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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영화 <<메이란팡(梅蘭芳)>>에서 생략되고 왜곡된 부분

by 중은우시 2009. 4. 14.

글: 뇌이(雷)

 

1930년 8월, 한 저명한 학자가 미국 하버드에서 강의를 하고 귀국했다. 그는 후스(胡適)를 만났을 때 미국사람들은 세 명의 중국인을 알고 있는데, 바로 장제스(蔣介石), 송즈원(宋子文), 후스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후스는 웃으면서, "또 한 명 있다. 메이란팡."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메이란팡이 미국인들이 알고 있는 또 한명의 중국인이 된 이유는 바로 그가 그해 2월초에서 6월말까지 미국에서 순회연출을 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이 처음으로 중국의 당시 '국극(國劇)'이라고 불리우던 '경극(京劇)'을 접하였고,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메이란팡의 미국행은 미중교류사상의 중요한 사건이다. 더더구나 당시 중국에서는 모든 사람이 주목하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30년후 메이란팡 본인의 회고록인 <<무대생활사십년>>에서 이 부분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갔고, 얼마전에 만들어진 영화 <<메이란팡>>에서도 이 부분은 슬쩍 언급하고 지나갔다.

 

메이란팡의 방미공연의 구체적인 업무는 그의 '지낭(智囊)'이자 '희대자(戱袋子, 극작가)'인 치루산(齊如山)이었다. 그의 공로는 적다고 할 수 없다. 더더구나 쉽지 않은 일은 치루산은 역사에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귀국한 후에는 <<매란방유미기(梅蘭芳遊美記)>>를 써서 이번 미국행의 모든 사항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어떻게 이번 미국행이 이루어지게 되었는지부터, 어떻게 연출경비를 마련하였고, 어떻게 미국측 브로커를 찾았고, 연출이 얼마나 성황이었으며, 미국정계 학계등 각계와 희극전문가들로부터 일반관중의 반응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을 적었다.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무대를 비교하고, 타고다닌 배는 물론, 투숙한 호텔 및 방에 욕실이 있었는지, 헐리우드에서 참관한 회사의 이름, 심지어 출국전에 미국에 가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서양음식점에 가서 연습한 인원의 명단까지도 모두 적혀 있다. 문화, 사회, 정치, 경제사의 사료가치가 풍부하다.

 

미국으로 가서 경극을 공연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사람들이 전혀 생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이것을 제안한 사람은 여러해전의 미국주중국공사인 Paul Reinsch(중국명 芮恩施)였다. 그는 북양정부의 총통인 쉬스창(徐世昌)에게 제안했었다. 그는 메이란팡의 <<분월(奔月)>>을 본 바 있으므로, 그가 사임하고 귀국하게 되지 쉬스창이 마련한 송별연회에서 "만일 중미국민의 감정이 더욱 친근해지려면 가장 좋은 것은 메이란팡을 미국에 한번 보내어 그의 예술을 공연함으로써,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 말을 그저 농담으로 들었다. 그러자, Reinsch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 말은 절대 아무 근거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은 예술을 감상하기를 즐기는데 국경과 민족의 장애가 없다. 그러므로 예술은 양국의 우의를 다지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전에 미국과 이탈리아의 양국인민은 서로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탈리아의 한 예술가가 미국으로 와서 공연을 했는데, 전미국인사들의 동정을 사고, 이후 양국국민의 감정은 많이 우호적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술로 감정을 다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물며 미국중국의 국민감정은 원래 괜찮았으므로, 다시 예술을 가지고 자주 소통하면 반드시 우호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Reinsch는 일찌기 미국의 위스콘신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를 지낸 바 있다. 1913년에 미국의 주중국공사가 되었다. 1919년에는 파리평화회담의 결과가 전해졌는데, 그는 열강들이 중국을 팔아먹었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국대통령 윌슨이 친구인 중국을 팔아먹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로 여러번 망설인 끝에 윌슨과 절교하고 사임해버렸다. 이로써 볼 때 그가 메이란팡에게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미국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우의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미국에서 연락하고 적극적으로 이 일을 추진해준 사람은 쫓겨난 연경대학 총장이자, 나중에 미국의 주중국대사가 되는 John Leighton Stuart(중국명 司徒雷登)이다. 확실히 이때 그들은 이미 soft power의 거대한 역량을 알았다. 그리고 근대이래의 교류는 거의 유럽과 미국의 문화가 중국으로 일방적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적극적으로 메이란팡에게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하도록 한 것은 미국에서 중국문화 중국인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문화교류의 불평등은 당연히 한두번의 공연으로 뒤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인으로서 그들은 중국문화를 미국에 수출하도록 하기 위하여 고심을 했었다는 것은 살펴볼 수 있다.

