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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무측천이 황위에 오르기까지의 6차례 모살사건(謀殺事件)

by 중은우시 2008. 9. 18.

글: 수은하(水銀河)

 

황위전승에 있어서, 당나라는 피비린내가 가장 짙은 왕조이다. 많은 황제들은 모살사건을 거친 후에 황위에 등극하였다. 예를 들면, 당태종은 현무문의 변으로 자신의 두 친형제를 죽였다; 당현종의 황위는 백부, 백모 및 고모를 죽이고 얻었다; 당대종도 당숙종황후를 모살한 후 등극에 성공하였다; 당문종의 황위도 모살당한 당경종에게서 물려받았다. 그러나, 당나라의 그 어느 황제도 무측천과 비교하면 피비린내에서 손색이 많다. 황제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여황제가 되는 것은 더욱 어려운 법이다. 무측천은 황제의 일개 후궁에서 52년간의 분투노력을 거쳐 황제의 용상에 앉는다. 그가 겪은 모살사건이 보통사람보다 많은 것이 당연하다. 그중에서 6건의 모살사건은 무측천으로 하여금 황제의 자리에 앉게 하는데 중요한 작용을 했다. 이를 통하여 그녀는 사회적약자에서 당대최강의 사람으로 변신에 성공한다.

 

제1차모살사건: 대상은 무측천의 딸인 영정공주(永定公主)이다. 무측천은 감응사에서 다시 황궁으로 불려왔을 때, 당고종의 보통 후궁인 소의(昭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왕황후처럼 후궁을 통할하는 지위에 있지 않았을 뿐아니라, 소숙비처럼 특히 총애받을 바탕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방대한 궁중에서 살아남으려면 최고의 지위 즉 황후의 자리에 올라야 했다. 사실상 모든 황제의 여인은 모두 물을 거슬러 배를 모는 것과 같다.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바로 뒤로 후퇴하게 된다. 이때의 무측천에게 이미 퇴로는 없었다. 다만, 왕황후는 명문거족출신이고, 조정에 뿌리가 깊었다.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면 그녀를 무너뜨리는 것은 후지산을 무너뜨리는 것보다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거대한 목표를 위하여, 그녀는 반드시 모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모험적인 성격은 무측천의 집안전통이다. 그녀의 부친인 무사획은 원래 돈후하고 겸손한 어른이었다. 그리고 사람됨이 아주 조심스러웠다. 일찌기 자신의 지명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공부상서의 지위도 과감히 물리쳤던 사람이다. 그러나, 수나라말기의 풍운시기에, 그는 멸문의 위험을 무릅쓰고, 만관의 가산과 온 집안의 생명을 이연 부자에게 걸었다. 앞날을 예측하기 힘든 정치적인 투기를 한 것이다. 속담에 호부무견녀(虎父無犬女)라는 말이 있다. 무측천도 이러한 측면에서는 그녀의 부친에 전혀 손색이 없다. 그녀는 바로 기회를 찾아냈다. 개략 영휘4년말에서 5년초에, 무측천은 자신의 첫번째 딸인 영정공주를 낳았다. <<신당서>>와 <<자치통감>>에 따르면, 영정공주는 잘 웃었고, 사람들이 아주 예뻐했다고 한다. 당고종과 왕황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번은 왕황후가 어린 영정공주와 놀다가 떠난 후, 무측천이 몰래 들어와서 자신의 친딸을 목졸라 죽이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이 당고종을 맞이한다. 딸이 죽은 것을 발견한 후, 화가 머리끝까지 난 당고종은 경위를 물어보는데, 왕황후가 어린 공주를 찾아왔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깊이 생각지도 않고 왕황후를 흉수로 단정한다. 비록 증거도 없었지만, 왕황후로서도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 일은 흐지부지되고 만다. 다만, 이 사건을 겪으면서, 왕황후의 인상은 당고종에게서 아주 나쁘게 변해버리고, 부부관계에 결정적인 균열이 발생한다.

 

