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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남창기의(南昌起義):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by 중은우시 2009. 1. 11.

 

 

 

글: 곤륜산인

 

남창기의를 얘기하면, 저우언라이(周恩來), 예팅(葉挺), 허롱(賀龍)과 주더(朱德)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남창기의를 가장 먼저 제안한 사람을 얘기하자면, 핵심적인 역사인물 리리산(李立三)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27년 7월 12일, 중공중앙은 코민테른의 지시하에 조직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천두슈(陳獨秀)가 정직당하고, 장궈타오(張國燾), 장타이레이(張太雷), 리웨이한(李維漢), 리리산과 저우언라이의 5명으로 중앙상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들이 정치국의 직권을 대행했다. 임시중앙의 주요업무는 당조직을 지하로 들어가게 하고, 중앙기관은 구강(九江)에서 상해(上海)로 철수시켰다. 동시에 광동에서 다시 의거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했다.

 

거기에는 아예 남창기의 계획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리리산은 구강에 도착한 후, 아예 철수임무를 무장의거를 조직하는 것으로 바꿔 버렸다. 7월 20일, 탄핑샨(譚平山), 덩중샤(鄧中夏)와의 구강회의에서, 리리산은 예민하게 임시중앙의 '광동남하'가 불가함을 분석하고, 오히려 집결가능한 부대를 하루빨리 남창으로 집결시켜 남창에서 의거를 일으키도록 제안했다.

 

"8월1일"은 원래 정한 기의일자가 아님

 

제1차구강회의에서 남창기의를 제안한 후, 리리산과 덩중샤는 즉시 여산의 보로딘(鮑羅庭), 취츄바이(瞿秋白)와 장타이레이에게 보고했다. 취츄바이와 장타이레이는 모두 잘 알다시피 중국공산당 초기의 혁명지도자들이다. 보로딘은 코민테른이 중국에 파견한 대표로 그의 의견이 중국공산당에 아주 중요했다.

 

리리산의 의거에 관한 보고를 받은 후, 보로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나 취츄바이와 장타이레이는 완전히 찬동했다. 취츄바이는 즉시 한구(漢口)로 가서 중공중앙에 보고했다. 리리산등은 중앙의 지시를 기다릴 시간이 없어, 7월 24일 개최한 제2차 구강회의에서 예팅, 허롱부대가 7월 28일전까지 남창으로 모이고, 7월 28일 남창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한다.

 

저우언라이는 무한(武漢)에서 먼저 리리산의 보고를 받고, 중공중앙은 즉시 토론을 전개한다. 마지막에는 폭동을 일으키는데 동의했다. 다만, 이상적인 폭동지점을 구강 남심이라고 한다. 그런데, 리리산은 의거지점을 남심으로 하는데 반대한다. 왜냐하면 구강지역의 군벌부대는 이미 집결해있어 의거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기의를 준비한 예팅, 허롱의 부대가 이미 속속 남창으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남창에서 의거를 일으키는 것은 번복될 수 없었다.

 

리리산은 저우언라이를 설득하여, 의거지점을 남창으로 확정한다. 의거시간도 1927년 7월 30일밤으로 정한다. 다시한번, 의거를 계획된 시간에 거행하는데 방해한 사람은 장궈타오였다. 7월 27일 아침, 장궈타오는 구강에 도착한다. 그는 중앙의 최신의견을 가지고 왔는데, 장궈타오는 당중앙의 '의거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곡해하여, '먼저 장파쿠이(張發奎)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고, 의거문제를 다시한번 신중하게 검토하라고 했다. 처음으로 책상을 치며 벌떡 일어선 사람은 리리산이었다. 저우언라이도 책상을 치고 일어섰다. 저우언라이는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이것이 바로 그가 일생에 처음으로 책상을 치며 일어선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의거의 기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 100명을 넘었다. 일부 의거부대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의거의 화살을 이니 떠났다. 막을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장궈타오는 결국 다수의견에 승복한다. 그리하여, 의거시간은 최종적으로 1927년 8월 1일 새벽으로 확정된다.

