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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삼희당(三希堂) 서첩(書帖)의 행방

by 중은우시 2009. 3. 27.

글: 가운봉(賈雲峰)

 

삼희당(三希堂)은 북경 고궁의 양심전내에 있다. 6평방미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서난방(西暖房)이 한때 풍류황제 건륭제의 "예술보고(藝術寶庫)"였다. 건륭제는 역대 서예, 회화 대가의 진품들을 이곳에 수장하였다. 그중에도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은 특히 건륭제가 좋아했다. 그래서 건륭제는 서난방에 "삼희당"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사실 역사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이 <<쾌설시청첩>>은 왕희지의 진적(眞迹)은 아니다. 임모(臨摹)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다가 건륭제가 아주 존경하던 원나라때의 저명한 서화가 조맹부의 발제문이 있어서 진귀한 보배로 받들어졌다. 겨우 28글자밖에 되지 않아서, "이십팔여주(二十八驪珠)"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대문인들이 숭배하던 서성(書聖)의 성물(聖物)인 것이다.

 

1924년 11월 5일, 국민당의 군벌 풍옥상(馮玉祥) 등은 마지막황제 부의(溥儀)를 찾아가서 3시간내에 사람들을 데리고 고궁을 떠나라고 명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탄을 장전한 군인들이 조치하겠다고 협박했다.

 

마지막황제 부의는 탄식을 내뱉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재물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고궁안의 수많은 금은보화들은 부의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맨먼저 한 일은 심복을 "삼희당"으로 보내어 <<쾌설시청첩>>을 훔쳐오게 해서 다른 짐들에 섞어서 가져나가고자 한다.

 

부의는 잘 알고 있었다. 이 첩은 엄청난 금은주보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나중에 길거리에 나앉아 살아가기 힘들게 되었을 때, 돈으로 바꾼다면, 그저 풍족하게 먹고사는 것만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첩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부의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부의 한 사람만 이 첩을 가지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더더구나 아무도 부의가 고궁의 보물을 훔쳐내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의가 가족들을 데리고 고궁에서 나갈 때, 성문을 지키는 수위들은 전혀 체면을 고려하지 않고 짐을 수색했으며, 이 보첩을 훔쳐낸 일은 들통나게 된다.

 

<<쾌설시청첩>>이 재난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청실선후위원회(淸室善後委員會)"가 금고에 넣어 잠근 다음에 동교민항에 집을 찾아서 보관하고 사병을 보내어 밤낮으로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궁재산을 정리조사하던 사람은 <<쾌설시청첩>>과 함께 있던 다른 두 개의 첩, 즉 <<중추첩>>과 <<백원첩>>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어디로 갔는가?

 

1928년 6월 3일, 군벌 장작림(張作霖)은 사람을 고궁박물원 초대원장인 이배기(易培基)에게 보내어 <<쾌설시청첩>>을 내놓으라고 한다. 이배기는 금고는 열쇠 3개가 있어야 열 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풍옥상의 손에 들어있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6월 4일 새벽, 장작림은 일본군에 의하여 심양 황고둔에서 폭사한다. <<쾌설시청첩>>은 이리하여 또 한번의 겁난을 피하게 된다.

 

1932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 동북이 함락된다. 일본군은 북경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연합군이 원명원을 약탈한 참극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고궁박물원은 고궁의 문화재를 비밀리에 이전시킨다. 그리고 진품들을 골라서 상자에 넣어 포장한다.

 

1933년 1월 3일, 일본군이 산해관을 함락시키고 북경을 향하여 진군한다. 1월 31일, 제1차 국보 총2118상자를 옮기고자 하나, 여러가지 장애로 자금성 바깥으로 옮기지 못한다. 2월 5일, 국민정부 행정원 원장인 송자문의 명령하에 제1차국보는 북경을 떠나 상해로 운반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국보장정"의 길은 시작된다. <<쾌설시청첩>>은 바로 이때 옮겨진 국보에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국보를 남경까지 운송했을 때, 통지가 날아온다. 상해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해도 안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낙양이나 서안으로 옮기려고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다. 국보를 운송하던 사람은 할 수 없이 국보와 함께 남경에 머물렀다.

 

3월중순이 되어, 다시 송자문의 명령이 내려온다. 문화재, 도서는 상해로 운송하고, 문헌자료는 남경에 남겨두라는 것이다. 이후 3개월간, <<쾌설시청첩>>과 18,000여상자의 고궁국보는 차례로 상해 프랑스조계지역내의 한 천주교회로 옮겨지고, 여기서 4년을 머문다.

 

1937년 1월 1일, 고궁박물원 남경분원이 설립되자, 다시 차례로 남경으로 옮겨져서 보관하게 된다.

