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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팽가진(彭家珍): 암살시대 최후의 자객

by 중은우시 2008. 5. 6.

 

 

글: 송석남(宋石男)

 

1912년 1월 26일 저녁, 동맹회(同盟會) 회원인 팽가진은 중화민국혁명시기의 중요한 일격을 완성했다. 바로 청나라말기 종사당(宗社黨)의 영수인 양필(良弼)을 암살한 것이다. 며칠후, 청나라황제는 퇴위한다. 손중산은 팽가진을 이렇게 칭찬한 바 있다: "노팽(팽가진)이 공을 거두는 탄환을 날렸다" 사실상, 팽가진은 단지 '공을 거둔' 것이 아니라, '궁(청나라황궁)을 거두는' 총알을 날렸던 것이다. 1912년 8월, 동맹회는 국민당으로 개조되고, 동맹회가 조직한 암살시대는 끝이 난다. 그리하여, 팽가진은 동맹회 역사상 최후의 자객으로 남게 된다.

 

동맹회의 암살풍조

 

암살시대의 최후자객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 암살시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신해혁명전 10년간, 암살을 고취시키는 분위기가 아주 심했다. 가장 먼저는 약 1902년 겨울, 일본유학생인 양육린(楊毓麟)이 <<신호남>>에 글을 써서, "폭탄이 아니고서는 꿈속을 헤매는 영혼을 깨울 수 없고, 칼빛이 아니고서는 심장에 낀 구리냄새를 긁어낼 수 없다". 1903년, 군국민교육회가 성립되면서 회칙에서, "방법은 세 가지이다. 하나는 고취(鼓吹), 둘은 기의(起義), 셋은 암살이다" 1907년 오월(吳?)은 <<민보>>의 증간에 <<암살시대>>를 발표했다. 이는 암살주의의 대표작이다.

 

당시의 혁명당인들은 암살에 심취한 사람들이 주류였다. 온화하기로 유명한 송교인(宋敎仁) 조차도 혁명방법을 "폭동"과 "암살"로 개괄했다. 선비기질이 넘치는 채원배(蔡元培)도 마찬가지로 "혁명에는 단지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폭동이고 둘은 암살이다" 이외에 장태염(章太炎), 추근(秋瑾), 진천화(陳天華), 도성장(陶成章)등 활동가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암살을 주장하거나 찬동했다.

 

1905년 8월에 성립된 동맹회의 주요한 핵심인물들도 암살을 혁명의 첩경으로 보았다.

 

손중산(孫中山)은 이 기간동안 최소한 암살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풍자유(馮自由)의 <<혁명일사>>의 기록에 의하면 1900년, 손중산은 혜주기의를 일으키는데, 일찌기 사견여(史堅如)를 광저우로 보내서, 암살을 통하여 자금을 모집하도록 지시했다. 사견여는 신해혁명이전에 첫번째로 폭탄을 사용한 자객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가 덕수(德壽)를 폭약으로 암살하려 할 때, 기술이 모자라서 목표에 명중하지 못하고, 부근의 집 8칸을 부수었다. 그리하여 6명이 압사하고 5명이 다쳤다. 백문위의 <<오십년경력>>에서는, 1905년 손중산이 친히 동맹회암살단을 조직하여, 손육균(孫毓均)에게 귀국하여 남경으로 가서 단방(端方)을 암살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풍자유에 따르면, 1911년까지, 손중산은 "만원을 황극강(黃克强)에게 주어, 암살경비로 쓰라"고 했다고 한다.

 

황극강은 바로 황흥(黃興)이다. 그는 동맹회에서 손중산 다음가는 제2인자이다. 그는 암살에 더욱 열심이었다. 거의 온 힘을 다하여 추진했다고 할 수 있다. 일찌기 일본유학때, 황흥은 군국민교육회암살단의 단원이었다. 1911년 광저우기의 전에 싱가포르에서 자금모집이 안되자, 그는 '왕정위의 뒤'를 잇기로 결심하고, 혼자서 암살을 시도한다. 광저우기의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는 풍자유에게 서신을 쓰는데, 스스로 '가장 위험한 적을 저격하여 죽은 자들에 대한 보상으로 삼겠다'고 소리친다. 손중산등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정말 광동수사제독인 이준(李準)을 암살하러 갔을 것이다.