 

군영회췌(群英荟萃)의 폭동

 

남창기의에서 나중에 인민해방군의 장군들이 많이 나오게 된다. 1955년 계급을 수여받은 사람중에서 8명의 원수(元帥), 4명의 대장(大將)이 모두 남창기의와 관련된다. 여기에는 저우언라이등 계급을 부여받지 않은 저우언라이등 중공의 주요지도자들은 빼고서이다.

 

이 8명의 원수와 4명의 대장은 모두 직접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다. 1927년 8월 1일 새벽, 남창에서 기의작전을 지휘한 사람은 3명이다: 제20군 군장 허롱(賀龍); 지휘부 참모단 참모장 류보청(劉伯承); 제3군 군관교육단단장 겸 남창시 공안국장 주더(朱德). 8월 2일 아침에 회마령에서 다시 두 사람이 도착한다: 전위군위서기 녜롱전(聶榮臻); 제4군 25사 73단 3영 7연 연장 린뱌오(林彪). 8월 10일, 무한 중앙군사정치학교 정치부 준위문서를 맡고 있던 천이(陳毅)가 구강으로 달려온다. 의거때, 장파쿠이의 제2방면군내에 두명의 해방군 원수가 있었다: 예젠잉(葉劍英)과 쉬샹첸(徐向前). 기의전에, 쉬향첸은 당조직과 연락이 되지 않았었다. 기의가 발발한 후, 장파쿠이는 지휘부의 장교를 모아 선포했다: "CP(공산당)분자를 3일내는 보호한다. 3일이 지나면 책임지지 않는다". 그날 저녁 쉬샹첸은 몰래 구강을 떠나, 당조직을 찾아간다.

 

남창성에서 작전을 지휘했던 원수들과 비교하자면, 예젠잉의 "8.1"남창기의에 대한 공헌은 기밀사항이었다. 그리고 여러해동안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기의가 발발하기 전에, 당시 장파쿠이의 제2방면군 제4군 참모장을 맡고 있던 예젠잉은 장파쿠이등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허롱, 예팅등이 체포되고, 군권을 박탈당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즉시 예팅, 허롱, 료첸우(廖乾武)와 가오위한(高語罕)등 4명을 감당호에서 배를 타자고 약속한다. 바로 이 작은 배에서, 예팅, 허롱등은 자신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최종적으로 기의를 일으킬 결심을 굳힌다. 남창기의가 발발한 후, 장파쿠이의 수하에 있는 적지 않은 장교들이 병력을 동원하여 기의부대를 진압하자고 주장했다. 예젠잉은 다시 의견을 올려, 장파쿠이의 부대도 의거부대를 따라 광동으로 옮기자고 건의한다. "역도를 소탕하며 부대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광동을 차지해버리자는 것이었다. 장파쿠이는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이 건의를 채택한다. 바로 예젠잉의 이러한 건의가 있었기 때문에, 남창기의부대는 신속히 광동으로 남하하는 통로를 열 수 있었던 것이다.

 

남창기의에는 4명의 대장도 배출한다. 진갱(陳赓), 쑤위(粟裕), 쉬광다(許光達) 및 장윈이(張雲逸) 대장이 그들이다.

 

기의부대를 떠난 자와 배반한 자

 

1927년 9월, 기의군은 삼하패에서 병력을 나누어 주력은 저우언라이, 예팅, 허롱, 류보청이 이끌고 남하하여 광동 조산(潮汕)으로 간다. 주더는 군대를 이끌고 남아서 적을 막는다.