왕황후의 지위를 흔들어놓는데 성공한 무측천은 개를 팰 때는 인정사정두지말라는 정신으로, 바로 두번째 모살사건을 일으킨다. 당고종 영휘6년(655년), 무측천의 강력한 베겟머리송사에 의하여, 당고종은 마침내 왕씨를 황후자리와 소숙비의 비의 자리를 폐위시키고, 서인(庶人)으로 낮춘다. 그리고 후궁들이 가고 싶어하지 아니하는 냉궁(冷宮)에 가두어버린다. 이외에 분을 풀기 위하여, 그녀는 왕씨를 망씨(氏, 구렁이)로, 소씨를 효씨(梟氏, 올빼미)로 성을 바꾸게 하고, 이처럼 모욕적인 글자를 그녀들의 몸에 낙인찍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고종 이치가 두 사람이 생각나서 그녀들이 갇힌 곳으로 찾아간다. 식사를 넣어주는 자그마한 구멍만 보이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큰 소리로, "황후, 숙비는 잘 지내는가?"라고 묻는다. 왕황후는 울면서 대답한다: "첩들은 죄를 지어서 이미 폐위되어 궁비가 되었는데 어찌 그런 존칭을 듣고 황후라고 불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당고종에게 냉궁을 형심원(心院)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요청했다(구당서. 후비전). 궁중에 쫙 깔린 무측천의 눈은 이 일을 바로 무측천에게 보고한다. 무측천은 과감히 칼을 든다. 왕황후, 소숙비의 두 사람에게 각각 장 1백대를 때리게 한 후, 수족을 잘라서 술에 담근다. 그리고 "골취(骨醉)"라고 부른다. 며칠후 왕황후는 고통을 못이겨 죽으니, 나이 28세이다. 이때부터 무측천은 후궁에서의 모든 장애가 철저히 제거되고, 첩에서 정실로 승격하게 된다.

 

궁내의 적들을 모두 제거한 후에, 무측천은 궁밖의 적들을 향해 칼을 들었다. 당고종이 왕황후를 폐위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앉히는 과정에서, 장손무기, 저수량등을 대표로 하는 원로중신들은 모두 반대표를 던졌다. 허경종, 이의부를 대표로 하는 또 다른 중하급신료들만이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당고종의 외삼촌일뿐아니라, 당태종이 임종시 후사를 부탁했던 권력을 장악한 중신이다. 관직은 태위에 이르러, 병권을 자기의 한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의견은 당고종의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무측천은 장손무기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당고종의 외삼촌은 아무리 해도 씨가 먹히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무측천은 원로중신들의 지지를 받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이들 늙은이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리하여 제3차모살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위하여, 무측천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장손무기등에 불만을 가진 대신들을 끌어모은다. 예를 들면, 허경종, 이의부, 최의현, 원공유등이 그들이다. 그들로 하여금 무측천의 편을 들게 하고, 여론을 조성하고, 원로들과 맞서게 한다. 젊은이들이 아무래도 힘이 있고, 목소리도 크다. 영휘6년(655년) 당고종은 마침내 대신들의 죽음을 무릅쓴 간언에도 불구하고, 무측천을 황후로 앉힌다. 이후 저수량은 오랑캐의 땅으로 귀양가고, 장손무기만이 고종의 외삼촌이라는 신분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현경4년(659년), 무측천의 지시하에, 허경종은 태자세마 위계방(韋季方)과 감찰어사 이소(李巢)의 붕당사건을 처리하는 틈을 타서, 위계방이 장손무기와 결탁하여 충신과 근친을 모함하고, 권력을 장손무기에 집중시킨 후, 모반을 꾀하였다고 무고한다. 당고종은 처음에는 놀라고 믿지 않았으나, 이어서 상심하고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허경종에게 다시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 후에 허경종이 집안에 틀어박혀 날조한 위계방이 장손무기와 모반을 꾀하였다는 진술서를 읽고 당고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외삼촌이 과연 그랬구나. 짐은 차마 그를 죽일 수가 없다. 천하가 짐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후세에 짐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러자, 허경종은 한문제가 외삼촌 박소를 죽였지만, 천하에서는 밝은 군주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례를 들어 당고종을 위안시킨다. 당고종은 명을 내려 장손무기의 태위직을 삭탈관직하고, 검주로 유배를 보낸다. 다만, 1품의 관리의 녹봉을 받도록 조치해준다. 이는 그가 예전에 황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해준데 대한 보답이라고 할 것이다. 장손무기의 아들과 종족은 모두 연루되어,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삼개월후, 고종은 다시 허경종등에게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한다. 허경종은 대리정 원공유를 검주로 보내어 장손무리를 핍박하여 자살토록 한다.

 

원래 무측천은 그저 황후가 되고 싶었다. 일련의 풍파를 겪은 후에 그녀는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아니라, 조정을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자원도 확보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정치를 향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이후, 무측천은 당고중의 뒤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나중에는 의자를 당고종의 오른쪽으로 옮겨놓아, 대신들과 마주하게 된다. 남녀평등을 실현한 것이다.