 

동맹회의 또 다른 중요인물인 왕정위(汪精衛)도 암살을 주창했다. 1910년, 호한민(胡漢民)에게 보낸 서신에서, 호한민은 '암살은 안된다'고 하자, 왕정위는 '암살은 그저 몇몇 동지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뿐인데, 어찌 혁명의 원기를 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한다. 그 해 3월, 왕정위는 황복생, 유배륜, 진벽균등과 함께 섭정왕 재풍을 폭탄으로 암살하려고 기도한다. 그러나 일이 누설되어 왕정위는 체포되고, 그는 감옥안에서 시를 하나 쓴다. "강개가연시, 종용작초수, 인도성일쾌, 불부소년두(慷慨歌燕詩, 從容作楚囚, 引刀成一快, 不負少年頭)" 이 시는 당시 아주 유행한 시이다.

 

동맹회의 3대 핵심인물이 모두 암살을 지지하니, 상응하는 조직도 각양각색이었다. 비교적 중요한 것은 4개이다.

 

첫째, 1905년 동경에서 성립된 암살단. 방군영(方君瑛)이라는 여자가 우두머리이고, 오옥장(吳玉章)도 참여한 바 있다. 둘째, 1910년 홍콩에서 성립된 지나암살단. 구성원은 이준을 폭약으로 죽이려다 상처를 입고 체포된 유사복 등이다. 셋째, 1911년 광저우에서 성립된 성기양화점암살단(成記洋貨店暗殺團)으로 지나암살단의 양기신이 도와서 열었다. 그리고 10월에 부임하는 광주장군 봉산(鳳山)을 암살한다. 넷째, 경진동맹회의 암살기구가 있었는데, 왕정위가 주도했다. 원세개를 암살하려한 북경암살단, 장회지를 암살하려한 천진암살단등이 있다. 팽가진은 당시 경진동맹회의 군사부장이었는데, 단신으로 양필을 암살해서, 신해혁명중 최후의 자객이 된다.

 

동맹회의 암살역사

 

1900년 사견여의 양광총독 덕수 암살미수사건이후, 1912년 팽가진의 양필 암살사건까지 동맹회원의 암살사건은 50개가 넘는다. 개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무장의거를 일으키면서 상대방의 괴수를 암살하는 것. 예를 들면, 1906년 양탁림이 양강총독 단방을 암살기도한 것이나, 1907년 서석린이 안휘순무 은명을 암살한 것, 1911년 이섭화, 진방도가 광주순경도 왕병은을 암살기도한 것, 같은 해 장익무가 호북총독 서징을 암살기도한 것등이 그 것이다. 모두 개인의 암살로 집단적인 의거에 길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고, 대부분 '적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를 먼저 잡아라'는 생각에서 저지른 것이다.

 

둘째, 무장의거 실패후에 '괴수'를 암살함으로써 분을 푸는 것. 예를 들면, 1908년 안경 마포영의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범전갑은 성에 남아서 홀로 청나라군의 협령 여대홍을 죽이려 했다; 1910년 왕정위가 섭정왕을 암살하려한 것도 여러번에 걸친 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홀로 적의 괴수와 싸우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1911년 광저우의거가 실패로 돌아가자, 임관자등은 광주제독 이준을 폭약으로 상처이히고, 이패기는 새로 부임한 광주장군 봉산을 폭약으로 죽여버린다. 이것은 개인의 습격보복으로 죽어간 동지들의 넋을 위로하자는 행동이었다.

 

셋째, 구체적인 의거와는 무관하게, 그저 격렬한 정치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한 방식이었다. 예를 들면, 1910년, 진여염은 그가 보기에 외채를 빌려 사리사욕을 도모하는 우전부상서 성선회를 암살하고자 한다. 같은 해에 광좌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시찰중인 해군대신 재순을 총으로 암살하려한다. 그들은 자기의 총과 폭탄을 구호로 삼아 마비된 민중을 일깨우고, 동지들을 격려하고자 한 것이다.