 

다만, 메이란팡의 극단은 사영극단이었다. 방미공연은 완전한 민간행위이므로, 미국공연계와 연락하는데에는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이 제안이 나온 때로부터 성사되기까지 근 10년이 걸렸다.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경비문제였다. Stuart와 신해혁명의 공신이며 국민당원로이면서 1927년에 "4.12"사변을 일으킨 리스쩡(李石曾)이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메이란팡을 위하여 자금을 모았다. 자금모집에는 그의 공로가 컸다. 미국의 초청기관은 여러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26년에 설립된 "화미협진사(華美協進社)"가 초청장을 보내는 것으로 되었다. "화미협진사"는 후스, 장보링(張伯), 메이이치(梅貽琦)와 대명이 자자한 미국의 실용주의철학자 존 듀이(John Dewey)등 중국과 미국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기하여 만든 것이었다. 이는 미중문화교류를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든 비영리성 단체였다. 설립후 첫번째로 한 큰 일이 바로 메이란팡을 초청하는 것이었다. 메이란팡의 방미에 대하여 후스는 적극 지원했다. 메이란팡은 여러번 상해에 거주하는 후스와 연락을 했을 뿐아니라, 여러번 상해로 가서 방문한 바 있다. 그리고 후스에게 미국의 풍토, 관중의 기호와 감상습관, 미국의 극장상황등을 물어보았다. 후스는 그에게 상세하게 소개해주었고, 전체방문의 공연전략부터 공연프로그램의 안배, 역할의 분배에 이르기까지 후스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했다. 후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그(메이란팡)는 매일 저녁 힘있게 두 편을 불러서, 우리 몇 사람이 듣게 해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택하게 했다. 그때 한꺼번에 여러 날을 들었다. 메이란팡은 화장을 지운 후에는 아주 겸손했고, 사랑스러웠다." 후스는 영문으로 선전글인 <<메이란팡과 중국희극>>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이것은 어네스트 K. 무디라는 사람이 편찬한 <<메란방태평양연안공연>>이라는 영문전집에 실렸다. 미국에 있는 동안, 후스의 스승인 듀이는 연회를 열어서 메이란팡을 접대했고, 듀이의 미국학계, 문화계에서의 영향으로 큰 반향이 일었다. 그리하여 메이란팡은 귀국한 후에, 여러번 후스에게 깊은 감사를 표시했다. 미국에서 극장을 연락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매당(梅黨)"은 국장에 대하여 아주 엄격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극장주인은 반드시 "아주 예의바르게 메이란팡을 대우해주어야 한다" "반드시 메이란팡에게 자유롭게 공연을 그만둘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극장의 등급도 높아야 하고, 극장이 너무 커서도 안된다고 했다. 이는 좌석을 다 채우지 못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Stuart가 적극적으로 연결해주어서 마침내 적합한 극장을 찾아냈다.

 

미국공연을 일구어낸 이들 인물들, Reinsch, Stuart, 리스쩡, 후스 및 Dewey는 수십년후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인물이 된다; 그리고 "미제국주의"는 "가장 흉악한 적"이 된다. 새로 건립된 사회구조에서, 메이란팡은 살아남아야 했고, 정치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한다. 1955년 제9,10호 합본인 <<문예보>>에서 메이란팡은 후스의 글을 "위선적인 가면과 악독한 진면목"으로 비판한다. 글은 아주 짧았다. 그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는 내용이다. 이는 그가 이미 '정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1961년 8월 8일, 메이란팡은 서거한다. 11일의 <<인민일보>>에는 신화사에서 밢한 "매란방동지소전"이 실리게 된다. 여기에는 그저 1949년에 4번 출국했다; 1952년에 비엔나에서 세계인민평화대회에 참가했다; 1953년 북한에 위문공연을 갔다; 1956년에 중국의 방일경극대표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공연했다; 1957년 중국노동인민대표단의 소련10월혁명40주년경축행사에 참가했다는 내용을 적었을 뿐이다. 그의 1949년 방일, 방미, 방소의 3차에 걸친 그의 예술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해외공연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있다. 이외에 수십년동안 치루산은 메이란팡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그러나, 메이란팡은 나중에 <<무대생활사십년>>에서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치루산이 1948년에 대만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당시는 특수한 사회이다. 대만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극악무도한 죄악이었다.

 

다시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들 사람들과 사건은 모두 점차 민감함을 잃고 무디어갔다. '요마화(妖魔化)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다만, 영화 <<메이란팡>>은 여전히 이에 대하여 회피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치루산을 원형으로 한 추루바이(邱如白)에게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여러가지 부정적인 요소를 덧붙임으로써 이미지를 많이 왜곡시켰다. 이것은 아마도 희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마도 치루산이 대만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더더구나 이렇게 대담하게 왜곡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생략과 왜곡은 <<메이란팡>>을 만든 생산자(투자자, 프로덕션, 극본, 감독)의 심리상태와 심경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어쨌든 유감스럽다. 심리상태와 심경이 다르면, 같은 감독이 유사한 주제를 가지고 만들더라도 수준이 전혀 다르게 된다. 심지어 완전히 딴 사람같다. 마찬가지로 천카이거(陳凱歌)가 감독한 마찬가지의 "배우의 인생"이지만, <<메이란팡>>과 <<패왕별희>>간의 차이는 숫자로 표시할 수 없을 정도이다. 예술적인 재능이 넘치는 천카이거가 아주 좋은 소재인 "매이란팡"을 이렇게 낭비한 것에 깊은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리상태는 당연히 '생산자'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힘들다. 기본적인 '생산환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산자'들은 아주 조심스러워 하고, 창조력이 제한을 받는 '생산환경'하에서, 문예가 고도로 번성할 수 있을까? 세계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soft power'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일찌감치 말한 바 있다. 에술의 번성을 위하여는 느슨한 제도환경이 돈보다 훨신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