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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한국/한중관계

북한에 3개월 체류한 중국엔지니어의 북한인상

by 중은우시 2008. 9. 5.

작자: 미상

 

나의 할아버지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전사였다. 할아버지는 부대원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서 돌아온 영웅이었다. 지원군의 후손으로, 나는 북한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2008년 5월 나는 직장에서 파견을 받아 단동을 통하여 출국하여 북한의 모 프로젝트공사에서 기술업무를 수행했다. 근 3개월간의 일을 마치고 귀국했다. 이제 내가 본 북한을 얘기하고자 한다.

 

1. 북한경내에 입국한 첫번째 인상: 시간이 30년은 거슬러 올라간 것같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국경을 벗어나 북한으로 들어갔다. 단동 기차역에서 출발한 후, 기차는 몇 분만에 압록강대교를 지나서, 중국단동과 강을 하나 사이에둔 북한의 신의주로 들어갔다. 북한의 수도 평양으로 가는 길에서, 보이는 건물은 모두 낡아빠졌다. 타일로 외벽을 장식한 집은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심을 수 있는 땅에는 거의 모두 뭔가가 심어져 있었다.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은 누런색, 흑회색의 옷을 입고 있어 아주 소박해 보였고, 우리가 받은 인상은 중국의 6,70년대의 모습이었다.

 

단동시는 중국의 보통 변경도시인데, 압록강의 건너편에서 보니, 높은 빌딩이 솟아있다. 예전에 사구에서 홍콩을 바라볼 때의 느낌이다. 압록강의 양쪽 강변은 아주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2. 기차는 가다가 멈추면서 250킬로미터를 10여시간 달렸다.

 

나는 아침 9:30경에 기차에 올랐다. 기차는 약 10시경에 단동에서 출발해서, 압록강대교를 지나 북한 신의주로 들어갔다.

 

약 2시간을 머물렀는데, 세관사람들이 기차에 올라와서 검사를 했다. 2시간후에 기차는 비로소 떠났다. 그런데, 가는 길에 가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가기를 반복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전력공급이 부족하여, 전압이 낮아지면 멈추고, 다시 전압이 올라가면 가는 것을 반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녁 8:00경에야 평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약 250킬로미터의 거리를 10여시간 달려온 것이다.

 

3.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내에서 핸드폰사용이 금지된 나라

 

북한의 현행 관련법률에 따르면, 북한국내에서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은 불법행위이다. 기차역에서 나는 많은 여행객들이 핸드폰을 봉투에 넣고, 봉투에 자기의 이름을 적은 다음, 가이드가 대신 잘아는 기차역의 상점에 보관하도록 맡기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맡길 곳이 없어서 그냥 몸에 지니고 있었다. 기차가 신의주에 도착한 후에 멈추었다. 북한의 세관관리는 기차에 올라와서 검사했다. 나의 핸드폰은 북한 세관인원이 가져갔다가 1시간 후에 돌려받았다. 핸드폰은 종이봉투안에 넣어서 봉해졌고, 위에는 세관의 도장이 찍히고 투명한 테이프로 꽉 봉해져 있었다. 그리고 북한 경내에서는 뜯거나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경고받았다.

 

북한국내에는 핸드폰기지국이 없다. 국내에서 핸드폰을 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다만, 중국과 접경한 변경지역에서는 강력한 중국의 핸드폰 통신신호가 통상 국경을 넘어서 북한의 일부 변경도시까지 커버리지내에 들었다. 들리는 바로는 국제밀수꾼들은 중국고객과 통화를 편하게 하기 위하여 몰래 중국의 핸드폰 심카드를 사서 끼우고는 자동차를 수십킬로미터 몰아서 국경선까지 간 다음에 전화통화를 한다고 한다.

 

4. 좋은 말만 해야 하고, 나쁜 말은 할 수 없다. 한국은 더구나 민감한 화제이다. 한국이 표시된 중국지도는 몰수 당했다.

