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위지(白偉志)
2007년 12월 1일, 북경의 인민대회당.
중국외교부장 양제츠(楊潔篪)와 일본외상 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는 당해년도 대중국엔화차관에 대한 정부교환문서에 서명하였다. "이번 건은 460억엔의 차관이며, 중국의 6개 환경보호프로젝트의 건설에 사용될 것입니다" 조인식이 끝난 후, 일본 외무성 공보관인 사카마 미쓰오(坂場三男)는 "이것은 일본이 중국에 제공하는 저리장기차관중 마지막이다"
일본의 대중국정부개발원조(즉,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아래에서는 "ODA"라 함)의 주체로서 엔화차관은 1979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해 겨울, 일본수상인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가 중국을 방문하고, ODA의 대문을 열었다. 이후 20여년간, 일본은 저리, 장기의 우대조건으로, 중국에 누계금액 3조2천억엔(미화 약300억달러)에 이르는 차관을 제공했다. 그리고, 29년이 지나서 이제는 끝이 나게 되었다.
"ODA는 확실히 큰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 일본연구소 부소장이며, 일본의 대중국ODA문제에 대한 전문가인 김희덕(金熙德)은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어떤 대형공사이든 엔화대출의 그림자가 없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확실히 20세기 팔구십년대에 중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관건적인 단계에서, 엔화차관은 중국이라는 방대한 비행기에 끊임없이 연료를 주입해주었고, 계속 하늘로 치솟아오르는 동력을 마련해주었다.
아마도 이것때문에, 일본매체들의 태도는 미묘할 수 있다. <<요미우리신문>>은 사설을 통하여: "중국인에게 감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인들이 기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나, 30년에 이르는 일본의 대중국 ODA의 길을 되돌아보면 중국인들도 마찬가지로 미묘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배상금의 변종
엔화차관계획을 얘기하자면, 일본의 말하기 힘든 숨은 문제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전쟁배상금
1951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냉전의 차가운 커튼이 내려진 상황에서, 미국은 일본이라는 원동의 교두보에 주권지위를 되돌려주기로 결정한다. 그해 9월, 52개국가의 대표가 샌프란시스코에 모여, 대일평화회의를 진행한다. 소련,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참가국들은 <<샌프란시스코평화협정>>에 서명한다. 이 평화협정은 일본의 피점령시대를 마감하게 할 뿐아니라, 군사동맹을 기초로 한 미일관계를 확립하게 된다. 조약의 제14조에서는 특별규정을 두는데, 협정참가국들이 "일본에 대하여 전쟁배상금을 청구할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다만, 이 평화협정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고, 철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중국은 승인을 거절했다. 필리핀은 평화회의를 거부했고, 북한, 버마, 몽고, 월남, 인도네시아등의 아시아국가들도 속속 반대를 표명했다. 이는 일본의 아시아외교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잠재적인 영향은 지금까지도 미치고 있다.
엔화차관계획을 불러온 또 다른 요소는 해외시장의 유혹이었다. 1954년, 일본의 각종 경제지표는 이미 전쟁전 수준을 넘어섰다. 해외자원을 획득하고, 다시 해외시장으로 나가는 것이 급선무가 된다. 그러나, 인구는 많고, 공업은 낙후한 동아시아는 더더구나 저원가상품의 덤핑시자이었다. 이렇다보니, <<샌프란시스코평화협정>>은 일본이 이들 시장을 점령하는데 오히려 장애로 등장한다.