 

동맹회의 암살행위는 아주 복잡했다. 그 사상근원은 대체로 두 가지로 귀납된다: 하나는 서방 특히 러시아에서 전래된 허무주의 및 민수주의(民粹主義)(양자는 혼동되는 경우가 많으나 절대로 같은 것은 아니다)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고대이래로 내려온 협객을 존중하고, 용사를 존중하는 자객전통애다. 그들은 서양서적을 읽고, '허무장' '민수당'을 숭배하며, 고서를 읽고, 자객, 유협을 숭배하였다. 양자가 결합되면서, 피가 끓는 개인영웅주의 혹은 공포주의로 충만하여, '비록 천명 만명이 있다고 해도 나는 가겠다' '공자는 인을 얘기했고, 맹자는 의를 얘기했다'고 외치면서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가장 잔혹한 권력에 대한 분노를 표명했다. 그들이 철저히 전복될 때까지.

 

자객 팽가진

 

'암살이 사회풍습으로 까지 된' 연원을 이해하였으므로, 이제는 팽가지니라는 최후의 자객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팽가진(1888-1912)은 사천 성도(成都) 금당(金堂) 사람이다. 부친 팽세훈은 청나라말기의 수재(秀才) 였고, 일찌기 일본으로 가서, 급진적인 사상을 접촉했고, 실업보국을 주장했다. 사천보로운동의 핵심중 한 명이었다. 소년시대의 팽가진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들여, 서방근대과학을 접촉하고, 송육인, 오지영, 요평등의 신파인물들과 알게 되었다.

 

1903년, 팽가진은 성도무비학당에 들어간다. 당시 구두시험은 이층에서 진행되었는데, 시험관은 계단이 몇 개인지를 물었다.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제대로 답하지 못했는데, 팽가진은 정확하게 답변했다. 이를 보면 그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06년, 그는 성적우등생으로 일본에 군사시찰단에 들어가고, 나중에 동맹회에 가입한다. 그의 친구에 따르면, 당시 팽가진을 포함한 7명의 젊은 회원들은 모두 머리를 박박 밀고 기념사진을 찍어 혁명에 대한 결심을 나타냈었다고 한다. 같은 해에 팽가진은 사천으로 돌아온다. 청나라군대의 배장(排長)이 된다. 성도바깥의 외봉황산에 주둔한다. 다음 해, 동맹회는 사천에서 핵심들로 성도의거를 밀모하는데, 일이 새어나갔다. 팽가진은 동료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고, 결국 3명의 회원이 피살되고, 7명이 감옥에 갇힌다.

 

이후 1910년초까지, 팽가진은 청나라군대의 하급관료로 지낸다. 두번에 걸쳐 직장을 잃자, 심양으로 가서 운을 시험한다. 7월, 동맹회원인 유개번의 소개로 봉천강무학당 부속합경연의 전대대관이 되고, 그 동안에 사방의 호객기사들과 연락하여, 나중에 거사시에 도움될 인맥을 쌓는다.

 

1911년, 그는 천진병참사령부 부관장의 직위를 따낸다. 부임때, 마침 무창의거가 일어난다. 10월, 청나라조정은 유럽에서 대량의 군수물자를 조달한다. 경봉로를 통해 남쪽의 장강전선으로 운송했다. 그는 이십진에서 난주군관인 혁명당인 시종운등과 연락하여, 이십진의 통제 장소증으로 하여금 군수물자가 난주를 지날 때 억류하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팽가진은 이 군수물자를 가지고 의거를 일으키고자 계획한다. 아쉽게도 장소선이 파면되면서 일이 성공하지 못한다. 10월 11일, 왕정위는 그와 백유환등을 모아서, 천진에서 동맹회 경진지부를 만들도록 하고, 왕정위가 지부장을 맡았다. 백유환은 참모부장, 팽가진은 군사부장을 맡았다. 이때, 팽가진은 대량의 군용차표를 경진당인에게 제공하여 사용하게 하고, 청나라조정의 총, 군마, 전량을 빼내서 혁명에 쓰게 한다. 일이 누설되어, 그는 이름을 바꾸고 도망친다. 청나라조정은 그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지만, 그는 여전히 북경, 천진, 심양, 상해등을 다니며 적극적으로 혁명당인들과 연락한다. 상해에서, 그는 손중산을 만나고, 기운을 더 얻게 된다. 이때 사천군은 마침 조직중이어서, 그는 촉군부총사령관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그는 완곡히 거절하고, 다시 북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원세개, 양필 및 재택(載澤)을 암살하고자 한다.

 

팽가진의 1912년전의 행적은 대략 위와 같다. 아래에는 두 가지 재미있는 자료를 소개한다.

