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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경제/중국의 영화

이소룡의 최후 24시간

by 중은우시 2008. 12. 10.

 

이소룡(브루스 리)과 정패(딩페이) 

 

글: 방유(方兪)

 

이소룡은 도대체 어떻게 죽었는가? 무슨 원인으로 이소룡은 하룻밤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응급구조할 기회조차 없었을까?

 

이들 의문은 아마도 삼십여년동안 전세계의 이소룡팬과 영화팬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문제일 것이다. 이소룡의 사인에 대하여, 서로 다른 버전의 주장이 유행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병사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급사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누군가의 음모에 따라 모살당한 것이라고 했다. 여러 설이 난무하여, 정설이 없다. 당시에 공식적으로는 이소룡의 사인을 어떻게 판단했던가?

 

이소룡은 중천에 뜬 태양과도 같은 쿵후 스타였다. 그의 죽음은 관련되는 범위가 넓을 뿐아니라, 사인에도 확실히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여론의 강한 압력하에, 홍콩당국은 특별히 사인심리법정을 조직했고, 이소룡의 죽음에 대하여 조사 및 증거확보를 진행했다. 조사의 엄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법정은 모두 10명의 증인을 출석시켜 증언하게 했다. 이들은 순서대로 이소룡의 형인 이충침(李忠琛), 가화 장문인 추문회(鄒文懷), 여자스타 정패(丁佩), 이소룡을 처음 진단한 개인의사 주박회(朱博懷), 고급구호원 팽덕생(彭德生), 엘리자베스병원 응급실 의사 증광조(曾廣照), 엘리자베스병원 긴급구조팀 의사 정보지(鄭寶志), 법의경찰 섭지붕(葉志鵬), 형사 유수(劉樹), 군장경찰 백문리(柏文利).

 

증언에서, 이소룡의 형인 이충심은 동생이 대마초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두 사람이 한달 전에 만났을 때는 이소룡의 정신이 정상이었고, 신체에도 특별히 이상한 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점은 추문회에 의하여도 확인되었다. 추문회는 이소룡이 죽기 전에, 두 사람은 거의 매일 만났는데, 이소룡이 촬영세부사항과 극본을 토론할 때 아주 몰입했으며, 가정에 분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이충침과 추문회의 증언은 이소룡이 자살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

 

사건의 또 다른 핵심인물은 정패이다. 당시 정패의 정서는 서서히 안정되고 있었다. 그리고 상세하게 이소룡의 처인 연달(蓮達)의 변호사 나덕승(羅德丞)으로부터 "1973년 7월 20일 이소룡에게 정패의 집에서 발생한 일체의 일"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다. 만일 그녀의 말과 추문회의 말을 서로 대조하고, 다시 이충침, 연달의 증언과 다른 단서를 종합해본다면 우리는 대체로 이소룡은 1973년 7월 20일 이 날 하루의 활동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오후1시, 연달은 쇼핑하러 외출한다. 이소룡과 헤어진다. 이소룡은 그가 추문회와 약속이 있다고 말한다. 약속내용은 함께 <<사망유희>>의 극본을 토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고, 처에게 아마도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먹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소룡은 처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극본을 토론할 때 정패의 집에 간다는 내용을 감추었을 뿐이다.

 

오후2시, 추문회는 이소룡의 집으로 온다. 두 사람은 <<사망유희>>의 극본대강에 대하여 토론하고, 함께 떠난다.

 

오후4시경, 정패의 집에 도착한다. 이번에 만난 주요 내용은 정패가 <<사망유희>>에서 하나의 역을 맡을 것이고, 그리고 저녁에 함께 하이야트호텔의 금전중식당으로 가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명배우인 조지 라신비와 만나서 그의 영화에서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하기로 하였었다.

 

세 사람은 정패의 집에서 두시간동안 <<사망유희>>를 토론한다. 저녁7시를 전후하여, 이소룡은 약간 불편하고, 머리가 아프다고 한다. 정패는 이소룡에게 자기의 개인의사가 처방해준 진통제를 복용하도록 하고, 이소룡은 그녀의 침실로 가서 휴식을 취한다. 이소룡은 추문회에게 먼저 하이야트호텔로 가서 조지 라신비를 만나라고 하고, 자신은 잠깐 쉰 후에 따라가겠다고 말한다. 그후 정패의 침실에 있는 침상에서 잠이 든다.