그리하여, 1954년, 일본은 영국이 주도하는 동남아를 원조하는 목적을 지닌 콜롬보계획에 가담한다. 이후, 일본은 각개격파, 개별대우의 전략을 가지고, 아시아의 굳은 얼음을 깨고자 시도한다. 태도가 강경하고, 배상을 고집하는 국가들 예를 들면,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베트남에 대하여는 순차적으로 배상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배상을 포기한 나라들, 예를 들면,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한구등에 대하여는 준배상협정을 체결하여 무상원조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1958년 2월, 새롭고 그럴듯한 수법이 등장한다: 일본은 인도네시아와 엔화차관협정을 체결한다. 최소한 명의상으로는 전쟁배상과 무관한 정부간 원조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무상원조"와 마찬가지로, 엔화차관은 전쟁배상의 변종중 하나이다. 배상, '무상원조' 및 엔화차관을 가지고, 이후 십여년간 일본은 아시아 각국을 공략한다. 70년대 초에 이르러, 일본은 이미 미국에 다음가는 세계적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주유엔대사이며 장기간 배상협상에 참가했던 나카가와(中川融)은 솔직하게 말한 바 있다: "전쟁배상과 경제원조를 결합하여, 결과적으로 보면, 우리나라(일본)의 무역을 확대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마침내, 1970년대초에 일본은 눈을 중국으로 돌린다.
신청원칙이 정치문제에 저촉됨
다른 아시아국가와는 달리 수교협상에서, "중일양국인민의 우호관계를 위하여, 일본국에 대한 전쟁배상요구를 포기하며..."이는 중일수교전후의 북경이 보인 3대입장표명이었다. 이런 입장표명은 수교의 발걸음을 가속화시켰고, 후세에 논쟁거리를 남기는 것이었다.
사실 이런 입장표명이 중국의사결정자들의 고심의 결과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독하고 분노한 한 거인." 20여년이후 닉슨이 당시의 중국을 이렇게 표현했다. 만일 바로 이렇게 봉쇄되고 잊혀져서, 이 거인이 이처럼 분노했다면, 받아들여지고, 인정될 기회가 왔다면 당연히 자제해야 한다. 중일수교문제에 있어서, 현실적인 고려가 더욱 컸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이때, 중국의 외환보유고는 부족했고, 일본에서 수입하는 강철, 화학비료와 플랜트설비는 아주 필요했다. 중일무역은 소리소문없이 그러나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중국은 시종 부족한 석유자원을 가지고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바꾸었다.
등소평이 다시 나온 초기에도 이러했다. 1975년 8월 18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수입하려면 더 많은 물건을 수출해야 한다...대대적으로 석유를 개발채굴하고, 가능한한 더 많이 수출해야 한다. 석탄도 수출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1978년 2월, 도시바(東芝)회사의 회장이며, '경영의 신'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던 도고 도시오(土光敏夫)가 일본 게이단렌(經團聯)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으며, <<중일장기경제협정>>을 체결한 후, 중국부총리 이선념이 그를 접견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이때 발생한다. 이선념이 중국은 일본의 자금이 아주 필요한데, '이율이 너무 높다'고 말한 것이다.
일본대표단의 구성원이자 강철대왕인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는 이 정보를 귀담아 들었다. 그는 즉석에서, 엔화차관계획의 OECF(일본해외경제협력기금)을 저리, 장기의 우대조건으로 중국에 힘닫는데까지 도움을 제공하겠다고 말한다.
이에 대하여, 중국측은 흥미를 나타낸다. 심지어 이를 의사일정에까지 넣었다. 그러나, 이나야마가 ODA에 관한 사항, 특히 '신청원칙'(즉,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먼저 차관제공신청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하자, 이 계획은 물건너간 것으로 보였다. 이는 굳게 지켜오고 수십년간 강조해온 '자력갱생'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 소련이 대중국원조협정을 파기하여, 중국경제건설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중국은 '대외원조'에 대하여 나쁜 인상을 가지게 된다. 이후 중국은 '외국의 차관, 투자, 원조를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하고, '국내채무도 없고, 대외채무도 없다'는 정책을 정하게 된다.