 

여행중에, 연도에 보이는 토지는 모두 각양각색의 곡식이 심어져 있었다. 나는 조선의 식량부족문제를 더더욱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같은 차에 탄 경험이 있는 중국여행객은 나에게 제때 알려주었다: "이곳은 중국이 아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그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낙후되었다는 말이나, 모자란다는 말을 하지 말라. 더더구나 한국을 말하면 안된다. 그렇지 않다가는 가벼우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서 영원히 입국할 수 없게 되고, 심하면 체포될 수도 있다!" 나는 놀라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도 확실히 그랬다. 나는 중국지도를 한 장 가기고 갔는데, 한반도에는 "조선"과 "한국"이 같이 표기되어 있었다. 결국 프로젝트공장에서 몰수당했다. 이유는 "세계에 하나의 중국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은 불법이고, 세계에는 단지 하나의 조선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있을 뿐이다. 남조선은 조선영토의 불가분의 일부분이다"

 

5. 역출발후 바로 여권을 회수하고, 통역을 보내어 감시한다. 활동범위는 공장구역으로 제한되었다.

 

북한에서 일하는 몇달동안, 우리는 깊이 감탄했다. 북한의 국가안보업무는 물샐틈이 없을 정도였다. 중국에서 북한에 들어간 엔지니어로서 우리의 말한마디 행동하나는 모두 통역이 따라다니며 감시했고, 통역은 매일 상부와 국가안전부에 보고했다. 나의 활동범위는 공장구역으로 제한되었다. 공장의 사방은 모두 실탄을 장전한 보위인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공장구역을 반걸음도 벗어날 수 없었다. 중국엔지니어에게도 이러할 정도이니, 다른 나라의 다른 인원들이라면 아마 더욱 심하게 감시할 것이다. 적대분자가 만일 북한에 진입해서 정보수집을 하거나 파괴공작을 하려고 한다면, 엄밀한 통제체제하에서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6. 통신곤란으로 거의 세상과 격리되었다. 다만 치안은 좋다.

 

북한의 프로젝트공장에 도착한 후, 중국어신문을 전혀 보지 못하였다. 제한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거의 중국관련소식은 없었다. 중국의 상황을 파악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비준을 받은 후에야, 가족들과 전화통화를 할 수 잇었다. 전화를 할 때도 통역이 옆에서 듣고 있었고, 녹음까지 했다. 전화비용은 아주 비쌌다. 중국에 거는 전화비용은 1분당 18위안정도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3개월동안 가족들에게 딱 1번 5분간 통화를 했을 뿐이다.

 

북한에서 범죄율은 아주 낮다. 사회치안도 아주 좋았다.

 

북경올림픽기간동안, 나는 북한에서 들었던 관련소식은 바로 북한이 2개의 금메달을 땄다는 것과 텔레비전에서 가끔 방송해주는 축구경기의 녹화편집장면이었다. 다만 중국이 몇 개의 금메달을 땄는지를 알고 싶어서 통역에게 알아봐 달라고 했는데, 그도 알아볼 방법이 없었던 것같다. 어떤 북한사람은 북한이 금메달 2개를 따면 전세계에서 랭킹 10위안에 드는 것이 아닌지 말했다.

 

북한에서, 비준을 받아야 인터넷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비용이 깜짝 놀랄 정도로 비싸다. 업무관계로 나는 이메일로 중국에 7장의 디지칼카메라사진을 보내야 했는데, 북한측 인원은 이 이메일을 발송하려면 비용이 약 100달러가 든다고 하였다.

 

7. 생활필수품은 대부분 국가가 지급한다. 생활이 곤란하기는 하나 소문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일하던 프로젝트는 북한의 모 유명한 상사가 건설하는 국영기어이었다. 북한에 사영기업은 없고, 국영기업과 합자기업만 있을 뿐이다. 아마도 장기간 국가안전과 비밀유지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북한사람들은 외국인들을 아주 경계했다. 중국친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들에게 생활상황을 물어보았는데, 그들은 아주 경계하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친하게 된 북한 친구가 좌우를 둘러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의 식구는 4명인데, 그중에 둘은 소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고, 매월 50킬로그램의 양식을 배급받는다. 여기에는 쌀과 옥수수 및 1.6킬로그램의 대두유를 포함한다. 이외에 직장에서 매월 두번 돼지고기를 배급하는데, 한번에 개략 2킬로그램이다. 직장에서는 옷과 치약등의 생활필수품도 배급해준다.

 

8. 중국산 석영시계를 가지는 것은 사치스러운 바람이다.

