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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원명(元明)교체기: 동실조과(同室操戈), 동근상전(同根相煎) (I)

by 중은우시 2009. 1. 3.

작자: 미상

 

주원장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명나라를 건립했다고들 말한다. 마치 원나라를 주원장이 무너뜨린 것처럼.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시대의 반란군들 중에서, 주원장이 죽인 원나라군대는 가장 적다. 원나라는 비록 명나라에 의하여 대체되었지만, 그들은 주원장의 손에 망한 것은 아니다. 1360년대에는 남북쌍방 모두에게서 일어난 동근상전, 동실조과의 결과였다.

 

1. 원나라군대와는 다른 사람이 싸우고, 주원장은 한인들과만 싸웠다.

 

원나라말기의 농민의거는 1351년 오월의 유복통(劉福通)부터 시작한다(실은 절강의 방국진-方國珍-이 시기적으로 더 빨랐지만, 혼자여서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유복통의 홍건적의 난은 하남 영천에서 일어난다. 의거를 일으킬 때, 천하는 이미 원나라의 통치하에 시름한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줄줄이 깃발을 들고 의거를 일으켰다. 서수휘(徐壽輝)는 호북 나전에서, 지마리(芝麻李)는 강소 서주에서, 장사성(張士誠)은 강소 태주에서, 곽자흥(郭子興)은 안휘 호주에서, 명옥진(明玉珍)은 호북 수주에서....

 

몇년이 지난 후인 1356년, 황하이남은 기본적으로 한인천하가 된다. 유복통은 한림아(韓林兒)를 황제로 세우고 안휘, 강소, 하남, 산동등의 커다란 영토를 차지한다, 그리고 계속 북방과 서북방향으로 진공한다; 서수휘는 무창에서 황제를 칭하고 호북, 호남, 강서등지를 차지한다; 장사성은 소주에서 왕을 칭하고, 강소, 절강등지를 차지한다; 명옥진은 사천, 운남으로 치고 들어가서 황제를 칭한다; 이 네 집단은 황하이남의 원나라세력을 제거한 주력군이었다. 이때 사망한 곽자흥의 무리를 주원장이 계승한다. 그러나, 병력은 겨우 2,3만에 불과했고, 판도도 여전히 안휘중부의 저현, 화주의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

 

주원장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천하는 이미 다 나눠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어느 누구의 수하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 한, 빨리 기회를 붙잡아 기반을 차지해야 했다. 주원장은 이제 약간의 힘을 가졌으므로, 다른 사람의 밑으로 들어가기는 싫었다. 그리고 이 난세에 운세를 한번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난세에 성공하려면 지반(地盤)과 인마(人馬)가 필요하다. 자기가 보유한 지반은 너무 좁았다. 그리고 가난한 곳이어서 제대로 먹고살기도 힘들 정도였다. 이런 가난한 지방에서, 어떻게 해야 인마를 확충할 수 있을까? 그러나, 지반을 확보하자니, 어디로 가서 빼앗아야 한단 말인가? 북으로는 반란군중 가장 세력이 큰 유복통이 중원을 가로질러 확보하고 있어, 원나라군대는 모두 그가 막아내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그가 진출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동쪽으로는 바다쪽인데, 장사성의 지반이었다. 서쪽은 서수휘의 지반이다. 자기의 현재 역량으로는 어느 쪽과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주원장은 그래도 안목이 있었다. 그는 원나라의 세력이 가장 약한 곳이 남방이라고 보았다. 남방은 현재 크고 작은 곳들이 원나라군대에 장악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장사성과 서수휘의 세력중간인 강소중서부에서 절강중서부의 지역이었다. 인구도 많고 물산도 풍부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호거용반(虎距龍盤)의 남경이 있다. 이 땅을 차지한다면 자신의 세력이 졸지에 몇배나 커지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천하를 놓고 다툴만한 자본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원장은 즉시 병사를 일으켜, 채석기에서 장강을 건너, 남경을 함락시킨 후 계속 남진한다. 4년만에, 절강의 금화(金化), 구주(衢州)까지 차지한다.