"그 당시에는 국내채무도 없지만, 외채도 없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이는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유지성은 제1차 엔화차관프로젝트의 협상에 참가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후 12년간 중국수석대표로 일본의 대중국 ODA프로젝트를 담당한 관리이다. 당시, '자력갱생'에 도전하는 것은 이미 절대화된 의식상의 터부를 부수는 일이었다. 여기에 따른 압력이 얼마나 컸을지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1978년 10월 등소평이 일본을 방문하고서야 ODA프로젝트에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방일초기에 등소평의 태도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모호했다. 제1차 기자회견에서 그는 "일본정부가 우리에게 차관을 제공하는 형식을 우리는 아직 고려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아후 이에 대하여 연구는 해보겠다"고 말한다.
'고려하고 있지 않다' '연구는 해보겠다'는 의사표명을 보면, 아직도 실현되기에는 멀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신간센을 타고 일본의 절반을 둘러보고, 북경에 돌아오자, 태도가 급격히 바뀌었다. 11월 26일, 일본 민사당위원장 사사키 고조(佐佐木更三)를 만났을 때, 등소평은 적극적으로 언급한다: "도고 도시오 선생이 나에게 말했었다. 고액대출은 정부간에 진행해야 하고, 민간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정부간에 해결해야 한다"
사사키 고조는 탐색하듯이 물었다: "그렇다면, 중국은 정부차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등소평은 아무런 망설임없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다음해 봄, 한 중국원로가 선진국에서 기술과 자금을 가져오는 것을 고려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중국의 주권이 침해되면' 안된다는 전제하에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등소평은 다르게 말했다. 그는 ODA는 정치문제가 아니라 경제문제라고 하였다. "상환능력만 있다면, 300억달러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고집하에, 1979년 5월 31일, 중국정부는 이전의 긍지에 반하여, 적극적으로 엔화차관프로젝트를 신천한다. 그리고 '일본측에서 연구해주기를 희망했다'
몇달후, 9월 1일, 곡목(谷牧) 부총리의 방일기간동안, 정식으로 구체적인 엔화차관방안을 제기한다. 차관총액은 1.2조엔(약 55.4억달러)이며, 이는 3개의 수력발전수, 3개노선의 철로와 2개의 항구를 포함한 8개의 대형프로젝트였다.
국무원 부총리인 곡목의 방일기간동안 각각 수상인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인 소노다 스다오(園田直), 대장상인 가네코(金子), 통산상인 에자키(江崎), 경제기획청장관인 코사카(小坂)등 정계요인들과 회담을 하고, 게이단렌, 일중경제협회, 일본국제무역촉진회등의 경제계인사들과도 좌담을 개최했다. 그리고 각계에 농업, 경공업, 에너지, 교통운수등 부문건설을 중점으로 한 일본경제건설기본방침을 알린다. 그리고, 중국경제건설은 주로 '자력갱생'을 위주로 하지만, 외자사용도 배제하지 않으며, 주권에 해만 끼치지 않고, 조건이 맞으면, 모든 우호국가로부터의 차관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일본정부도 중국의 현대화건설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줄 것을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파란만장
중국정부가 엔화차관을 정식신청한 후, 1979년 9월 6일, 제88차 국회중의원회의에서, 공명당 의원인 다케이리 요시카츠(竹入義勝)이 일본정부의 일중경제협력의 기본태도 및 중국측이 제기한 엔화차관요청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등의 문제에 대하여 질의했다.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은 답변을 통하여, "이웃나라인 중국의 경제건설에 대하여 진행하는 경제협력은 내 새악에 3개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 첫째, 우리나라는 구미등 선진국과 서로 협력한다. 둘째, 아세안등 기타 아시아각국과 균형을 맞춘다. 셋째, 군사협력은 진행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오히라 마사요시가 제출한 삼원칙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뜻은 세 가지였다. 구미등 국가가 일본이 중국시장을 독점하려는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켜야 하고, 일본 ODA를 가장 많이 받아왔던 동남아 각국을 다독거려야 하고, 국내의 대중국차관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보수파를 돌보아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미국은 국내법률규제와 재정부족으로 중국에 대하여 장기저리의 차관을 제공할 뜻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동향에 관심을 많이 가졌다. 그리고 일본이 먼저 중국에 엔화차관을 제공하는데 대하여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1979년 10월에 워싱턴에서 개최된 일미원조정책계획회의에서 일본측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일본에 만일 엔화차관이 '비구속적'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으면, 새로운 미일경제마찰이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소위 '비구속적'이라는 것은 일본엔화차관을 중국에 주면 중국은 이 차관을 가지고 미국의 제품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일본이 이를 막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세안 각국은 속속 우려와 항의를 표명했다. 일본의 대중국엔화차관은 자기들에 대한 원조를 대폭 삭감하게 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더구나 중국이 이를 가지고 강력한 무역경쟁상대가 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대하여, 등소평은 1979년 10월 9일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일본의 아세안에 대한 관심이 아주 크다. 중일관계가 심화되는 것이 일본과 아세안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소련도 이에 대하여 일본을 괴롭혔다. 일본의 대중국엔화차관을 '극히 주목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이후 일본에 대하여 소련에도 중국과 동등한 우대자금의 제공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히라 마사요시가 중국방문을 마친 후, 소련당국은 엔화차관에 대하여 일본에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였다.
