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미상
국가가 나서서 적국의 경제를 교란시키는 방법은 200여년전부터 존재했다. 미국독립전쟁기간중에 영국왕 조지3세는 일끼지 화폐를 위조시켜 식민지경제를 파괴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고, 프랑스대혁명기간동안에도 영국은 같은 수법을 반복하여 대량의 프랑스교회지산권을 위좐 바 있다. 동시에, 개인이 화폐를 위조하는 것은 사형에 처하는 범죄로 규정했다. 나폴레옹도 대량의 다른 나라 화폐를 위조한 바 있다. 1806년에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국가은행의 화폐원판을 몰수하도록 명령하고, 파리와 이탈리아등지에서 품질이 아주 뛰어난 오스트리아화폐를 위조한 바 있다. 그 후에 이 위폐로 오스트리아에서 물자를 구매했다. 프랑스와 러시아간에 전쟁이 벌어진 후에는 나폴레옹이 루불화를 위조한다.
2차대전에는 독일이 대량의 영국파운드화를 위조한다. 소위 "베른하르트 작전(Operation Bernhard)"에 따라 만들어진 위조지폐는 진짜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상, 2차대전시기에 다른 나라의 위조지폐를 만든 것은 독일만이 아니었다. 소련, 영국, 미국도 대량의 다른나라화폐를 위조한 바 있다. 여기에는 적국화폐와 피점령국가의 화폐가 포함되어 있었다. 체코,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의 화폐가 포함된다. 아래에서는 주로 2차대전중 중국과 일본간의 위폐전쟁을 소개하고자 한다.
1937년 7월 7일, 일본은 노구교사변을 일으켜, 전면적인 중국침략을 개시한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부의 육군최고지휘부참모본부는 일본특무기관에 명령을 내려, 일본군의 중국침략군사행동에 맞추어, 국민정부의 경제를 파괴하는 조치를 실시하도록 명령한다. 1938년말, 일본군은 자원, 병력등으로 인하여 중국에 대한 대규모 군사징공을 중단한다. 그리고 특무기구의 위조지폐발행은 정식으로 시행된다.
위조지폐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일본육군제9연구소("노보리토연구소")("登戶硏究所")의 주임이자 육군소좌인 야마모토(山本憲藏)였다. 노보리토연구소는 육군행정본부에 예속되어, 비밀무기의 개발을 책임지는 곳이었다. 야마모토는 일본육군회계학교를 제15기로 졸업한 후, 일본 관동준이 중국동북의 '만주국'으로 진입할 때 연구조사활동을 벌였다. 1938년 참모본부 제7과 병요지리반에 들어간다. 야마모토는 어려서부터 위조지폐를 만드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만주국에 있는 동안 중국의 화폐에 대하여 깊이있는 연구를 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중국내지, 만주, 조선의 화폐유통현황을 연구한다.