 

이것이 바로 주원장이 원나라와 싸운 역사의 전부이다. 이후에 그는 바로 남방에서 서수휘(나중의 진우량-陳友諒)와 싸우고, 방국진과 싸우고, 장사성과 싸웠다. 결론적으로 계속 한인들과 싸운 것이다. 다시는 몽골인과 싸우지 않았다. 만일 원나라가 황하이남에 100만의 군대를 두었다고 치면,주원장이 항거하고 소멸시킨 군대는 기껏해야 10분의 1에 불과하다.

 

주원장이 남방에서 지반을 차지하는 몇년동안, 회하이북의 유복통이 이끄는 홍건군세력은 더욱 크게 발전한다. 유복통은 일찌감치 1355년에 한림아를 안휘 호주에서 옹립하여, 송(宋)을 건국하고, 연호를 용봉(龍鳳)이라 한다. 그 후에 그는 중원의 항원세력을 끌어모아, 북방에서 4로로 나누어 원나라를 향하여 진공한다. 그 자신이 중로에 서서, 하남의 전부를 빼앗는다. 그리고 개봉으로 천도한다. 북로는 관선생(關先生)이 이끌고 산서를 통하여 계속 원나라의 대도까지 진격한다. 동로는 모귀(毛貴)를 우두머리로 하여, 산동을 차지한다. 서로는 백불신(白不信), 이희희(李喜喜)를 우두머리로 하여, 계속 섬서 봉상까지 치고들어간다. 일시에 홍건군은 100만대군이라 칭할 정도가 되어 거의 원나라를 뒤집어버릴 정도가 된다.

 

2. 몽고에 기인이 나타나서 북방의 판세가 뒤흔들리다.

 

원래, 유복통의 역량이라면 원나라를 철저히 전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유복통의 전략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그는 병력을 집중하여 북경을 맹공하지 않고, 병력을 넷으로 나누었다. 4방으로 출격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역량을 분산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원나라군대가 각개격파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 다른 측면으로 홍건군이 발전하는 것과 동시에 원나라에도 기인(奇人)이 출현한다. 이 기인은 포의(布衣, 벼슬이 없는 사람) 출신으로 군사에 정통했다. 짧은 10년만에, 그는 자신이 만든 군사역량에 의지하여 북방에서 홍건군에 전면적으로 대항한다. 그리고 마침내 100만홍건군을 물리치고, 위험하게 흔들리기는 하지만 반벽강산을 유지하게 된다.

 

이 기인은 바로 차칸테무르(察罕帖木兒)이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비록 과거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벼슬이 없는 포의였다. 포의이기는 하지만 명성이 있었고, 호연지기를 품었다. 차칸테무르는 젊었을 때부터 기인으로 인정받았다. 과연 시국이 어지러워지자, 차칸테무르는 그의 뛰어난 재주를드러내기 시작한다.

 

"지정11년, 도적이 여(汝), 영(潁)에서 성읍을 불태우고 관리를 죽인다." 지정11년은 바로 1351년이다. 유복통이 하남 영천에서 의거를 일으킨 해이다. "몇개월도 되지 않아, 강회(江淮)는 모두 함락된다. 조정은 병사를 모집하여 토벌하려 하는데, 성공하지 못한다" 원나라군대의 토벌은 모조리 실패한 가운데, 1352년, "차칸테무르는 분연히 의병을 모은다. 심구의 자제로 따르는 자가 수백명이었다. 신양의 나산인 이사제(李思齊)와 합병하여,함께 기이한 계책으로 나산을 습격하여 격파한다. 이 소식을 듣고, 조정은 차칸테무르에게 중순대부, 여녕부 다루가치의 직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곳의 의병이 몰려드니, 만명에 이른다. 그리하여 한 부대를 이루고, 심구에 주둔한다. 여러번 도적과 싸워서 승리했다." 이것은 차칸테무르가 처음 역사에 이름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솜씨는 비범했다.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자신의 전공으로 관직을 획득해나간다.