 

1937년 봄, 수장대가인 장백구(張伯駒)는 우연한 기회에 원세개의 장방(회계)선생을 지냈던 곽세오(郭世五)의 집에서 10여년간 유실되었던 <<중추첩>>과 <<백원첩>>을 구경하게 된다.

 

원래 청나라황실이 도망칠 때, 이 두 개의 첩은 부의의 노태비인 경의(敬懿)가 출궁할 때, 가지고 나와서 친정으로 가지고 갔다. 그리고 싼값에 팔아버린 것이다. 흘러다니다가 마침 곽세오의 눈에 띄어 비싼 값에 사들여서 보관하고 있던 참이었다.

 

장방선생은 돈을 좋아했다. 장백구는 이를 잘 알았다. 곽세오가 아무리 스스로 얼마나 애국하고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를 떠들어도 그의 본질은 돈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다.

 

여러번의 협상을 거쳐, 장백구는 20만대양을 주고 <<중추첩>>, <<백원첩>>을 및 다른 몇 개의 명가의 절세도첩을 사들인다. 착수금으로 6만을 주고, 나머지는 분할하여 지급하였으며 1년만에 변제를 완료했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7.7사변이 일어나고, 국내금융이 봉쇄되어, 부호인 장백구의 은행구좌가 동결되는 사태가 벌어진다. 위기국면에 장백구는 부득이 집안식구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난을 피해야 했다. 신용을 중시하던 장백구는 부득이 <<중추첩>>과 <,백원첩>>을 곽세오에게 돌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이르러 두 첩은 곽씨집안의 전가지보가 된다. 곽씨가 팔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국보를 사들일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1938년 8월 중순, 상해가 함락되고, 일본군이 남경의 국민정부를 핍박한다. 14일부터, <<쾌설시청첩>>과 다시한번 고르고 고른 16,618개의 국보상자는 차례대로 장강을 통해 한구(漢口)로 옮긴다. 마지막 국보상자를 순조롭게 운반한 직후, 일본군은 잔혹한 방식으로 남경을 도살한다. <<쾌설시청첩>>은 다시 한번 겁난을 벗어난 것이다.

 

이후 제1차 국보상자는 일본군의 포화속에 힘들게 옮겨다녔다. 한구, 무창, 장사, 계림, 귀양...서남지역을 거의 다 돌아다녔다. 국보호송대가 지나간 후에 일본군의 폭격이 뒤따르는 일이 잦았다. 계속 위험한 속에서 살아남았다.

 

1939년 1월, 국보는 귀주 안순현의 한 산동굴에 도착한다. 호송인원의 보호하에 잘 안치된다. 이곳에 숨기고는 다시 5년이 지났다.

 

그러나, 좋은 시절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944년 가을, 귀양, 유주가 차례로 함락된다. 안순이 함락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리하여 국보상자는 다시 천리먼길을 떠나게 된다. 이번의 목적지는 사천의 파현이었다. 이들 문화재는 하늘을 오르기보다 어렵다는 촉도를 거쳐서 운반되었다. 운반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도중에 여러 곤란을 겪으면서 비적들과 생사를 걸고 싸우기도 하면서 2개월후에 이 국보는 안전하게 파현에 도착한다.

 

1945년 10월 10일, 고궁의 태화전에서는 세계적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화북전투지구 일본군투항의식이 행해졌다. 이제 8년에 걸친 항전은 끝이 난 것이다.

 

우려와 고민속에 8년을 보낸 장백구는 바로 북경으로 달려가서 8년전에 그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린 <<중추첩>>과 <<백원첩>>을 찾아간다.

 

그러나, 위선자인 곽세오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중추첩>>과 <<백원첩>>은 그보다 훨씬 마음이 시커먼 아들 곽소준(郭昭俊)에게 넘어가 있었다. 이 자를 마음이 시커멓다고 하는 것은 전혀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국보를 자기 재산으로 생각해서, 장백구에게 황금 1천냥을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전설에 나올만한 엄청난 가격이다.

 

대부호인 장백구도 그렇게 많은 황금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돈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곽소준은 그와 성의있게 거래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이 자에게는 다른 의도가 있었다.

 

이전에 장방선생 곽세오 부자는 이미 필생동안 끌어모은 희세진보를 하나하나 해외상인과 정부의 고관들에게 팔아넘겼다. 나중에 예술적인 수장가치가 낮은 모조 도자기들은 '저가'로 국가에 반기부, 반매각하는 형식으로 넘겼다.

 

이를 통하여, 국민정부는 고궁에서 성대한 전람회도 개최해준다. 곽세오의 유상은 전람관의 높은 곳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곽소준에게는 10만달러를 포상금으로 내린다. 이외에 곽소준을 "중앙은행 북경분행양조"에 임명하여 송자문의 주구가 된다.

