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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중국 역대 국가(國歌)의 변천(II)

by 중은우시 2008. 12. 15.

3. 국민당정부시기의 국가

 

1927년 국민당의 장개석이 혁명에 성공한 후, 남경에 국민정부를 건립한다. 남경국민정부의 국가는 국민당의 당가(黨歌)로 대체된다.

 

일찌기 1924년 1월에 개최된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대표의 제의에 따라 국민당 당가를 제정한다. 이리하여 국민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국민당원이 국민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고 분투하도록 격려했다. 이 제의는 비록 대표대회를 통과하기는 했지만, 국민당이 아직 전국정권을 장악하지 못했을 때이고, 광동광서조차 아직 통일되지 않았었다. 북벌도 아직 시작하기 전이다. 국사행동이 당시 국민당의 최우선과제였고, 다른 일은 신경쓸 수조차 없었다. 여기에 당시의 선전문화업무는 주로 중공당원이 담당했으므로, 이 문제는 그냥 방치되었다. 1928년 10월, 국민당의 제1차중앙상무위원회의에서 중앙상무위원인 대계도(戴季陶)가 이 일을 다시 제의한다. 손중산이 황포군관학교에 내린 훈사를 국민당의 당가가사로 하자는 것이었고, 이는 중앙상무위원회에서 받아들인다.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가 정식개교된다. 손중산은 국민당총리 겸 황포군관학교 총리의 신분으로 개교식에서 연설을 한다. 연설의 한 부분이 황포군관학교의 훈사가 된다. 나중에는 황포군관학교의 교육방침이 된다. 훈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삼민주의(三民主義)   삼민주의는

오당소종(吾黨所宗)   우리당의 종지이다

이건민국(以建民國)   이로써 나라를 세우고, 

이전대동(以進大同)   이로써 대동사회로 들어간다

자이다사(咨爾多士)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위민전봉(爲民前鋒)   백성의 선봉이 되어

숙야비해(夙夜匪懈)   밤낮을 쉬지 않고

주의시종(主義是從)   삼민주의를 따라서

시근구용(矢勤久勇)   근면하고 용감하게

필신필충(必信必忠)   신의있고 충성스럽게

일심일덕(一心一德)   한 마음 한 덕으로

관철시종(貫徹始終)   시종일관 관철하자

 

훈사는 비록 48개 글자밖에 되지 않지만, 의미가 축약되어 황포군관학교 학생들과 국민당당원들로 하여금 삼민주의를 위하여 분투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손중산의 훈사는 국민당에서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를 국민당 당가로 삼는 것은 적합한 일이었다.

 

국민당 당가의 가사가 확정된 후,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당가곡보심사위원회"를 성립시킨다. 구성원은 장개석, 채원배등 9명이었다. 위원회는 공모에 응한 100여곡중에서, 최종적으로 강서의 작곡가 정무균(程懋筠)의 악보를 채택한다. 이 곡조는 교회의 성가와 비슷했다. 1929년 1월 10일, 국민당 109차 중앙상무위원회는 정식으로 이 곡을 당가로 정하고, <<삼민주의가(三民主義歌)>>로 명명한다.

 

국민당의 당가가 반포된 후, 국민당의 각급 당부에서 모임때 이를 불렀을 뿐아니라, 중앙에서 지방까지의 각급정부, 심지어 일부 사회단체까지도 중요한 행사때 이 노래를 불렀다. 오래지 않아, 어떤 사람이 국민당 중앙당부에 국민당 당가로 국가를 대체할 수 있는지 물어본다. 1930년 3월 13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의안을 통과시켜, 중화민국의 국가를 정식제정하기 전에는 국민당당가를 국가로 대용한다고 결정한다.

 

국민당당가가 대국가가 된 후에도, 국민정부는 여전히 정식국가를 제정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여러번 사회에 국가 가사와 곡을 모집했다. 다만 적당한 좋은 작품이 나타나지 않았다. 1937년 6월,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국민당당가를 정식국가로 결정한다. 국민정부는 명령을 반포하여, 법령의 형식으로 국민당당가를 국가로 선포한다(1949년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한 후, 여전히 이 곡은 소위 국가로 쓰고 있다)

 

이 기간동안 국민당정부는 또한 <<중화민국국기가(中華民國國旗歌)>>를 제정한다. 대전현(戴傳賢)이 작사하고, 황자(黃自)가 작곡했다. 이는 국기를 게양할 때 쓴 곳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산천장려(山川壯麗), 물산풍융(物産豊隆)

염황세주(炎黃世胄), 동아칭웅(東亞稱雄)

무자포자기(毋自暴自棄), 무고보자봉(毋故步自封)

광아민족(光我民族), 촉진대동(促進大同)

창업유간(創業維艱), 면회제선열(緬懷諸先烈)

수성불이(守城不易), 막도무근공(莫徒務近功)

동심동덕(同心同德), 관철시종(貫徹始終),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

동심동덕(同心同德), 관철시종(貫徹始終), 청천백일만지홍(靑天白日滿地紅)

 

산천은 장려하고, 물산은 풍부하다

염황의 후손들이 동아시아를 웅패한다

자포자기하지 말고, 스스로를 묶어놓지 말고,

우리 민족을 빛내고, 대동사회를 촉진하다

창업은 힘드나니, 여러 선열의 공을 기억하고

수성도 쉽지않나니, 눈앞의 공로를 세우느라 헛되이 애쓰지 말라

한마음 한 뜻으로, 시종일관하여, 청천백일기를 온세상에 가득차게 하자

한마음 한 뜻으로, 시종일관하여, 청천백일기를 온세상에 가득차게 하자

 

한 가지 언급할 일은, 이 노래는 현재 대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대만이 중국대북(中國臺北)의 이름으로 국제스포츠경기에 참가할 때, 메달을 따서 깃발이 게양될 때는 이 곡을 연주한다.