 

저녁8시, 추문회는 정패의 집을 떠난다. 하이야크호텔에서 조지 라신비를 만난다. 추문회가 나간 후 반시간후 정패는 침실로 간다. 이소룡이 깊이 잠든 것을 보고 그를 깨우지 않고, 전화로 추문회에게 이소룡이 깊이 잠들었으니 좀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저녁9시, 정패는 다시 한번 이소룡을 보러 간다. 그가 아직 깨지 않은 것을 보고, 다시 추문회에게 전화를 건다. 추문회는 이소룡이 약속시간메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시 9시 45분에 정패의 집으로 간다. 이소룡이 아직도 깊이 잠들어있는 것을 보고, 그를 깨워보려고 한다. 이소룡은 반응이 없었다. 추문회는 그가 너무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하고, 이소룡의 몸을 몇번 밀었다. 그리고 얼굴을 몇번 때렸다. 그래도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추문회는 그 모습을 보고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하여 정패에게 그의 개인의사인 주박회에게 전화해서 빨리 오게 하라고 하였다.

 

저녁10시가 막 지나서, 주박회가 정패의 집으로 왔다. 이소룡에 대하여 초보적인 검사를 하였는데, 이소룡이 이미 혼미상태라는 것을 알았다. 아예 깨울 수가 없었고, 심지어 호습, 심장박동, 맥박이 모두 이미 정지되어 있었다. 주박회가 묘사하는데 따르면, 당시의 이소룡은 모습이 편안했고, 전혀 고통스럽거나 애를 쓴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최소한 10분간 이소룡의 지각을 회복시키고자 하였으나, 전혀 효과가 없었다. 이소룡은 완전히 생명을 나타내는 표시가 없어졌다. 그리하여 그는 이소룡을 엘리자베스병원으로 보내자고 건의한다. 혹자는 이소룡은 10시전에 이미 사망했다고 말한다.

 

정패가 이소룡에게 복용하게 한 진통제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 약은 바로 주박회가 정패에게 준 것이었다. 주박회에 따르면, 이 약의 약성은 아스피린보다 강하고, 보통사람이 1알을 먹으면 아무렇지도 않다. 다만 알레르기반응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약이 아마도 불량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즉, 이소룡은 이런 약에 대하여 약물과민이었던 것이다.

 

마두용소방국에서 파견한 43호 구호차는 그날 밤 10시 37분 정패의 집에 도착한다. 고급구호원인 팽덕생은 긴급구조검사를 할 때 이소룡은 이미 호흡과 맥박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이소룡에게 인공호흡과 산소공급을 하며 긴급구호작업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구호차가 병원으로 가는 도중, 팽덕생은 계속하여 이소룡에게 긴급구조를 했지만, 여전히 이소룡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날 밤 11시, 구호차가 엘리자베스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의 당직의사인 증광조는 이소룡에 대하여 재차 응급구조를 시도했다. 이소룡은 여전히 심작박동과 호흡이 없어ㅆ다. 그리고 동공이 확대되어 있었으며, 강한 빛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긴급구호조치팀의 정보지 의사도 확인했다. 그날 밤 11시에 그는 이소룡을 검사했는데, 이소룡은 이미 맥박과 호흡이 멈추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소룡은 이미 사망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이소룡의 신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그는 여전히 아드레날린을 사용하여 이소룡에게 '심장내주사"를 실시했다. 주사후에도 이소룡은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11시반, 엘리자베스병원의 미카 맥 의사는 정식으로 이소룡의 사망진단서에 서명했다.

 

법의관 섭지붕도 이소룡의 시신과 정패의 집에 대한 검사결과를 설명했다: 그가 이소룡의 시신을 검사했을 때, 이소룡의 왼쪽발가락의 한 곳에 수혈한 흔적이 있었고, 왼쪽가습에 심장내주사시 남은 주사구멍이 있었다. 다만, 신체의 다른 부위는 상흔이나 폭력흔적이 없었다. 정패의 집에도 싸운 흔적이나 유독물품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소룡이 모살된 것이 아니라고 인정했다. 섭지붕은 보충하여 말하기를, 이소룡은 영화현장에서 돌연 혼미상태에 빠진 경력이 있는데, 이것이 아마도 이소룡의 급사징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런 진술에 근거하여, 사인심리법정은 이소룡을 "사인불명"으로 잠정결정했다.