 

1356년, 하남에서 반란군과 수년간 싸우던 차칸테무르는 자기의 전공으로 관직이 이미 중서병부상서에 이르렀다. 이 해에 백불신, 이희희가 이끄는 의군은 섬서, 산서로 대거 진공했고, 장안성을 함락시켰다. 차칸테무르는 이사제와 함께 명을 받고 섬서를 수복하러 간다. 1년의 전투끝에, 거의 이 반란군을 전멸시키고, 섬서, 산서의 실지를 회복한다. 이희희가 이끄는 잔당은 사천으로 도망친다. "조정은 그가 관섬을 회복한 대공을 치하하여 자선대부, 섬서행성좌승을 수여한다"

 

이후 몇년간, 차칸테무르는 계속 북방에서 유복통의 부대와 전투를 벌인다. 그의 병력이 닿는 곳에는 섬서, 영하, 산서에서 하북, 하남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전백승의 기적을 이루어낸다. 마침내 1359년, 차칸테무르는 유복통의 수도 하남 개봉을 함락시킨다. 유복통은 겨우 한림아와 수천의 인마를 이끌고 남으로 도망친다(나중에 장사성의 부대에 피살당한다). 1361년, 차칸테무르는 다시 군대를 몰고 동쪽으로 간다. 북, 중,남의 삼로로 산동에 진입하여 동창을 함락시키고, 제녕을 차지하고, 제남을 격파한다. 파죽지세로 동해에 이른다. 짧은 1년만에 익도(산동성 치박시)의 고성(孤城)을 제외한 나머지 산동의 전체 지역을 수복한다.

 

이렇게 하여, 백만 홍건군은 기본적으로 모두 섬멸당한다. 섬서에서 산동을 잇는 선의 이북의 중국북부지방은 다시 원나라의 수중에 들어간다. 차칸테무르는 "승리를 바침으로써 명성이 천하에 진동한다" 그는 원나라를 구원할 구세영웅으로 인정받았고, 즉시 중서평장정사(부재상)의 직위에 오른다.

 

일개 포의가 짧은 10년만에, 100만이라고 말하는 농민반란군을 무찌르고, 부재상의 직위에 올랐다. 정말 역사상 불세출의 기인이다. 이제는 산동을 다 평정하고나서 그 다음에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남방을 평정하는 일만 남았다.

 

차칸테무르의 웅재대략과 이전의 전적을 보면,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남방을 수복하고 원나라의 통치를 회복하는 것은 문제없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역사는 자주 의외의 일이 벌어진다. 관건적인 순간에 의외의 사건은 종종 역사를 바꾸어 버린다.

 

3. 북방에 의외사건이 일어나 기인이 돌연 사망한다.

 

차칸테무르의 휘황한 전적은 주원장을 놀라게 하였다. 주원장은 비록 지금까지 전적이 괜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진우량과 장사성의 사이에 끼어 있었다. 그리고, 홍건군이 궤멸한 후, 주원장의 안휘의 영지는 직접 차칸테무르의 위협에 처하게 된다. 만일 차칸테무르의 군대가 남하했다면, 먼저 부닥치는 것은 바로 주원장이었을 것이다. 주원장의 당시 실력이나 남방이 사분오열된 국면을 보자면, 절대로 차칸테무르에 항거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주원장은 한편으로는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는 것에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만약을 위하여 물러날 길을 마련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사신을 차칸테무르에게 보내어 그와 우호관계를 건립하고자 한다. 오래지 않아, 차칸테무르가 회신을 보내왔다: 이미 조정에 보고했으며, 성장 자리 하나를 너에게 마련해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볼 때, 홍건군이 궤멸되고 차칸테무르가 신화와도 같은 전적을 보임에 따라, 주원장의 반원의지도 동요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차칸테무르가 정말 병사를 이끌고 남하했더라면,주원장은 분명히 장사성처럼 원나라에 투항했을 것이다. 성장정도 자리를 하나 받아서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만일 원나라가 준다면).

