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 부소묘
진시황은 중국을 처음으로 통일한 황제이다. 그리하여 그의 장남인 부소는 이 사상 유례없는 대제국의 첫번째 왕자 겸 황태자가 되었다.
부소는 진시황의 장남이다. 그의 모친은 정비(鄭妃)로 정나라 사람이다. 그녀는 고향에서 유행하던 노래인 <<산유부소(山有扶蘇)>>라는 사랑노래를 즐겨불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시황제는 그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이름을 "부소"라고 명명하나. "부소"는 고대사람들이 나뭇가지가 무성한 것을 형용하는 말이었다. 진시황이 장남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것은 아마도 아들이 나라를 번성시켜주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후손도 번창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확실히 부소의 유소년시기에 진나라의 강역은 무한히 확대되었고, 국가의 형세도 아주 좋았다.
많은 경우에, 역사는 용인, 악인을 선택하고, 호인, 능인을 배제한다. 이름만 들어보더라도 "부소"는 "호해(胡亥)"보다 훨씬 듣기 좋다. 지능의 측면이나 인격의 측면, 품행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부소는 "1급품"이라면, 호해는 "2급품" 내지는 "등외품"이다.
어려서부터 부소는 총명하고 기지가 뛰어나 진시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백성의 고통을 가슴아파하는 자비로운 마음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것때문에 진시황은 머리가 아팠다. 특히 부소가 성장한 후, 정치적인 견해에서 부친인 진시황과 다른 경우가 자주 나타났다. 가장 격렬한 충돌은 유명한 "분서갱유"에서 였다. 이때, 아들은 "천하가 막 안정되었고, 멀리서 죄인들이 아직 다 모여들지 않았는데, 모두 공자를 본받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제 황상께서 중한 법으로 다스리시니, 신은 천하가 불안하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한다. 진시황은 대노라여 이 아들은 성격이 너무 유약하여 단련시키지 않으면 인재가 될 수 없겠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부소로 하여금 대장군 몽명을 따라 만리장성을 수리하고, 북방의 흉노를 막으라고 전선에 내보낸다.
이런 교육방식은 효과가 있었다. 몇년동안의 변방에서의 생활과 전투로 부소는 많이 성숙된다. 그는 병졸들의 모범을 보였고, 용맹하게 싸웠으며,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민첩한 통찰력과 뛰어난 지휘능력은 많은 변방의 장수들을 감탄하게 하였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여 백성들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 대장군 몽염도 그와 깊은 정의를 맺는다. 진시황은 함양에 있었지만, 부소가 보내온 서신도 보고, 몽염의 사자가 말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면서 부소를 더욱 좋아하게 되고, 그를 장차 제2의 진시황으로 키우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의 "시황"을 뒤이어 2세, 3세가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사람의 생각은 하늘의 생각을 따르지 못한다. 변방에 부소를 유배보낸 진시황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이 그렇게 돌연히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일 일찌감치 알았다면, 그는 절대 부소를 장성으로 보내지 않았거나, 일찌감치 불러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늦었다. 아마도 그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서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가 아끼던 아들의 목숨을 구해주지 못한 것이다.
역사는 왕왕 비슷하게 진행된다. 황제가 죽었을 때, 신변에 없던 황자는 항상 재수없는 것이다. 만일 그 황자가 황제의 총애를 많이 받았다면 더욱 그러하다. 유명한 예는 바로 강희제의 14황자이다. 만일 그가 멀리 변방에 나가 있지 않았더라면, 옹정이 황제의 용상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부소는 바로 그러한 선례이다. 하물며 그 당시에는 조고와 같이 담이 큰 태감과 호해와 같은 악독한 동생이 있었으니, 당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이어지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스캔들이다. 조고와 이사는 진시황의 죽음을 감추고 발상하지 않는다. 조서를 위조하여 부소를 자살하게 한다. 부소가 이 조서를 바라보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때, 이미 그의 부친의 시신은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부소는 몽염의 권유를 물리치고 돌절벽에 머리를 받아 죽는다. 그리고 이후 들려오는 소식은 호해가 급히 등극하여 황제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부소가 머리를 들이받은 그 절벽에서는 하나의 샘물이 솟아났는데, 사람들이 이 샘물에 아주 비감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 "오열(嗚咽)". 동시에 이 곳을 "살자곡(殺子谷)"이라고 불렀다.
거국현량진루수(擧國賢良盡淚垂)
부소굴사술변시(扶蘇屈死戌邊時)
지금곡구천오열(至今谷口泉嗚咽)
유사당년한이사(猶似當年恨李斯)
온나라의 현명하고 훌륭한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니,
부소가 억울하게 변방에서 죽을 때였다.
지금도 골짜기입구에는 샘물이 오열하고 있으니,
마치 당시 이사를 원망하는 것같구나.
진시황도 죽었고, 부소도 죽었고, 몽염도 죽었다. 얼마 되지 않아, 진나라도 멸망했다. 일단의 휘황한 역사는 돌연 끝났다. 수덕(綏德)의 산에 올라 사방을 쳐다보면 새북의 대지가 널다랗게 펼쳐져 있다. 무정하, 대리하, 황하가 굽이굽이 흐른다. 새는 쓸쓸히 하늘을 날다가 골짜기도 되돌아온다. 부소는 이 곳에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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