 

곽소준이 얻은 이 모든 댓가는 바로 그가 송자문에게 <<중추첩>>과 <<백원첩>>을 뇌물로 바쳤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장백구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탱천한다. <<신민만보>>에 글을 써서 싣는다. 곽씨부자의 추악함을 온 세상에 알린다. 송자문은 매체의 압력에 굴복하여, 부득이 두 업을 곽소준에게 돌려주고, 그와 거리를 둔다.

 

이렇게 하여, <<중추첩>>과 <<백원첩>>은 다시 곽씨가 팔기 힘든 개인재산으로 된다. 이때, 10년동안 떠돌던 <<쾌설시청첩>>은 마침내 숨어다니던 시절을 끝내고, 안전하게 남경으로 되돌아간다.

 

삼첩이 모두 완벽하게 살아남았지만, 함께 만나지는 못했다. 더욱 잔혹한 현실이 다가올 줄은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국토가 분열되고, 국민이 분열되고, 삼첩도 분열되었다. 그들의 운명은 또 어떻게 바뀔 것인가?

 

1948년 9월, 요심전투는 일거에 국민당의 군사배치를 무력화시킨다. 국면을 되돌릴 수 없게 된 국민당정부는 고궁의 보물을 대만으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진품중의 진품을 가져가고,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모두 가져간다고 결정한다.

 

1948년 말, 남경국민정부는 명령을 하달한다. 북경고궁내에 남은 국보를 빠른 시일내에 남경으로 옮기라고. 당시 고궁박물원 원장을 맡고 있던 마형(馬衡)은 원래 국보를 대만으로 옮기는 결정에 극력 반대했다. 이때 그에게 다시 이 명령을 이행하라고 하니, 힘이 날 리가 없었다.

 

다만, 명령을 어길 수는 없다. 그는 할 수 없이, "안전제일, 속도제이"의 보물보호정신에 따라, 국보를 안전하게 포장했다. 이렇게 하여 요심전투가 끝날 때까지, 북경고궁에 남아있던 문화재는 하나도 바깥으로 운반되어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이전에 남경으로 옮겨간 고궁의 국보는 이미 3차에 나누어 모두 238,951건이 국민당군대의 철수와 더불어 대만의 기륭항에 상륙한다. <<쾌설시청첩>>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도망치기에 바쁜 국민당정부는 <<중추첩>>과 <<백원첩>>을 가진 곽소준으로부터 이 두첩을 회수할 시간과 정력이 없었다. 사실 곽소준도 대만으로 도망쳤다. 그는 이제 부친이 남겨준 재산을 팔아서 연명하고 있었다.

 

이제, <<쾌설시청첩>>, <<중추첩>>과 <<백원첩>>은 모두 대만으로 흘러들어갔다. 서로 가까이 있었지만, 함께 모이지는 못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인 1951년 11월, 고궁박물원 원장으로 남아있던 마형은 우연히 한 가지 소식을 듣게 된다. <<중추첩>>과 <<백원첩 >>을 홍콩의 영국 HSBC은행이 매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마형은 깜짝 놀란다. 국보를 어떻게 영국인의 손에 들어가게 할 수 있겠는가?

 

거의 동시에, 당시 국가문물국 국장으로 있던 정진탁도 동남아 각국을 방문하는 길이었는데, 홍콩에서 이 소식을 듣는다. 그리하여 국무원에 긴급보고서를 올려 <<중추첩>>과 <<백원첩>>을 매입하도록 요청한다.

 

이 일은 국무원 총리인 주은래의 주목을 받았다. 즉시 지시를 내려, 마형등에게 팀을 만들어, 홍콩으로 가서 이 두 첩을 사오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이 두첩이 진품인지를 확인하라고 한다.

 

여러 방면의 노력을 거쳐, 결국 50만홍콩달러의 가격으로 구매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재정이 아주 곤란했고, 외환보유고가 1.57억달러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중앙정부는 과감하게 결정을 내려, 사들인 것이다.

 

12월 3일, <<중추첩>>, <<백원첩>>은 마침내 수전노의 손에서 다시 안전하게 북경으로 되돌아온다.

 

1951년 12월 27일, <<중추첩>> <<백원첩>>은 다시 "삼희당"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고궁을 떠난지 27년만이다. "삼희당"은 예전과 똑같은데, <<쾌설시청첩>>은 멀리 대만에 남아 있다. 삽첩은 아직 한 곳에 모이지 못한 것이다.

 

이들이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고궁의 수많은 보물들은 세계각지를 떠돌고 있다. 그들이 귀국하는 것은 아마도 장기전이 될 것이다.

 

국보를 보호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민당의 고위장군들은 고도의 책임감을 발휘했다. 국보의 안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들은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그들의 고상한 품격과 정신은 후인들로 하여금 숙연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