 

행운인 것은, 두 가지 의외의 사건이 주원장을 도와주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최종적으로 황제가 될 수 있었고, 명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하나는 원나라군대내부의 충돌이다. 1356-1358년 사이에, 차칸테무르가 섬서일대에서 홍건군과 전투를 벌일 때, 하남일대에서 유복통과 전투를 벌인 것은 원나라의 또 한 명의 다스바투루(答失八都魯)라는 사람이 있었다. 다스바투루는 원나라 귀족출신으로, 만호를 세습했다. 그는 하남에서 유복통과 전투를 벌였는데, 전적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나중에 유복통이 반간계를 사용하여, 조정은 다스바투루에 의심을 품게 된다. 다스바투루는 이로 인하여 두려움으로 죽게 된다. 다스바투루가 죽은 후, 그가 이끌던 군대는 그의 아들인 볼로드 테무르(博羅帖木兒)가 지휘하게 된다. 조정은 이 군대에 대하여 이미 신임을 잃었고, 그 당시에 홍건군의 관선생이 이끌던 부대가 이미 원나라의 상도에 이르러, 직접적으로 몽골인의 본거지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원나라는 급히 볼로드 테무르에게 상도로 이동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하남은 차칸테무르에게 넘겨주도록 한다.

 

볼로드 테무르는 용장이었다. 상도에서 금방 홍건군(백만홍건군은 이 일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기본적으로 차칸테무르가 소멸시켰다)을 물리친다. 그 후에 산서, 하북의 북부 및 지금의 내몽고 일대에 주둔한다. 볼로드 테무르는 귀족출신일 뿐아니라, 차칸테무르와 같은 평민출신은 기본적으로 눈에 두지 않았다. 이렇게 미천한 출신의 자가 짧은 수년간에 자기와 비슷한 지위에 올랐다는데 대하여 마음 속으로 질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부대는 원래 중원에 있었는데, 추운 곳으로 이동되고, 차칸테무르라는 자가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여 불세의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실력과 지위가 자신을 넘어서게 되자, 마음 속으로 더욱 불만이 컸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볼로드 테무르는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도 생각지 않고, 병사를 몰아 차칸테무르의 군대를 향하여 진공한다. 차칸테무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쌍방의 군대는 산서, 하북에서 계속 마찰을 일으켰다. 이런 마찰은 차칸테무르가 살아있을 때는 그다지 심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중에 몰골인들이 동실조과(同室操戈)하는 화근을 심는다.

 

또 하나의 치명적인 사건은 바로 차칸테무르의 급사이다.

 

원래, 차칸테무르가 산동 동평으로 진공할 때, 동평의 수장은 원래 홍건군에 투항한 이전 원나라군대의 전풍과 왕사성이었다. 이 두 사람은 차칸테무르의 대군이 오자 다시 원나라군에 투항한다. 나중에 차칸테무르가 산동을 평정하고, 익도라는 고성만을 남기고 있자, 이 두 사람은 돌연 반란을 일으킬 마음을 가진다. 그들은 차칸테무르가 자신들을 신임하는 기회를 틈타, 함정을 파서,차칸테무르에게 시찰을 가자고 한다. 부하가 권하는 것이므로, 차칸테무르는 전혀 의심하지 않고 십일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간다. 결과는 그 두명에게 피살당한다. 이때가 1362년 육월이었다.

 

차칸테무르의 죽음은 몽골민족에게는 일대 불행이었다. 그러나, 한민족에게는 절대 행운이다. 더더구나 주원장에게는 절대행운이었다. 주원장은 차칸테무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부지불식간에 크게 소리쳤다: "천하에 이제 더이상 사람이 없도다(天下無人矣)". 이는 차칸테무르와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이렇게 죽어간데 대한 애석함을 표시한 것과 동시에,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을 막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을 표시한 것이다. 이 짧은 다섯 글자에서 주원장이 얼마나 차칸테무르를 중시하고 탄복하고 무서워하였는지의 여러가지 심정을 알아볼 수 있다.

 

차칸테무르는 원나라말기에 원나라를 구원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가 죽자, 원나라의 멸망은 이제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