 

하나는 그의 이상주의이다. 1911년 부친이 결혼을 재촉하자, 팽가진은 답신에서, "여전히 하급관료에 머물고 있다"고 답변한다. 그리고, "아들에게 돈이 없다"고 한다. 만일 가정을 이루려면 반드시 수년이 지나사 장군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 '흉노를 아직 멸하지 못하였는데, 어찌 집안을 이루겠습니까?"라고 한다. 이런 이유를 들어 결혼을 거절한다. 그의 미혼처는 결혼하지도 못했지만, 그녀는 팽가진을 위하여 평생 수절했다.

 

둘째는 그의 외모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자객은 영웅기가 넘치고 용모가 남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팽가진의 외모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덩치가 크지도 않았고, 영준하지도 않았다. 동맹회원 왕자건의 회고에 의하면, 상해에서 팽가진을 본 적이 있는데, '키는 크지 않았다. 약 150여센티정도이고 160을 넘지 않았다" 사료에 의하면, 팽가진이 양필을 암살한 후, 청나라군총병이 그의 시신을 조사하였는데, '짧은 몸, 둥근 얼굴, 짙은 눈썹, 나이는 삼십여"의 보통 모습이었다고 한다. 팽가진이 죽을 때 아직 24살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삼십여로 보였다면 그가 좀 겉늙어보였다는 뜻일 것이다.

 

팽가진의 암살이유

 

1912년, 팽가진의 마지막 해였다. 이때, 청나라조정은 동북삼성(요녕, 길림, 흑룡강)과 직예(지금의 하북), 산동, 하남, 감숙, 신강의 여덟개 성을 장악하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14개성을 장악하고 있어 약 2/3를 차지했다. 원세개의 훈련된 북양군에 비하여, 남방의 국민군은 비교적 느슨한 조직이었다. 남방이 정말 북방을 공격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1911년 9월부터 개시된 남북협상은 다음 해 1월까지 결론없이 대치상태였다.

 

원세개, 손중산이외에 또 다른 제3의 세력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양필등 종사당의 실제우두머리인 청나라조정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숨을 내쉬면서 최후의 힘을 냈다. 종사당이 정식으로 나타난 것은 1912년 1월 12일이었다. 황족인 양필, 육랑, 부위, 재도, 재택, 철양등이 '군주입헌유지회'라는 명의로 선언을 발표한다. 종사당의 구성원은 대부분 가슴에 이룡(二龍)을 수놓고, 만주이름을 썼고, 북경 천진등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내각총리 원세개를 쫓아내고, 육랑, 재택이 나서서 조각을 하고, 철량, 양필등이 군을 이끌고 남방과 최후의 결전을 벌이고자 했던 것이다. 양필은 심지어 3개월내에 남방군을 격멸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런 상황하에서, 원세개, 양필등을 암살하는 것은 경진동맹회의 주요한 임무가 되었다. 1월 16일, 동맹회원 양우창, 장선배, 황지명등은 암살소조를 구성한다. 폭약으로 원세개를 죽이고자 한다. 첫번째 탄은 말을 죽였고, 두번째 탄은 명중하지 않았으며, 세번째 탄은 가마를 모는 말을 죽였고, 다음 탄도 원세개의 자리를 맞추지 못하였다. 원세개는 암살사건을 겪은 후 집안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원세개를 암살하는데 실패하자, 양필은 북방 국민당인들에게 첫번째 표적이 되었다. 양필은 젊어서 성도에서 성장하고, 청나라종실의 도르곤의 후예이다. 일찌기 일본에 유학하여 군정을 배웠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뜻이 컸따. 만주인들중에서는 '참신한 군사인재'로 이름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창나라말기의 지누도강활동에 참여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신군을 훈련시키고, 군학을 세웠다. 그는 아마도 청나라의 마지막 장수일지도 모른다.

 

양필을 없애면, 종사당은 파괴되고, 청나라황제는 물러나게 할 수 있었따. 이것이 동맹회가 그를 암살한 이유이다. 그렇다면, 다른 요소도 있었는가? 그리고 왜 팽가진인가?

