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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역사상 진실한 송강(宋江)의 난

by 중은우시 2008. 12. 29.

글: 새풍(塞風)

 

북송 선화원년(1119년)에서 3년(1121년)까지 송강은 무리를 모아 양산박(梁山泊, 梁山濼이라고도 함, 지금의 산동성 양산, 운성의 중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관청에 반항하고, 관군의 진압작전에 항거한다.

 

북송말기에 조정은 부패하고, 대외적으로 돈을 주면서 평화를 구걸하면서, 대내적으로는 대거 긁어모았다. 농민들은 갖가지 부세의 착취를 당해서,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유랑하고 있었다. 선화원년, 송강등 36명은 양산박을 점거하고, 의군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무리를 끌어모아서 하삭(河朔, 지금의 황하하류 남북일대), 경동동로(京東東路, 청주, 지금의 산동성 익도)를 공격하고, 다시 돌아서 청(靑), 제(齊, 지금의 산동성 제남)를 돌아 복주(州, 산동성 견성의 북쪽)에 이르기까지 10여개의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탐관오리를 혼내주고, 부자를 죽이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여, 세력이 날로 커졌다. 십이월 초이틀, 송휘종 조길(趙佶)은 이 소식을 듣고 지박주(知州) 후몽(侯蒙)의 '사면하여 투항을 받아들이자'는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어지를 내려 투항을 권하나, 성과를 얻지 못한다. 그리하여 지흡주(知歙州) 증효온(曾孝蘊)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게 한다. 송강은 그의 날카로움을 피해, 청주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여 기주(沂州, 지금의 산동성 임기)로 가서, 관군과 1년여를 대치한다. 3년 2월, 회양(淮陽, 지금의 강소성 수녕서북 고비진 동쪽)을 공성하여 취하고, 이어서 술양(陽, 지금의 강소성에 속함)에서 배를 타고 해주(海州, 지금의 강소성 연운항 서남의 해주진)에 도착한다. 지주(知州) 장숙야(張叔夜)가 사신을 보내어 의군의 방향을 탐지하고, 송강이 단지 십여척의 거주(鋸舟)를 몰고 해변가로 향하는 것을 알고, 결사대 천여명을 모집하여 부근 성에 매복시키고, 병력을 바다로 보내어 전투를 유도한다. 오월, 송강은 무리를 이끌고 상륙했다가 매복에 당하여, 선박이 불태워지고, 퇴로가 차단되어,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로 잡힌다. 반란은 이렇게 하여 진압된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송나라 휘종 선화연간에 확실히 송강이라는 자와 그가 이끄는 양산박의거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수호전>>에 쓴 것처럼 108장수는 아니고, 그렇게 생동감있는 희극적인 장면도 없다.

 

송강의 난의 도화선은 송나라조정이 재정곤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체 양산박 팔백리수역의 전부를 '공유'로 정하고, 백성들이 호수에 들어가서 물고기를 잡거나, 연밥을 뜯거나, 풀을 베려면 모두 선박의 대소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다. 만일 이를 어기는 자는 도적죄로 처벌했다. 가난한 농민과 어민은 이런 무거운 세금을 낼 방법이 없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불만을 품어왔다가 화산처럼 폭발한 것이다. 그들은 송강등의 지휘하에, 리스크를 안고 무장의거를 선택한다. 그리고 양산박이라는 지키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지형을 선택하여 진압하러 오는 관군을 막는다. 선화원년(1119년)이 되어, 이 농민반란군은 정식으로 의거를 선포한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송강의 난에는 서른여섯명의 주요두령이 있다. 그들은 송강, 조개(晁蓋), 오용(吳用), 노준의(盧俊義), 관승(關勝), 사진(史進), 시진(柴進), 완소이(阮小二), 완소오(阮小五), 완소칠(阮小七), 유당(劉唐), 장청(張靑), 연청(燕靑), 손립(孫立), 장순(張順), 장횡(張橫), 호연작(呼延灼), 이준(李俊), 화영(花榮), 진명(秦明), 이규(李逵), 뇌횡(雷橫), 대종(戴宗), 색초(索超), 양지(楊志), 양웅(楊雄), 동평(董平), 해진(解珍), 해보(解寶), 주동(朱仝), 목횡(穆橫, 수호전의 穆弘), 석수(石秀), 서녕(徐寧), 이영(李英, 수호지의 李應), 화화상(花和尙, 삼국지에는 이름이 魯達, 魯智深이다), 무송(武松). 송강반란군의 총수는 사서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아 통계를 낼 수 없다. 개략 만명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수호전>>에는 양산호한이 108장이라고 하였는게, 그것은 소설가의 허구이다. 작자 시내암, 나관중등은 "책으로 만들기 위하여 36천강에 지살 72명을 추가시켰다" 그리하여 소설이 더욱 전기적인 색채가 나도록 하여 백성들의 기호에 영합했고, 얘기거리가 되고 전해지기 좋도록 하였다. 다만 소설은 어쨌든 소설이다. 독자는 그것을 진실한 역사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송강반란군이 정식으로 반란을 선포한지 얼마되지 않아, 양산박을 떠난다. 그리고는 산동의 청, 제와 하남, 하북일대를 전전한다. 사서기록에 따르면, 이 반란군은 "하삭, 동경응 횡행하였으며, 관병 수만이 감히 그들을 상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약 2년후인 선화3년(1121년) 이월, 송강의 반란군은 강소 술양에서 배를 타고, 해주(연운항)으로 진공한다. 그러다 해주지주 장숙야가 파견한 매복에 포위되어 손실이 심각해지고, 퇴로도 차단된다. 앞뒤가 모두 막힌 상황하에서, 송강은 어쩔 수 없이 무리를 이끌고 투항하고, 조정의 초안(招安)을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송나라 관군의 일원이 된다. 나중에 송강의 부대가 강남으로 방랍(方臘)의 난을 진압하러 갔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사학계에도 이견이 있다. 지금까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다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송강이 방랍을 정벌하는데 참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송나라는 중국역사상 농민반란이 가장 많이 일어난 왕조이다. 송나라 삼백여년동안 농민반란으로 크고 작은 것이 수백회나 된다. 송강의 난은 그중 규모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작은 것에 속한다. 그러나, 남송때 편찬하여 인쇄된 <<선화유사(宣和遺事)>>에 송강의 난을 소설화, 이야기화해놓는다; 그후 명나라초기에 다시 <<수호전>>이 나타나서, 송강의 난을 더욱 생동감있고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규모나 영향력이 모두 작았던 농민반란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