 

전체 중화민국시기에 이들 임시 혹은 정식 국가 이외에도 다른 친일정권의 몇 개의 소위 "국가"도 있었다.

 

항일전쟁초기에 남경에 설립된 왕정위의 "중화민국유신정부"와 북경에 설립된 "중화민국임시정부"는 모두 북양군벌정부시기의 국가인 <<경운가>>를 자신의 국가로 삼았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는 9.18사변을 일으켜, 1932년에 "만주국"을 설립한다. 1933년 2월 24일 "만주국" 국무총리 정효서(鄭孝胥)는 <<건국가(建國歌)>>를 써서 "만주국"의 국가로 한다. 가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지내(天地內), 유료신만주(有了新滿州)

신만주(新滿州), 편시신천지(便是新天地)

정천립지(頂天立地), 무고무우(無苦無憂)

조성아국가(造成我國家), 지유친애병무우구(只有親愛幷無憂仇)

인민삼천만(人民三千萬), 종가십배야득자유(縱加十倍也得自由)

중인의(重仁義), 상예의(尙禮儀), 사아신수(使我身修)

가이제(家已齊), 국이치(國已治), 차외하구(此外何求)

근지칙여세계동화(近之則與世界同化),

원지칙여천지동류(遠之則與天地同流)

 

천지내에 새로운 만주가 있다.

새로운 만주가 있으니 바로 새로운 천지로다

하늘을 향해 우뚝 서니, 괴로움도 걱정도 없다.

우리나라를 만드니, 그저 가깝고 사랑이 있을 뿐, 걱정과 원수는 없다

인민은 삼천만이지만 10배가 되더라도 자유로우리라

인의를 중시하고, 예의를 숭상하여, 내 몸을 다듬고

집안도 이미 바로잡고, 나라도 이미 다스렸으니, 더 이상 구할 게 뭐겠는가?

가까이는 세계와 동화하며

멀리는 천지와 함께하리다.

 

1942년, 만주국은 다시 "대만주국국가"를 제정한다. 원래의 "만주국국가"는 "만주국건국가"로 바꾼다. 신 국가의 가사는 제2대총리 장경혜(張景惠)가 작사하였고, 일본인 야마다 고사쿠(山田耕作)가 작곡했다.

 

신광개우주(神光開宇宙), 표리산하장황유(表裏山河壯皇猷)

제덕지륭(帝德之隆), 외외탕탕막여주(巍巍蕩蕩莫與)

영수천우혜(永受天祐兮), 만수무강박해구(萬壽無疆薄海謳)

앙찬천업혜(仰贊天業兮), 휘황일월모(輝煌日月)

 

신의 빛이 우주를 열고, 황제는 통치는 드넓은 산하에 미치네

황제의 덕은 드높아라. 크고도 넓어서 비견할 바가 없다

영원히 하늘의 보우를 받으사, 만수무강을 노래하네

하늘이 내린 천업을 우러러니 그 휘황함은 해와 달과 같도다.

 

이 "국가"는 존재한 시간이 짧았고, 지역도 만주국이 통치하는 지역에 한하여,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4. 신중국의 국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이 국가를 제정한 것은 1930년대초부터이다. 1931년 11월, 중국공산단 강서 서금에서 개최된 중화소비에트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고, 프랑스인 Eugene Pttier가 작사하고, Pierr De Geyter가 곡을 붙인 <<국제가(L'Internationale)>>를 국가로 삼았다.

 

18년후,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로, 중국공산당은 신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1949년 6월, 북경에 모택동을 주임으로 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주비위원회가 구성되고, 정협회의의 준비업무를 수행했다. 주비위원회의 제6소조는 국가, 국기, 국휘의 제정을 책임졌는데, 조장은 저명한 교육가이자, 중국민주촉진회의 대표자인 마서륜(馬敍倫)이고, 부조장은 섭검영(葉劍英), 심안빙(沈雁氷)이었다. 주비위원회는 신문에 공고를 내서, 국가 가사를 공모했다. 전국각지에서 엄청난 응모가 쏟아졌다. 모두 국가후보는 632수, 가사는 694수를 모았다. 저명한 시인 곽말약도 <<중화송>>이라는 가사를 써서 10월 1일에 <<인민일보>>에 발표했다.

 

주비위원회가 초빙한 고문이자 저명한 음악가인 마사총(馬思聰), 여기(呂驥), 하록정(賀綠汀)등은 응모작 중에서 많은 우수한 작품이 있으나 국가로 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저명한 미술가인 서비홍(徐悲鴻)은 정협회의에서 이렇게 제안한다: 전한(田漢)이 작사하고, 섭이(耳)가 작곡한 영화 <<풍운아녀(風雲兒女)>>의 삽입곡 <<의용군행진곡(義勇軍行進曲)>>을 대국가로 하자고. 이렇게 하여 9월하순에 개최된 중국정협회의에서 결의가 통과되고, <<의용군행진곡>>은 대국가로 결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