일시에 일본정부는 국제적으로 커다란 압력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방문후 귀국하는 비행기상에서 하타 쓰토무(羽田孜)는 오히라 마사요시에게 "대중국 엔화차관으로 일본은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서 아주 미묘하게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말하게 된다.
이러했지만, 중일양국은 엔화차관에 대하여 계속 거리를 좁혀갔다.
1979년 9월 19일, 일본정부는 외무성 경제합작국국장인 양정신일(梁井新一)을 단장으로 하여, 외무, 대장, 통산, 경제기획청, 운수등 5성청의 14명의 대표로 구성된 정부조사단을 중국에 보낸다. 그리고 중국이 제출한 "엔화차관"프로젝트에 대한 현지조사를 실시한다. 조사단은 오히라 '삼원칙'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중국측에 엔화차관 프로젝트에 대한 각종 자료와 데이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하여 중국측은 전면적으로 협력했다.
조사단은 중국측에 일본의 대외원조제도상 이 프로젝트의 '내자'부분에 대하여는 엔화차관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했고, 그저 건설프로젝트에서 '외자'부분만을 엔화차관의 원조대상으로 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예산제한이 있어, 일본정부는 중국측이 제출한 엔화차관금액에 대하여 대폭 삭감되거나 조정될 수 있으므로, 중국측이 다시 '내자'를 포함하지 아니한 엔화차관신청방안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곡목 부총리는 그자리에서 '내자부분'은 중국측이 책임지고 조달할 것이고, 신청금액을 감소시키겠다고 동의하였다.
반복된 협상을 통해, 10월 8일, 일본조사단은 북경에서 기자회견을 개최한다. 그리고 중국측이 제출한 금액에는 중국측의 '내자'부분이 들어 있어서, 일본측은 실제차관금액을 대폭 삭감하고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와 동시에, 중국측은 일본의 건의에 따라, 그리고 국제관례에 따라, 8개프로젝트의 약 30%를 내자부분으로 하고, 일본정부에는 '외자'부분에 대하여만 엔화차관을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일본조사단은 중국측이 새로 제출한 방안을 가지고 귀국한다. 일본정부의 관련 성은 대중국엔화차관정책을 둘러싸고 특히 12월초에 오히라의 중국방문에서 중국측에 차관의 구체적인 금액을 얘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 그리고 아세안과 구미의 반응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가지고, 격렬하게 토론이 벌어진다.
외무성은 적극적으로 대중국차관을 주장한다. 통산성은 에너지의 각도에서 출방하여 최대한 중국의 차관요청을 만족시켜주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의 재정권을 쥐고 있는 대장성은 재정곤란을 이유로, 중국측이 신청한 차관액을 대폭 삭감할 것을 주장한다.
