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르크메니스탄 국휘(國徽)의 한혈보마
투르크메니스탄 지폐의 한혈보마
글: 장계합(張繼合)
냉병기(冷兵器)시대에 사람들이 가장 갖기를 갈망하던 것은 쇠를 무우처럼 자르는 검, 갑옷을 꿰뚫는 창, 그리고, 황금안장과 구슬장식을 단 좋은 말이다. 고대인들이 검을 사랑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총을 사랑하는 것과 같고, 고대인들이 말을 사랑하는 것은 현대인들이 차를 사랑하는 것과 같다. 고대에 좋은 써러브렛말은 현대의 롤스로이스, 벤틀리에 맞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말은 바로 "한혈보마"이다. 역대제왕은 이 보마에 군침을 흘려왔다. 한무제는 이를 얻기 위하여 두번이나 대외전쟁을 일으켰다. 수양제는 황당하게도 하늘의 진룡(眞龍)과 교접하여 씨를 얻기 위하여, 발정한 암말을 가득 이끌고 서역의 천지(天池)가를 돌아다니면서, 천마(天馬)를 얻으려 한 적도 있다.
전설상의 "한혈보마"는 바로 "아하르첩금마(阿哈爾捷金馬)"이다. 자주 볼 수 있는 털색깔은: 담금(淡金), 조홍(棗紅), 은백(銀白) 그리고 흑색등이다. 이 보마에는 세 가지 특색이 있다. 첫째, 체형이 건장하며 아름답고, 둘째, 속도가 아주 빠르며, 셋째, 땀을 피처럼 흘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 말들이 다른 말들과 다르기 때문에, 많은 국가의 역대 궁정에서는 어용마필로 사용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대왕, 징기스칸이 모두 이 최고급말을 탔었다.
이 말은 건장하며 아름답다. 투르크메니스탄의 아하르 오아시스가 원산지이고, 삼천여년간의 육종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머리가 가늘고 목은 높고, 사지는 가늘고 길며, 피부는 얇고 털은 가늘고, 발걸음은 가볍고, 힘이 있으며, 속도가 빠르고, 참을성이 강하다. 바람처럼 번개처럼 달려나가는 아름다운 말을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유방이 흉노족들과 "백등대전"을 벌일 때, 사나운 흉토기병이 유방을 얼어붙게 만든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상대방의 우수한 장비에는 강도가 강한 창과 칼이 있을 뿐아니라, 한번보면 잊을 수 없는 한혈보마도 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말은 흉노기병의 전투력을 높여주었다. 상대방인 한나라군대에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달리는 것도 자연히 빠르다. 전해지는 바로는, 한혈보마는 "낮에 천리를 달리고, 밤에 팔백리를 달린다"고 한다. 확실히 이것은 문학적인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말은 하루에 달리는 거리가 150킬로미터라고 하고, 아무리 빨라야 200킬로미터를 넘을 수 없다고 한다. 만일 다시 거기에 배로 달리게 한다면 힘들어죽을 것이다. 현재 한혈보마의 가장 빠른 속도기록은 84일간 4300킬로미터를 달린 것이다. 말의 달리는 속도는 상대적이다. 빠르면서도 끈기까지 있으니 좋은 말로 받들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가장 특이한 점이라면 "땀을 피처럼 흘린다"는 것이다. "한혈"이라는 것은 시적인 표현이다. 전해지는 바로는 말이 땀을 흘릴 때, 왕왕 처음에 스며나서 나중에 젖는다는 것이다. 그중 조홍색(대추붉은색) 혹은 심율색(짙은 밤색)의 말은 땀을 흘린 후에 어떤 부위의 색깔이 더욱 선명해져서, 멀리서 쳐다보면 마치 붉은 피를 흘린 것과 같다고 한다. 게다가 말의 목은 땀샘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그러므로 빠르게 달릴 때 온 몸에 붉은 색이 번뜩이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눈에 확 띈다.
현재, 전세계의 "한혈보마"는 아주 적다. 통계에 따르면, 겨우 2000필가량이다. 그리고 대부분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다고 한다. 이 나라는 이 전통있는 말을 보물로 각국원수에게 선물로 주곤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은 국보 한혈보마의 모습을 국가휘장과 화폐에 그려넣었다.
"한혈보마"를 얻기 위하여, 한무제는 자금과 인력을 아끼지 않고 대거 투입했었다. 그는 두번이나 전쟁을 일으켰는데, 대완인으로서는 한혈보마가 생산되는 것을 원망해야 할 것이다. 한무제는 순금으로 만든 말로 대완의 종마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대완국의 국왕은 군사안전을 고려하여 죽어라 응하지 않았다. 의외인 점은 한나라의 사신이 귀국하는 도중에 대완국의 경내에서 강도를 당하여 가지고 갔던 황금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무제는 대노하여, 이 한혈보마를 위한 전쟁을 결심한다.
기원전 104년, 한무제는 이광리로 하여금 기병 수만명을 이끌고 군대를 4000리나 급행군시켜, 대완의 변경을 급습한다. 전투초반을 불리했고, 할 수 없이 돈황으로 물러나야 했다. 군인들도 백에 여덟,아홉은 죽어버렸다.
3년후, 한무제는 다시 이광리에게 원정을 명한다. 병사 6만, 말 3만필, 소 10만두를 데리고, 두명의 말전문가와 함께 대완국을 정벌하러 떠난다. 이때 대완국의 국내에는 정변이 일어나, 할 수 없이 화의를 청하고, "한혈보마"시장을 전면적으로 개방하게 된다. 그리고 매년 한나라에 두 필의 최고급말을 보내주기로 약속한다. 이번 전투의 승리로, 한나라군대는 종마 수십필을 고를 수 있게 되고, 보통마종마 3000필을 얻는다. 아쉽게도 옥문관에 도착했을 때, 겨우 1천여필만 남는다. 이들 전략물자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한나라의 기병은 장거리원정능력이 크게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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