 

북한에는 손목시계가 없다. 시간을 재는 것은 벽걸이시계뿐이다. 손목시계는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중국산의 석영시계를 가지는 것이 아주 사치스러운 바람이다. 북한기업의 직원들 생활비(그들은 급여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매월 2000조선원가량이다. 30위안정도의 가치를 지닌 중국의 보통 석영시계는 북한에서 판매가격이 8000 - 10000조선원이었다. 즉, 손목시계 1개를 사려면 4-5달의 월급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9. 전국민무상교육, 무상의료. 아이들이 돈이없어 학교를 못다니거나, 돈이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

 

북한인민의 생활수준은 중국과 큰 차이가 있었다. 다만 중국의 희망공정이나 의료보험과 비교하자면, 북한의 교육과 의료보장메커니즘은 중국보다 나았다. 전 북한은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실시하고 있었다. 어느 어린아이도 돈이없어 교육을 받지 못하거나, 어느 환자도 돈이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지는 않았다. 다만, 병원의 설비와 약품은 모자랐다. 한 북한친구는 아주 자랑스럽게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어린아이가 공부하는데 돈이 들지 않을 뿐아니라, 공부하는데 필요한 책, 펜, 가방등도 모두 국가에서 무상으로 배급해준다고. 내 생각이 이것이 바로 조선사회주의의 우월한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10. 북한사람들은 지원군에 거의 감사하고 있지 않고, 민간에서는 중국-북한관계는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었다.

 

중국에서 비밀해제된 숫자에 따르면, 중국인민지원군이 3년간의 항미원조전쟁(6.25전쟁)에서 희생된 열사가 36만여명이라고 한다. 그 중에는 중국의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주석의 아들인 모안영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북한은 지원군에 대하여 거의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중국인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하여 지원군을 북한에 파견하여 북한인민군과 함께 전투한 적이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대한 조선인민군이 바로 미제국주의를 무찌른 주력군이라고 알고 있었다. 지원군의 참전이 있고 없고는 조선전쟁의 대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조선에도 지원군의 참전을 기념하는 중조우의탑이 건설되어 있지만, 중국의 주북한대사관인원이 청명때와 지원군입조기념일인 10월 25일등에 중조우의탐과 형제산 중국인민지원군열사묘로 가서, 열사들의 혼을 제사지니고, 영웅적인 사적을 그릴 뿐이다. 가끔 중국 공산당과 국가지도자가 북한을 방문할 때 중조우의탑에서 헌화할 뿐이다. 보통의 북한인민은 이 일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사람들 중에서 지원군의 활동을 기념하는 어떠한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중국인민지원군의 후손으로써, 나는 영 기분이 씁쓸했다.

 

이외에, 민간에서는 중국-북한관계가 정부에서 선전하는 것처럼 그다지 공고하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북한측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한담을 나눌 때, 그들은 '항미원조기간에 중국은 괜찮았다. 그러나, 지금의 중국은 그 때처럼 믿을만하지 않다" 나는 그들에게, 중국이 비토권을 보유한 유엔의 5개 상임이사국중 하나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비토권을 행사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안건은 바로 미국이 북한을 제재하겠다는 의안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일단 일이 생기면 중국은 믿을 나라가 아니라고 말하였다.

 

11. 신의주의 해관검사인원은 정말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귀국할 때, 신의주에 도착하니 이미 중국땅이 보였다. 거의 모든 중국인들은 격동하여 고함을 질렀다. 다만, 그 후에 이어진 북한의 세관안전검사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먼저, 우리가 체제한 기간이 비자의 날짜보다 하루가 많았다. 그리하여 인민폐200위안의 벌금을 납부하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면서 아무런 영수증도 끊어주지 않았다. 이어진 상황은 이 돈이 과연 제대로 국고에 납입되는 것인지 의심하게 하였다. 같은 칸에 탄 한 중국동포는 북한에서 술을 2병 가지고 왔다. 세관직원이 따서 마시는 시늉을 내더니 강제로 가지고 가버렸다. 또 다른 사람은 5000위안 인민폐를 가지고 입국할 때 신고를 하지 않았는데, 500위안을 벌금으로 납부하라고 했다. 문을 걸어닫고 200위안을 주었더니, 보내주었다.

 

나중에 기차칸에 타고 있던 다른 중국동포들과 얘기해보다보니, 같은 차칸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북한세관에서 벌금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내가 경험한 붉은 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