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초기)

협화의원(協和醫院)의 역사

중은우시 2008. 7. 3. 17:55

 

 

글: 이암(李巖)

 

설립된 이래로, 협화의원과 협화의과대학은 중국에서 가장 명망있는 의료기관이며 의학교육기관이었다. 그런데 협화사람들은 자주 '백발궁녀가 옛날 이야기를 하듯이" 협화의 과거역사를 회고하는 것을 즐긴다. 이는 분명히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협화의 역사이지 협화의 현재는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확실히 협화는 휘황한 역사를 지녔고, 그 역사적 지위는 현재의 지위보다 뛰어나다.

 

20세기초의 중국은 국력이 쇠약했고, 인민은 빈곤했다. 협화와 같이 모범적이며 세계적인 일류의료기관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놀랍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외부조건이 훨씬 뛰어난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당년의 협화에 비견할만한 성과를 거두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역사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도, 겉으로 보기에 약하고 가난했던 시절에 지금의 사회가 따라갈 수 없는 훨씬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지는 않았을까?

 

근대이래로, 중국으로 온 전도사들은 그들의 종교신앙을 전파하는데 노력하는 외에, 의료와 교육의 영역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리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서방사람들은 중국에서 성공적으로 규모를 지닌 신식의료기관과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그중에는 나중에 협의의원의 전신이 되는 협화의학당(協和醫學堂)이 있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의 몇 개 교회가 만든 것이다. "협화"의 영문명칭은 "Union"이다.

 

경자사변(庚子事變)은 세기의 교체기에 큰 사건의 하나였다. 중국은 비록 공전의 비참한 경우를 당했지만, 중국과 서양의 관계에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양식있는 일련의 서방인들은 중국에 현대지식과 신식교육을 보급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고, 중국을 현대화의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진보시켜야겠다고 생각한다.그리하여,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서방인들은 중국에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붐을 이룬다. 그중에는 미국의 록펠러재단도 들어 있었다.

 

록펠러의 이름은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이미 부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시에 록펠러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자선가의 하나이다. 록펠러로부터 이 가족은 여러가지 사회사업에 많은 돈을 기부했다. 중국에서도 록펠러는 여러 곳에 기부를 했다. 사실상 미국이외에 중국은 록펠러기금을 가장 많이 사용한 국가이다.

 

Fredrick Gates는 록펠러로 하여금 재산을 자선사업에 투자하게 한 핵심 인물이다. 그의 건의하에 록펠러는 더 이상 돈만 버는 자본가가 아니라, 돈으로 각종 사회자선사업을 하는 자선사업가로 바뀐다. 행운이었던 것은 게이츠는 중국에 대하여 깊은 흥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20세기초, 그는 특별히 록펠러에게 건의한다. 중국에 종합대학을 만들어 중국현대화교육사업의 발전을 이끌자고.

 

록펠러는 이 건의를 중시한다. 그리하여 그는 3번에 걸쳐 시찰단을 중국에 보낸다. 1909년, "동방교육고찰단"이 중국으로 간다. 고찰단에는 시카고대학에서 온 2명의 의사가 있었다. 고찰을 통하여, 그들은 중국에서 의학교육을 발전시키는 것이 시급하다고 결론내렸다. 그리고는 북경에 자연과학의 교육기관 두자는 것이었다. 록펠러는 이 건의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범위를 더욱 한정하여, 초보적으로 중국에 투자하는 범위를 '의학'으로 확정한다.

 

1913년, 록펠러기금이 정식으로 성립된다. 이어, 기금회는 중국문제에 대하여 논의한다. 그리고 중국에 의학교육을 발전시키자고 결정한다. 1914년, 록펠러는 두번째 고찰단을 파견한다. 중점적으로 고찰한 것은 중국의 의학교육현황이었다. 이 고찰단은 중국의 십여개도시의 수십개 의원을 돌아본 후, <<중국의 의학>>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 보고서는 지금까지도 서양인들이 중국의 의학교육에 대하여 쓴 고귀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보고서에서는 중국에 높은 수준의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미래의 의학기관을 위한 여러가지 구체적인 방침을 확정한다.

 

이 보고서는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서 미래의 협화의원의 방향을 확정했다. 그것은 바로 협화의원은 높은 수준의 고급인재를 배양하는 교육기관이라는 것이다. 고찰단은 이렇게 하는 것이 효과가 더욱 좋다고 보았다. 또다른 가능한 선택은 수준을 낮추고, 배양하는 인원수를 늘이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하면 가능한 중국사회의 의사에 대한 수요는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이 두가지 예비방안중에서 전자가 결국 채택된다. 이 결정은 나중의 역사에 의하여 정확한 것으로 증명된다. 바로 이 핵심결정은 협화의원을 중국의학계에서의 선도적인 지위를 확립해준다.

 

1915년, 록펠러기금은 돈을 내서 "북경협화의학당"을 매수한다. 그리고, 북경협화의학원(PUMC, Peking Union Medical College)"로 개명한다. 동시에 이 해에 제3차고찰단을 중국에 보낸다. 이번 고찰단의 임무는 의학원의 구체적인 학교운영방법을 정하는 것이었다.