중국화폐의 혼란시기는 1935년에 끝이 난다. 국민당정부는 이해 11월 3일 화폐개혁공고를 내려, 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의 3개은행을 제외하고는 화폐를 발행할 수 없도록 한다(1936년에 농민은행이 추가된다). 동시에 은본위제를 채택하여 은원과 백은의 유통을 금지하고, 법정화폐는 영국파운드화와 연동시킨다. 1위안은 22.5 펜스에 해당하도록 한 것이다. 법정화폐제도는 상해의 외국금융기관으로부터 대량의 백은을 회수했을 뿐아니라, 몽고, 신강 및 화북자치운동을 벌이던 일본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은과 지방화폐는 더 이상 쓸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야마모토는 참모본부에 들어간 후 얼마되지 않아 화중지구로 법정화폐유통현황을 조사하러 간다. 그는 시중에 유통되는 법정화폐가 대부분 중앙은행, 교통은행 두 은행의 것임을 알았고, 인쇄소는 영국의 Thomas De La Rue회사와 Waterlow & Sons Ltd 그리고 미국조폐회사인 것을 알았냈다. 이들 화폐의 위조방지조치는 수인(水印)과 암기(暗記)였다. 일부 미국판 화폐에는 머리부위에 홍남색의 실선이 있었다. 위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중국본토의 위조화폐는 수단이 낙후하였기때문에 일반민중의 위조지폐에 대한 경계심도 크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일본에 돌아온 후 요판인쇄주식회사 사장 겸 파천조지주식회사 사장인 이노우에(井上源)을 만나서, 그의 구상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위조지폐를 만들 수 있겠는지 이노우에의 의견을 구한다. 이노우에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할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야마모토는 이 구상을 <<법정화폐모략공작계획>>으로 만들어 참모본부 제7과(중국과)에서 첩보를 주관하는 제8과로 넘긴다. 제8과는 이 계획을 본 후 아주 중시한다. 이건은 평소와는 달리 과장급의 제안이었지만, 바로 육군성으로 보내고, 최종적으로 육군대신 도조히데키(東條英機)가 직접 결재하여 시행토록 한다. 그때가 1938년 12월이었다.
도조히데키가 하달한 중국화폐위조명령은 다음과 같다:
첨부한 계획을 실행할 것. 육군대신 (서명), 참모총장 (서명) 소화13년 12월 x일
첨부: 대중국경제모략실시계획
방침: 장개석정권의 법정화폐제도파괴, 국내경제교란, 정권의경제항전역량훼멸
실시요령:
1. 본공작의 비밀명칭은 "모리(森)공작"으로 한다.
2. 본공작은 절대기밀을 요한다. 다음의 인원만 참여한다: 육군성대신, 차장, 군무국장, 군사과장; 주관인원; 참모본부총장, 차장, 제1부장, 제2부장, 제8과장, 주관참모 및 주관장교; 병기행정본부장, 총무부장, 기재과장
3. 모략기재의 제조는 육군제9과학연구소가 책임지고 제조한다. 필요에 따라, 대신의 비준을 받은 후, 민간공장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이용할 수 있다. 다만 절대 기밀을 유지해야 한다.
4. 노리모토연구소의 모략기재제조에 관한 명령은 육군성과 참모본부가 상의한 후 직접 노리모토연구소의 소장에게 하달한다.
5. 모략기재의 제조는 육군성과 참모본부가 직접 그 종류와 수량을 보고한다.
6. 참모본부는 육군성과 협상한 후, 모략기재의 교부지를 확정하고, 필요한 호송인원을 파견하며, 절대기밀문건으로 지정기관에 보낸다.
7. 중국에 본 모략의 실시기관을 설립한다. 비밀명칭은 "모리기관"으로 한다. 잠정적으로 본부는 상해에 두며, 대적무역의 중요지구 및 정보수집에 적절한 지역에 파견기구를 설치한다.
8. 본공작은 은밀히 진행한다. 주요목적은 적의 경제를 교란시키고, 위조지폐로 정상거래를 함으로써, 군수품과 민용품을 조달하는 것이다.
9. 획득한 물자는 군대가 규정한 가격으로 각각 제정한 군사보급공장에 공급한다. 획득한 돈은 법정화폐를 훼멸시키는 활동비로 쓴다. 별도의 명령이 있는 경우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10. "모리기관"은 "모리공작"의 활동을 상시적으로 이해하며, 매월월말 참모본부에 자금과 기재의 사용현황을 보고한다.
11. "모리기관"이 인쇄한 법정화폐의 20%는 활동경비로 남겨 자유롭게 사용한다.
이 명령에 근거하여, 야마모토는 참모본부에서 나와 노리모토연구소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 업무를 총괄한다. 동시에 상해에 "모리기관"의 본부를 설립하는데, "사카다(阪田)기관"이라고도 한다. 책임자닌 사카다(阪田誠盛)은 관동군 참모본부에서 일했었다. 1937년 참모본부로 돌아와서 일을 하고 있었다. 1939년 사카다는 명의상 등록자본금이 1억엔으로 하여 중국에 "성달(誠達)공사"를 만든다. 이 회사는 점령지역에 53개의 지점을 내는데, 실제로 중국에서 경제전을 실시하는 기관이었다.
