지고 각자 판단하여야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