각 성들간에 이견으로 컨센서스를 이루는데 지지부진하자, 자민당내부의 '신중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11월 29일, 지만당의원인 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郞), 후지오(藤尾正形), 고지(玉置和郞)등은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은 원조를 할만한 약소국이 아니다. 핵무기를 지닌 군사대국이다. 그리고 아프리카에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중국을 원조하는 것은 소련을 자극하는 것이고, 동남아각국을 자극하는 것이다"
이때, 12월 5일 오히라 마사요시의 중국방문일자는 하루하루 다가왔다. 수상중국방문의 가장 중요한 안건인 대중국엔화차관에 대하여 지지부진하게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라 마사요시의 심정이 얼마나 조급했을지는 상상이 간다. 개인적으로, 중국에 대하여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힘을 다하여 이 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11월 30일 오후, 오히라 마사요시는 모든 정부주요부서의 책임관료를 모아서 반드시 대중국차관방안을 내놓도록 독촉한다. 회의는 심야까지 계속되고, 결국 컨센서스를 이루었다.
1979년 12월 5일, 일본수상 오히라 마사요시는 엔화차관이라는 '선물'을 가지고 예정대로 중국을 방문한다. 중일쌍방은 정식으로 제1차 엔화차관을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집행하고, 차관총액은 3309억엔(미화15억달러)가 되도록 합의하였다. 이율은 연3%였다. 첫10년은 이자만 갚고 원금은 갚지 않는다. 나중에 20년간 원리금을 함께 갚는다.
"통화팽창등의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엔화차관의 실제증여성분은 57%이다" 유지성의 말이다. 일본이 적극적으로 대중국차관을 추진한 목적은, "OECD가입국으로서, 일본은 원조의무가 있다. 이외에 당연히 경제적인 고려도 있다"
대중국차관이 민간이 추측하는 것처럼 "변형된 전쟁배상금"인지? 유지성의 대답은 "당시에 우리는 사사로이는 분석하고 논의하였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건의 성격은 경제협력이다"
합작의 다리
1980년 4월, 49세의 유지성은 당시 국가건설위원회 판공실 주임인 장전과 동경에 파견되어 교육을 받는다. ODA프로젝트의 자금원, 차관절차, 프로젝트선택, 차관조건, 구매방향, 지급절차 및 관련법률법규등이었다.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 유지성은 거리낌없이 당시 외부세계에 대한 생경함을 드러냈다. 그러나, 일본의 땅을 밟는 순간부터 그물같이 밀집된 고속도로, 사통팔달의 신간센, 번화한 도시, 문화적이고 예절을 지키는 사회기풍...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들은 깜짝 놀란다.
"나는 당시에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너무나 낙후되었구나. 언제나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항상 이렇게 자문했다" 그리고 이후 1개월간 유지성은 거의 모든 쉬는 시간을 이용하여 신간센을 타고 동경에서 오사카, 고베, 나카사키등의 도시를 가서 마쓰시다, 시마즈, 토요타등의 대형기업을 시찰했다. 선진적인 공업기술과 일본인의 근로는 그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나는 한 어업가공공장에서 모두 6,7십된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았다. 그들은 광주리의 물고기를 컨베이어벨트에 늘어놓는데 전혀 흐트러지지 않게 하였다. 이 민족은 절망 너무나 열심히 일하고 너무나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바로 이 경력은 유지성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ODA에 거대한 열정과 정력을 투입하도록 한다. 그들은 엔화차관이 당시 중국의 경제발전에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를 잘 알았던 것이다.
최초로 이 일에 대하여 전권을 부여받은 사람은 국가외자위 부주임 사북일(謝北一)이고, 유지성은 그의 조수가 되었다. 그들은 번잡한 절차와 왕래를 통하여 결국 첫해에 500억엔의 차관을 실행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집행하려니, 다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애와 곤란이 있었다.