처음에 야마모토, 이노우에는 5위안짜리 지폐를 실험대상으로 한다. 그들은 5위안짜리 화폐의 인판을 제작하여, 수십만위안의 위폐완성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신속히 중국으로 보내어 물자를 구매한다. 야마모토등이 환호작약하고 있을 때, 중국에서 그들이 깜짝놀랄 소식이 날아든다: 위조한 5위안의 지폐는 일찌기 유통되지 않고 있는 죽은 지폐라는 것이다. 첫번째 위폐계획은 이로써 무산된다. 야마모토와 이노우에는 이로 인하여 상사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는다.
1940년 4월, 야마모토는 다시 중국농민은행의 1위안, 5위안, 10위안짜리 합계 500여만위안을 위조한다. 그리고 특수공법으로 헌돈인 것처럼 만든다. 그리고, 비밀리에 중국으로 운송해서, 진짜화폐와 섞어서 일본의 중국내 기관과 '상사'등에 주어 사용하게 한다. 이들 상사들 중에는 "매기관(梅機關)", 상해화신(華新)공사, 민화(民華)공사, 성달공사 및 광동의 "송림당(松林黨)"등이 있다. 이들 위조지폐는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일본의 물자구입과 중국금융질서파괴 및 일분군비를 확보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당시 이미 촬영인쇄의 기법이 나와 있기는 했지만, 노리모토연구소는 이런 기술로 인쇄하면 외조효과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조판인쇄방식을 사용한다. 군측은 대장성 조폐국에서 비밀리에 2명의 조판기술자를 불러들여, 확대정으로 줄하나하나를 모두 인판에 사람모습, 꽃무늬 기타 도안을 새기게 했다. 법정화폐는 미국식 규격을 사용하여, 유럽식처럼 복잡한 바탕무늬는 없었다. 그리하여 정면만 요판으로 하고 뒷면은 평판으로 인쇄하였다. 여러번의 시험과 실패를 거쳐, 노리모토연구소는 태평양전쟁 발발전날 합격품의 위조지폐를 만들게 된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지 얼마되지 않아, 일본은 홍콩을 점령한다. 일본특고과는 국민정부가 홍콩에 만든 조폐창, 조폐기기와 아직 운반하지 못한 나머지 기계들을 몰수한다. 그리고 홍콩구룡 중화서국에서 최근에 인쇄한 중국중앙은행이 발행한 10위안 액면의 지폐와 인쇄기기를 발견한다. 일본군은 곧이어 상무인서관에서 중국교통은행의 5위안 액면지폐의 반제품과 인쇄기, 법정화폐번호등등을 발견한다. 이것들은 비밀리에 동경의 "육군제9과학연구소"로 보내어진다. 1942년 하반기에 일본은 남양점령군이 다시 20억위안의 중국은행 소액화폐 반제품을 획득한다. 그후 독일해군은 태평양에서 미국상선을 붙잡아, 미국조폐공사가 중국교통은행을 위하여 인쇄한 반제품 10여억위안을 빼앗는다. 일본은 독일로부터 이 반제품을 구매해온다. 이제 일본은 화폐제조에 대한 모든 비밀을 장악하게 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모두 40억위안의 위조지폐를 만들어낸다.
일본군은 국민정부의 금융질서를 교란시키는 동시에,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 신사군이 장악한 항일근거지에서도 위조지폐를 만든다. 진기로예변구에서 발견한 위조지폐는 2,30종에 이른다. 1943년 일본군은 산동에서 대량의 북해은행권을 위조하고, 공산당점령지역에 가지고 들어와서 양식과 기타 물자를 사갔다.