 

이번 고찰단은 미국의학계의 일부 유명인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들은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의학원관리방법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협화의학원은 시작부터 아주 높은 수준에서 출발한다. 그 중에는 모두 영어로 수업한다, 입학기준은 미국우수의학원의 기준에 따른다, 예과를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2년간 기초학과를 배우게 한다, 교사를 위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높은 급여와 복지를 보장한다. 결론적으로 협화의 창설자들은 미국의 가치관, 과학기술문명, 경영모델을 그대로 중국에 옮긴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한 바에는 미국의학교육상황도 잠깐 언급하는 것이 좋겠다. 실제로 19세기후반까지 미국은 비록 세계최강대국이 되었지만, 의학원교육수준은 아직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때, 세계상 최고수준의 의학교육국가는 독일이었다. 독일교육가 흄볼트는 베를린대학에서 강의와 학술의 자유를 창도한 이래, 교학, 학술,연구의 삼위일체관념으로 독일대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따. 이런 현대교육관념하에서 독일대학은 급방 유럽의 다른 나라를 추월한다. 학술연구와 교육관리수준에서 모두 세계의 선진수준이 된다. 같은 시기의 미국의학교육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독링은 전세계 젊은이들이 바라는 의학의 전당이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본국의학교육의 개혁에 뜻을 둔 미국의학자들은 대대적으로 독일의 경험을 흡수한다.

 

1870년에서 1914년까지, 1500여명의 미국의사가 독일에서 공부한다. 이들 학자들은 독일의 경험을 미국으로 가져온다. 점차 미국에도 세계최고수준의 의학원이 설립된다. 1893년, 저명한 존스 홉킨스의과대학이 설립된다. 이는 미국 현대의학교육사상의 이정표적인 사건이다. 독일에서 유학한 후 돌아온 원장과 다른 학자들은 선진적인 독일의학교육시스템을 채택했다. 이 병원은 미국의학교육의 모델이 된다. 원장인 웰치는 '미국의학의 총장'으로 불리운다. 지금도 존스 홉킨스의과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선진적인 의학교육기관이다.

 

록펠러가 중국에 협화의학원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후, 그는 구미의 일류의학교육인재를 포섭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존스 홉킨스의과대학의 인재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하여, 협화의학원은 처음부터 당시 유럽에서 발원하고 미국에서 완벽하게 발전한 세계최고수준의 의학교육,관리시스템을 갖추게 된다. 이는 당시 미국의학교육이 성공적으로 개혁된 결과였다. 여기에 록펠러기금회의 두터운 자금력을 보태어 협화의 명성이 형성된 것이다. 협화는 실제로 세계최선진의 의학교육시스템을 중국에 도입하는 문호였고 경로였다.

 

학사운영방침 경관리시스템과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건설이외에, 하드웨어측면에서도 협화는 많이 투자했다. 협화가 설립된 후, 북경 왕푸징부근의 예왕부(豫王府)에 새로 학교건물을 짓는다. 이를 위하여 기금회는 당시 세계일류의 설계사를 초청한다. 현지실사를 거쳐, 설계사는 예왕부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초위에 중국과 서양을 합치고, 원자재를 잘 고르고 시설이 완벽한 협화건축군을 완성한다. 록펠러기금회는 이를 위하여 많은 돈을 들여서 땅을 사들였을 뿐아니라, 외국에서 건축자료와 선진적인 의학설비도 도입한다. 1919년이 되어, 쓴 비용은 이미 750만달러에 달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정부는 협화의원의 건립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이 문제를 얘기하자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당시의 중국은 비록 국력은 부족했지만, 대외개방에서는 대국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세계적인 선진문명을 도입하는데 환영하고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나중에는 불가능하게 된다. 실제로 록펠러기금회가 북경에 설립한 협화의학원은 당시의 중국정부가 거의 간여하지 않는다. 투자자와 건설자들은 자유롭게 추진했다. 그들은 거의 완전히 자유롭게 의과대학이 학사방침, 관리방법등의 각종 사항을 정했고, 정부관리의 입맛에 맞추기 위하여 타협하거나 희생할 필요가 없었따. 협화의학원을 설립하는 일에 관하여 중국과 외국의 합작태도는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투자하는 외국측은 세계일류의 의학교육기관을 건설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비록 투자금액이 크지만 다른 부가적인 정치적 경제적 조건을 전혀 달지 않았다. 중국정부측면에서도, 기본적으로 간섭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투기하지도 않았고, 투자자들이 원하는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이같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배경요소들은 아마도 대량의 투자나 고층빌딩처럼 주목을 끌지는 못하더라도, 실제로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협화탄생과 성장의 역사는 20세기초엽의 중국에서 극히 전설적인 면이 있다. 그때의 중국은 비록 많은 측면에서 세계에 낙후되어 있었지만, 마음을 비우고, 전면적으로 대외개방하고 배웠으며 성공적으로 협화와 같은 세계일류수준의 학술교육기관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