 

당연히 있다. 하나는 "친구를 위한 복수설"이다. 동맹회원 한봉이 쓴 글에 따르면, 팽가진이 양필을 죽인데에는 막역한 친구인 오록정을 위한 복수가 그 이유라고 한다. 오록정은 일찌기 육군 제육진의 통제였는데, 혁명당인이었다. 나중에 산서순무를 지내는데, 부임하다가 원세개파에 피살당한다(일설에는 여원홍이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팽가진은 당시에 이를 양필의 소행으로 알았다. 그리하여 그를 암살한 것이라고 한다. 한봉은 당시 팽가진과 교분이 있었고, 팽가진, 오록정 두 사람은 확실히 교분이 남달랐다. 그런 점에서 '오록정을 위하여 복수한 것이다'라는 주장도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원세개의 차도살인설"이다. 동맹회원 이화영이 쓴 글에 의하면, 원세개는 암살사건을 당한 후, 일찌기 원극정을 통하여 이석증에게 말한 바 있다. 어전회의에서 만청귀족들은 오직 양필의 말이라야 들으니, 원세개가 비록 내각총리이지만 발언권이 없다고. 그 의미는 양필만 없어지면, 공화제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석증은 이를 경진동맹회에 알렸고, 여러 사람들이 논의끝에 양필을 죽이기로 한 것이라는 것이다. 팽가진이 스스로 떠맡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설에도 믿을 만한 점이 있기는 하다. 원세개는 양필이 죽은 후 다음 날인 1월 27일에 바로 단기서등 40여명의 장군들과 연락하여 청나라조정에 공화를 주장하는 전보를 보낸다. 양필의 암살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사람은 바로 원세개이다.

 

이외에, 팽가진의 강렬한 성격과 개인영웅주의도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암살시행전에 그는 동지들에게 <<유묵철교황이용서>>를 남겼다. 아주 피끓는 문자로 스스로를 형가, 섭정 및 박랑에서의 장량에 비견했다. 그리고, <<절명서>>에서 그는 자기가 먼저 동삼성에서 "개인주의로 조이손을 죽이려 한 적이 있으나, 사천성 하나만을 본 것이어서, 의미가 적어 실행하지 않았다" "공화가 이루어지면 비록 죽어도 영광이다. 공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살아도 욕된 것이다. 살아서 욕을 보느니, 죽어서 영광스러운 것이 낫다" 개인주의와 영웅주의의 기미가 충분히 보인다.

 

사실,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한 연유를 살펴보면, 왕왕 다원적이고 단일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상의 여러가지 설은 아마도 양필을 암살한 여러가지 이유중의 하나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양필암살: 진상에 접근한 서술

 

팽가진이 양필을 암살한 과정에 대하여 항간에는 여러 버전이 떠돈다. 필자가 본 것만으로, 황이용, 진헌민, 한봉, 이화영, 세서항, 진춘생, 상순, 이병지의 여러 기술이 있다. 여기에는 요석광, 풍자유, 왕정위등 여러명이 쓴 전략등은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당시 신문에서의 각양각색의 보도들도 있다. 도대체 역사의 진상은 어떠했는가? 역사의 진상은 재현될 수 없다. 역사학자들은 그저 여러 자료를 보고,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 필자가 보기에, 팽가진이 양필을 암살한 전후과정은 아래와 같다.

 

암살전에, 팽가진은 자정원의 각왕공개회때, 포간으로 그들을 한꺼번에 죽여버릴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자정원의 입장권을 손에 넣었을 때, 이미 자정원은 해산하고난 다음이었다. 왕공들도 모두 가버렸다. 그리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양필을 암살하기로 확정한 후, 팽가지는 적지 않은 문제에 부닥친다.

 

첫째, 양필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모르고 어떻게 죽이는가? 잘못 죽이면 어떡하는가? 그리하여 그는 양필의 친구인 나춘전, 함만장등과 관계를 엮어, 함께 도박을 한다. 그 사이에 벽에 걸려있는 청나라귀족의 사진을 보게 되는데,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양필의 사진이 뭔지를 알아내고, 나중에 기회를 보아 몰래 가지고 나와버린다.

 

둘째, 어떻게 양필에 접근할 것인가? 팽가진은 양필의 제자중에서 봉천강무당 감독인 숭공이 자기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로 변장하고 양필을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래하여 천진에서 숭공의 명함을 하나 인쇄하고, 청나라 장교의 복장도 한 세트 구매해 놓는다. 이것을 모두 입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한번 봐주소. 내가 고대의 협객을 닮지 않았는가?"