 

남창기의부대중 한명의 특수한 참가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기의가 실패한 후, 기의부대를 떠난다. 차이팅카이(蔡庭鍇)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첫째는 그가 국민혁명군 19로군을 이끌고 상해에서 일본군에 항거하였기 때문이고, 둘째는 1933년 그가 복건에 "중화인민공화국인민정부"를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7년 남창기의 부대에서 차이팅카이는 기의군 남하부대의 좌익총지휘였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차이팅카이는 우수한 군인이다. 다만 그가 남창기의에 참가한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당시 기의부대가 남하하는 도중 현현(賢縣)을 지날 때, 차이팅카이는 이 틈에 부대내의 공산당원을 정리하고, 부대를 이끌고 기의군을 벗어난다. 차이팅카이가 떠난 것은 기의부대의 남하계획에 심각한 좌절을 안긴다.

 

차이팅카이가 떠난 것과 비교하면 어우전(歐震)이 배반한 것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1927년 9월, 기의군은 광동조산으로 물러난다. 장제스(蔣介石) 휘하의 맹장 쉐웨(薛岳)는 부대를 이끌고 월군11사의 천지탕(陳濟棠) 부대와 협력하여 기의군을 공격한다. 쌍방은 탕갱에서 격전을 펼친다. 기의부대는 용감하게 싸워서 쉐웨의 4개부단을 궤멸시키고, 쉐웨의 사단지휘부를 포위한다. 쉐웨부대를 전멸시키기 직전의 중요한 순간에 기의군의 예팅부대의 영장인 어우전이 배반한다. 부대를 이끌고 적의 편에 선 것이다. 쉐웨는 이 기회를 틈타, 증원온 월군과 예팅의 기의군에 맹렬한 반격을 가한다. 탕갱의 전투에서 실패하면서, 기의부대는 남하하여 광동에 혁명근거지를 수립하고, 다시 북벌하려던 계획은 철저히 분쇄된다.

 

꺼지지 않는 불꽃

 

10월 3일, 유사(流沙)회의는 남창기의의 마지막 회의이다. 회의는 저우언라이가 주재했다. 당시 그는 열이 심했다. 궈모로(郭沫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저우언라이는 '안색이 파랬다'고 한다. 기의군이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한 간단히 검토한다. 모두 의견을 내놓을 때, 초병은 적의 첨병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여, 회의는 흐지부지 끝이 나고, 모두 대오를 나누어 철수했다. 혼란과정에서 저우언라이를 들것에 들고가던 대원도 이 기회에 도망쳐 버린다. 저우언라이의 곁에는 예팅과 녜롱전만이 남았다. 3명이 가진 무기라고는 예팅이 들고 있던 총 한자루뿐이었다. 세 사람은 작은 배를 타고 어렵게 홍콩으로 건너간다.

 

기의는 실패했다. 그러나 남긴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긴 불꽃의 핵심인물은 주더였다.

 

남창기의가 발발했을 때, 주더의 지위는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다. 그때 주더의 수하에 병사는 겨우 500도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하나의 영(營)이었다. 예팅, 허롱과는 차이가 컸다. 삼하패에서 적군을 저지하는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주더의 부대는 이미 절반으로 줄어있었다. 이때 다시 남하부대가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부대의 군심이 흩어지고, 각 간부들이 속속 부대를 떠났다.

 

그때느 정말 아주 심각한 시기였다. 천심우(天心圩)군인대회에서, 주더는 아주 침착하게 말했다: "대혁명은 실패했다. 우리의 기의군도 실패했다. 다만 우리는 그래도 혁명을 해야 한다. 동지들이여, 혁명을 할 사람은 나를 따르라, 혁명을 하지 않을 사람을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 억지로 남게 하지는 않겠다." "중국혁명은 현재 실패했다. 암흑시대이다. 그러나 암흑은 잠시이다. 중국에 1917이 있었다. 실력을 보존하면, 혁명은 방법이 있다. 여러분들도 이것을 믿어야 한다."

 

그후 부대는 종대로 개편되는데 모두 800명이었다. 이 부대는 중국인민해방군의 건군기초가 되고, 전투력의 핵심이 된다. 남창기의의 불꽃을 사그러들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