"가장 주요한 문제는 국내의 관련자금이 부족한 것이었다. 중국측은 계속 계획을 바꾸었다. 쌍방이 확정한 제1차 6개 프로젝트가 4개로 줄었다; 다음으로는 일부 지도자들이 차관은 돈을 끌어와서 국내에 사용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이용하여 기술장비를 사서 국내건설을 이루려고 하지 않았다..." 유지성은 회고에서, 국제관례에 부합하지 않는 조치와 구체적인 절차과정의 번잡함으로 이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한밤중까지 고생하도록 만들었다. 1982년의 어느날, 사북일은 사무실책상에 쓰러진다. "과로사였다. 심근경색이다. 동료가 사무실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발견했다..." 유지성은 이 일을 언급하면서 표정이 암담했다.
비록 여러 곤란이 있었지만, 당시 고위층부터 지방까지, 그리고 일본측의 전면적인 협력하에, 장애는 하나하나 해결되었다. 합작의 추세는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여러해 후, 일본해외경제협력기금 OECF 주중국수석대표인 다케우치(竹內克之)는 그 당시를 회고하면서 역시 감개무량해 하였다: "80년대초, 나는 흑룡강성의 기차제조공장을 시찰할 때, 중국정부가 우리에게 바로 산해관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현장에 도착한 후, 한밤중까지 담판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쌍방은 해결방안을 찾아냈다. 프로젝트준공전에 맞추어 문제를 해결했다. 지금 당시의 상황을 회고해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당시 일본국내에서 여론과 민간의 목소리는 모두 일방적이었다. 모두 이렇게 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학자인 김희덕의 말이다. "다만, 보상심리외에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고려했다...장기적으로 중국의 에너지를 수입하는데 기대가 컸고, 이것이 대중국엔화대출을 하게 된 중요한 이유의 하나이다"
바로 이러하였기 때문에 1979년에서 1983년까지, 엔화차관은 모두 석탄개발의 6개 운송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이들 프로젝트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일본에 대한 에너지수출과 관련되었다. 석유위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일본은 에너지진통의 시대를 실감하고 있었고, 대중국 ODA는 일본의 에너지보장에 의미가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대중국ODA의 주요제공국으로서 일본은 중국 조야의 보편적인 호감을 얻었다. 일시에, '중일우호'는 정부에서 민간까지 손쉽게 들을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대대손손'의 말까지도 나왔다. 그리고 이러한 조류는 일본고아의 귀국, 옛 노병의 참회, 그리고 3천청년학생의 중국방문등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민간의 분위기는 이 중일관계사에 있어서 드물게 보는 황금시기를 잘 부각시켰다
이런 분위기하에서, 1984년 3월, 6년기한의 총액 4700만엔의 제2차 ODA차관협정이 순조롭게 체결된다; 이후, 1988년 8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수장은 제3차로 8100억엔에 이르는 차관을 약속한다. 특히 언급할 것은 세계에너지형세가 호전되는 상황하에서 이들 차관은 전부 중국의 인프라건설프로젝트로 투입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엔화차관은 중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만일, 차관은 어쨌든 차관이고, 이자와 원금을 갚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대중국 ODA리스트에 있는 무상원조는 일부 중국인들에게 지금도 생각에 잠기게 한다. 1981년부터, 중일우호병원을 포함하여, 교육, 의료, 농업, 환경보호의 4개영역에 걸친 98개 프로젝트는 ODA의 구성부분이 된다. 이후 20년간, 일본은 모두 중국에 1297억엔의 무상원조를 제공하는데, 대체로 ODA총액의 4%에 상당한다.
그런데, 제3차 엔화차관협정이 체결된 지 얼마지나지 않아, 불협화음이 나타난다.
계륵의 곤혹
1989년 여름, 중국은 서방 몇개국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7월 14일, 일본도 거기에 가담한다. 각종 제재수단중에는 대중국 ODA가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은 일방적으로 ODA프로젝트의 동결을 선언한다.
그래도, 일본은 대중국ODA의 길을 철저히 단절시키지는 않았다. 그 해, 유지성은 일본으로 가서 예전처럼 협약을 체결하지는 않았다. 일본정부의 파견대표인 하타네나카 아츠시(畠中篤)이 북경으로 왔다. "그해 푸싱먼(復興門)에서 팔왕분까지 지하철을 착공했다. 사용된 것은 1989년의 엔화차관이었다. 하타네나카 아츠시는 착공식에 참석했다. 이는 일본정부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지성의 말이다.