 

셋째,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 암살단 조직원들과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팽가진은 길가에서 저격하는 방식은 안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폭탄을 던져도 정확성이 없고, 적들이 도망치거나 반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집으로 찾아가서, 직접 실내에서 그를 암살하여야 한다고 결정했다.

 

넷째, 누구를 조수로 할 것인가? 원래 팽가진은 동맹회원 왕숭의, 단자균의 도움을 받으려 했다. 왕숭의는 팔힘이 뛰어나고, 침착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얼마전에 집안서 폭약을 다루다가 잘못하여, 오른쪽 눈과 오른팔을 다쳤고, 병원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단자균도 다른 곳에 밀명을 받고 가서 기의를 일으킬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두 팽가진과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 이는 마치 태사공(사마천)의 <<자객열전>>에서와 유사한 상황이 된 것이다.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려 하기 전에 검객조수를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고, 태자단이 재촉하자, 그는 할 수 없이 진무양과 함께 가게 되었다. 팽가진은 출발전에 분명히 그 장면을 떠올렸을 것이다. 역수의 바람이 차고, 흰 옷에 눈이 내리는 장면이.

 

다섯째, 만일 체포되면 어떡할 것인가? 당시, 팽가진등은 동지들과 약정했다. 일단 일이 실패하고 체포되어 원세개의 손안에 떨어지면, 양필이 보냈다고 말하고, 양필에게 잡히면 원세개가 보냈다고 말하기로. 어쨌든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기로 한 것이다.

 

문제는 기본적으로 해결되었다. 이제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1월 26일 저녁, 팽가진은 청나라장교복을 입고, 폭약을 외투에 숨기고, 총은 허리에 꽂았다. 그리고는 숙소를 떠나, 먼저 금태여관으로 간다. 북방말투로 숭공의 신분으로 금태여관의 방을 잡는다. 그후 여관의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서, 홍라창에 있는 양필의 집으로 간다. 문지기에게 물어보니, "대인은 여전히 육군부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팽가진은 "철사자후통에 계시냐?"고 물으니 문지기는 그렇다고 답한다. 팽가진은 바로 몸을 돌려 육군부로 간다. 마차가 후통입구에 도착했을 때, 반대편에서 마차가 하나 왔다. 마차에 탄 인물이 양필을 닮았다. 팽은 바로 마차를 세우고 여쭈어 본다. 양필의 마차가 서고, 팽가진은 명함을 들이민다. 양필은 명함을 받고는 온 사람이 숭공과 좀 다르다고 느낀다.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에, 팽가진은 가슴에서 폭탄을 꺼내서 던진다. 큰 소리가 벼락처럼 울리고, 양필은 왼쪽 다리가 날라가고, 피로 범벅이 된다. 팽가진의 머리도 파편에 맞아서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수일후, 양필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고 죽는다. 죽기 전에, 그는 처와 딸에게 일렀다: "나를 죽인자는 노살과 음창은 죽이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사천사람이니, 정말 대단한 사내대장부이다. 나는 원래 군인이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종사당이 없어질 것이니 어찌할 것인가" 양필의 탄식은 바로 현실이 된다. 그가 죽은 후 종사당은 모두 겁에 질려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게 된다. 2월 12일, 융유태후는 어린아들을 이끌고나와서 청나라황제의 퇴위를 선언한다. 중국에서 2000여년이래 지속된 왕조시대가 이렇게 막을 내린다. 이론적으로는 더 이상 천자에 속하지 않고, 전체민중에 속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11년 10월 10일의 무창의거부터 이날까지 83일이 걸렸다. 이처럼 신속한 승리는 세계역사상 여하한 위대한 승리중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최후의 자객 팽가진의 폭탄은 여기에 큰 공헌을 했다. 손중산의 말을 빌리자면, "노팽의 탄환이 공을 거두었다"

 

1912년 2월 22일, 민국정부는 "임시대총통령"으로 팽가진을 '육군대장군'에 추증한다. 그와 같은 영예를 얻은 자는 추용(鄒容), 유배륜(喩培侖) 뿐이다(사봉기는 좌장군이다). "팽대장군"의 직위에 오른 후, 무수한 만련과 시문이 도래했다 그 중에서 오수령이 쓴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개인긍위동포사(個人肯爲同胞死)

일탄가당백만사(一彈可當百萬師)

 

개인이 동포를 위해서 죽었도다

폭탄 하나가 백만대군에 버금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