처음에 일본의 위조지폐는 중국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주로 항전초기에 법정화폐는 어느 정도 위신이 있었으므로, 일본은 위조지폐로 중국에서 적지 않은 물자를 살 수 있었따. 그중 "모리기관"은 사카다회사를 중개로 하여, 홍콩으로 도망한 상해흑사회두목 두월생등으로부터 홍콩에서 기름과 키니네등 희귀물품을 구매했다.
다만, 이때 법정화폐유통에 변화가 발생한다. 일본의 미친듯한 공격으로 중국의 절반이 일본에 함락된다. 국민정부는 점차 서남의 후방으로 물러난다. 당시 4대은행이 발행한 지폐는 주로 홍콩을 통하여 중국에 들어왔는데, 화남과 홍콩이 함락된 후, 이 통로는 갈수록 불편해졌다. 공상희는 중앙신탁국에 명령하여 화폐인쇄사무처를 만든다. 그리고 방공동에서 지폐를 찍어내도록 한다. 그리고, 중경에 조폐공장을 만들도록 준비한다. 1941년, 중경재정부 인쇄국이 중경조폐공장을 만들고, 법정화폐를 모조리 바꾸어버린다. 그리고, 일본의 위조지폐가 효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국민당의 화폐는 미친듯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7년간, 국민당의 화폐발행량은 100배가 늘어난다. 그리하여 1890억위안에 이른다. 그리하여 일본의 위조지폐는 경제를 교란시키는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야마모토는 "중국은 정말 보면볼수록 감탄할 수밖에 없는 국가이다"라고 한탄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위조지폐에 대응하여, 국민정부도 "이가대가(以假對假, 가짜로 가짜에 대응한다)"는 책략을 쓴다. 상대방이 하는대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것이다. 국민정부는 군통국에 영, 미의 양대 조폐회사와 합작계약을 체결하여, 비밀리에 중경의 가락산에 일본의 지폐를 위조하는 공장을 만든다. "이가대가"의 책략이 순조롭게 실시되게 하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큰 돈을 들여서 미국으로부터 종이와 가장 선진적인 인쇄설비를 구입한다. 그리고 원래의 중국조폐공장의 기술자들을 가락산에 모아서 밤낮으로 연구하게 한다.
당시 일본에서 유통되던 것은 각종 액면의 일본화폐, 친일정부화폐 및 군용표였다. 일본군이 신판화폐를 발행할 때, 대립은 왕정위정부의 주불해로부터 친일정부은행의 인쇄원판을 얻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락산으로 가져와서 복제하여 밤낮으로 인쇄했는데, 모두 15000상자에 달했다. 그 후에 완성품을 강서 상요로 보내어 교통부의 협조하에 계속 왕정위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으로 흘러가게 했다. 이 위조지폐는 진짜지폐와 똑같아서, 전문가조차 감별하기 어려웠다. 국민정부는 위조지폐를 통하여 대략의 황금, 면사, 포필(布匹)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점령지역의 금융질서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통화팽창이 날로 극심해진다. 1944년, '대적경제작전실'이 문을 닫고, 위조지폐업무도 중단된다.
국민당은 일본엔화는 위조하지 않았다. 주로 친일정부의 지폐와 군용표를 위조했었다. 당시 일본의 유일한 화폐발행은행은 일본은행인데, 일본엔화에 사용하는 지폐는 약간의 일본특유의 식물섬유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위조하기가 쉽지 않았다.
'중국과 역사사건 > 역사사건 (민국 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우당(金牛黨)사건: 민국최대의 금융사건 (0) | 2009.03.06 |
---|---|
장춘(長春)이 만주국의 수도로 된 경위는? (0) | 2009.01.23 |
남창기의(南昌起義):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0) | 2009.01.11 |
서안사변(西安事變)의 또 다른 해석 (0) | 2009.01.07 |
요녕심양전투(遼瀋戰役)의 세 가지 수수께끼 (0) | 2008.10.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