그러나, 이후, 일본의 대중국ODA는 갈수록 순조롭지 못했다. 1992년 6월 30일, 서방세계가 중국에 대하여 동결을 속속 해제하고 중국은 시장경제시대로 더욱 진입하고 있었다. 이날, 일본수장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는 <
1990년이 되어, 일본은 여러차례 ODA를 협박수단으로 쓴다. 이미 중국인들에게 엔화차관을 계륵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조야에서는 ODA에 대한 이견이 갈수록 많아졌다.
2004년 11월 28일, 한 기자회견에서, 일본수상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공개적으로 표시한다. 대중국ODA는 이미 졸업할 시기가 되었다.
한 지방대학의 경제학교수는 공공연히 단언했다. 대중국ODA는 '하나의 전형적인 실패사례이다". 이 교수는 현지조사를 하지 않았고, 그가 인용한 사례중에는 이런 주장도 있다: "북경의 지하철건설은 개략 200억엔을 사용했다. 다만, 2호선을 건설한 후, 기자...건국문 역에서 1시간을 기다려도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북경지하철의 인산인해의 장면과 대조해보면, 이 사례는 헛소리임에 분명하다. 다만, 이는 바로 일본 보통학자의 엔화차관에 대한 오해를 반영하는 것이다.
"실패론" 이외에, "부지감은론(감사한 줄 모른다)"이 더욱 크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갔다. 2001년, 산케이신문의 중국총국장을 지낸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는 <<북경은 일본의 원조를 받아 오사카를 격패시키고 올림픽을 따내다>>라는 글을 통해 일본정부의 대중국원조정책을 비난했다: "과거의 20여년동안, 일본은 북경에 약 4000억엔의 거액원조를 투입했고, 인프라시설은 새모습으로 바뀌었다. 오사카시민에 있어서, 가장 풍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자기가 납부한 세금이 올림픽신청실패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중국ODA는 일본매체가 오랫동안 써오든 이슈이다. 매번 중일간의 외교마찰이 일어날 때마다. 매체는 대중국ODA를 꺼집어내서 한바탕 떠들었다..." 한 연구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의 주요한 공격포인트는 중국이 감사의 표현을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또한 비정에 호소하고, 중국에 대한 원조가 민간의 세금에서 나온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 모든 세금을 부담하는 주체는 바로 일본의 젊은 세대라는 것이다..."
2003년, 프리랜서작가인 아오키 나오토(靑木直人)는 일본의 대화원조는 일부 '친중국' 정치가의 중국지도자에 대한 정치헌금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중국은 6조엔에 이르는 일본국민의 혈세로 원조를 받고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국민들에게 일본의 대중국원조진상을 은폐하고, 지속적으로 반일선전을 계속한다고 하였다.
2005년 3월, 요미우리신문은 심지어, 대중국ODA는 군비를 확장하는데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하였다.
이에,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은원이 교차하는 두 국가에 있어서, 원래 중일화해에 기여했고, 상호도움을 심화시켰던 ODA는 반대로 더욱 깊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2007년 12월, 일본의 신임수상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가 중국방문하기 전날, 중일양국의 외상은 마지막 엔화차관에 대한 교환문건에 서명한다. 이전에, 일본정부는 대중국ODA를 중단하기로 결정할 때, 중국의 외교차관 우다웨이(武大偉)는 이미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그러나 이날, 양제츠가 엔화차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기는 했지만, 일본 교도사는 양제츠가 '감사'라는 두 말을 꺼내지 않은 점에 주목했다. 이는 쌍방간의 인식에 있어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29년전, 등소평이 동경을 방문해서, 대중국ODA를 시작할 때, 그를 맞이한 일본수상의 이름은 후쿠다 다케오(福田糾夫)였다. 그는 바로 후쿠다 야스오의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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