 

이 것을 가지고 이소룡의 팬이나 매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조사는 계속 진행되었다. 핵심은 이소룡의 시신검시보고이다.

 

이소룡의 시신은 해부된 후, 간, 신장, 소장, 결장, 혈액 및 위장잔존물의 샘플을 즉시 홍콩현지의 화학검사실로 보내어 졌다. 법의부의 임 의사가 검사를 진행했다. 나머지 샘플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화학검사실로 보내어져 분석했다. 그러나, 제1차검시보고서가 나올 때, 이소룡은 이미 매장되었다. 검시보고서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이소룡의 체내에서 발견된 미량의 대마(大麻)였다. 법의부의 임의사와 부검을 책임진 엘리자베스병원의 병리학자 리스트 의사는 모두, "이정도 양의 대마는 이소룡급사의 주요원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리스트 의사는 또한 이소룡의 머리에는 상흔이 발견되지 않아서, 뇌출혈도 없었다. 뇌혈관에도 막힌 곳이 없다, 신체의 다른 기관도 모두 정상이다라고 하였다. 다만 뇌의 중간이 부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사망 반분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고, 아주 급격히 발생했다. 다만 뇌종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이소룡의 사인은 아마도 진통제과민반응과 관련이 있는 것같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런던대학 법의학교수인 디아로부터도 동의를 받았다. 디아 교수는 "이소룡의 사인은 급성 뇌수종이다. 원인은 진통제의 어떤 성분에 대하여 발생한 민감반응이다. 다만 이것은 그저 추측일 뿐 결론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1973년 9월 24일 오전, 2개월여의 논증을 거쳐, 홍콩법정의 동재광 법관은 이소룡의 사인에 대하여 7가지 해석을 내놓는다:

 

1. 모살: 즉, 악의적이고 불법적인 살인

이소룡이 다른 사람에게 모살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므로 배제한다.

 

2. 오살: 즉, 악의가 없는 불법적인 살인

사자는 확실히 이런 상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므로 배제한다.

 

3. 합법살인:

사자는 급사했다. 이 항목과 무관하다. 그러므로 배제한다.

 

4. 자살

이충침, 추문회, 연달등의 진술을 보면, 이소룡은 죽기 전에 정신이나 행위의 이상현상이 없었다. 자살동기나 경향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도 배제할 수 있다.

 

5. 자연사망

엘리자베스병원의 검시관 리스트 의사는 사자의 시신에 대한 해부와 화학검사를 하고도 자연사망의 병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영국런던대학 디아교수도 리스트 교수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래서 자연사망도 성립되기 어렵다.

 

6. 의외사망 혹은 비명사망

즉 진통제복용으로 인한 과민반응. 이 가능성이 가장 크다.

 

7. 사인불명:

즉, 모든 증거와 진술로 사자의 사인을 알아낼 수 없다. 배심원이 상술한 6가지 가능성중 한 가지를 본안의 판결로 하지 않으면, 사자는 사인불명으로 결정한다.

 

법정은 최종적으로 이소룡의 사인을 "비명횡사"로 결정한다. 이 결정이 나오자, 사람들은 시끄러웠다. 전체 홍콩이 속속 의문을 나타냈다. 정부측의 이 주장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며, 그저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홍콩정부의 이 결론은 불합리하지 않다. 심지어 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최저한으로 낮춘 것이고, 말이 되는 하나의 선택이다. 다만 정부는 각계의 이소룡의 죽음에 대한 관심도를 저평가했다. 혹은 이 결정은 대중의 이소룡의 죽음에 대한 폭발적인 소식의 기대를 저버렸다. 당연히 당국의 입장에 선다면 이소룡의 죽음이 미치는 파급범위가 갈수록 넓어지고, 관련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량의 인력과 물력을 투입하고도 결국 마지막에는 흐지부지 되어 버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