 

시간을 다시 흘러 666년이다. 외부의 적까지 모조리 청소해버린 무측천은 자기의 후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모살사건이 발생한다. 당초, 왕황후와 소숙비를 제거한 후에, 무측천은 남편, 당고종을 통제하기 위하여, 다른 여인들이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차단했다. 아예 자신의 언니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당고종은 아주 기뻐했고, 결과는 심각했다. 당고종을 무측천의 언니를 한국부인으로 봉했을 뿐아니라, 침실에까지 끌어들였다. 아쉽게도 한국부인은 미인박명이라고 몇년이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어미가 영웅이면 딸도 멍청이일 수는 없다. 그가 숨을 거두자, 그녀의 친딸이 모친이 이룩하지 못한 유지를 이어받아 당고종을 정복했다. 그리고 위국부인이라는 봉호를 받아낸다. 한쪽에는 이미 많이 보아서 질린 무측천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막 피어난 꽃과 같은 위국부인이 있다. 시간이 지나자 당고종의 애정은 위국부인에게로 기울어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제대로된 명분을 주고, 비빈으로 삼으려 했다. 무측천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음이 자본이다. 조카딸이 비빈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다음 목표는 황후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그녀는 당고종이 위국부인에게 명분을 주는데 결단코 반대했다. <<자치통감>>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황상은 위국부인에게 내직을 주려고 하였는데, 마음 속으로 황후를 어려워해서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후는 이를 싫어했다" 부득이한 상황하에서, 무측천은 인생의 운명을 건 제4차모살사건을 기획한다.

 

이때, 이미 정치계에서 몇년을 굴러온 무측천에게 있어서, 예술적으로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웠다. 그녀는 자기의 두 동부이모(同父異母)의 오빠들이 음식을 보내온 것을 기화로 하여, 몰래 독을 넣고, 위국부인을 불러서 먹게 한다. 위국부인은 친정사람들이 보낸 것이라는 말을 듣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먹었다. 결과적으로 일곱구멍에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

 

제4차모살까지는 기본적으로 무측천이 생존을 위하여 저지른 것이다. 정치적인 자본을 충분히 쌓은 후에는 자신의 야심을 한 단계 끌어올린다. 바로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이번에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바로 그녀의 아들이었다. 656년, 원래 태자였던 이충(李忠)이 폐위된다. 당고종은 무측천의 소생인 장남 이홍(李弘)을 황태자로 삼는다. 이홍은 부황의 총애를 받아서, 태자가 된 후에, 예의로 대신들을 대하여, 조정에서는 모두 일대의 명군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당고종과 무측천이 동도 낙양으로 놀러갔을 때, 이홍은 장안에 남아 감국(監國)을 한다. 당시에 큰 가뭄이 들어서, 관중지방에 기근이 든다. 그리하여 이홍은 사병의 양식을 순시하다가 사병들이 나무껍질, 풀등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그들에게 양식을 내리도록 명령한다. 함형4년(673년) 8월, 당고종의 병이 위중하여, 이홍으로 하여금 제반정사를 처리하도록 한다. 이는 황제위를 물려받기 전의 실습이다. 고종이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은 "동궁의 일이라면 짐이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당고종이 스스로의 몸이 좋지 않았으므로 황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처럼 능력있고, 대신들의 존경을 받는 아들이 즉위한다면, 무측천은 찬밥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더더구나 용인할 수 없는 일은 이홍이 여러번 그녀에게 대들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함형2년(671년) 이홍은 궁중에 유폐되어 있는 그의 동부이모인 두 누나 즉, 의양공주와 선성공주(소숙비의 소생)가 나이 삼십이 되었는데도 출가하지 못한 것을 발견했다. 이홍은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부황에게 그녀들이 출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무측천은 아주 화를 냈다. 바로 두 공주를 위사(衛士)에게 시집보냈다. 또 다른 사건 하나는 태자비를 간택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래 태자비로 간택될 예정이었던 여인은 사위소경 양사검의 딸인데, 명문거족출신이고, 서향문제일뿐아니라 자색도 뛰어났다. 그런데, 혼사가 결정된 후, 이 아가씨는 무측천의 외조카이자 한국부인의 아들인 하란민에 의하여 강간당한다. 그리하여 혼사는 파기되고 만다. 이는 이홍으로 하여금 무측천의 친가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길렀다. 이홍은 무씨가족들과 대적하였다. 무측천이 도저히 이를 용납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제왕의 길로 가기 위하여 다섯째 모살사건을 벌이게 된다. 675년, 이홍은 부모와함께 합벽궁으로 갈 때 돌연 사망한다. 세상사람들은 무측천이 독살했다고 생각한다. 당고종은 아주 비통해 하며 그에게 "효경황제"라는 시호를 내리고, 공릉에 묻어준다. 그리고 황제의 예로서 후사를 처리하게 하였다.

 

이홍이 죽은 후, 동생인 이현(李賢)이 태자위를 물려받았다. 그의 출생일자는 영휘5년 12월이라고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당시에 아직 소의이던 무측천은 당고종을 따라 당태종의 소릉을 배알하러 가던 도중에 조산했다. 그리하여 달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들에 대하여는 냉혹하게 대했다. 이현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단정했고, 어린 나이에 벌써, <<상서>>, <<예기>> ,<<논어>>등을 읽었는데, 한번 보면 잊지 않았다. 옹왕에 봉해졌었고, 당고종은 이현도 아주 총애했다. 이현은 총명한데다 학문을 좋아했고, 일처리는 과감하여 선비들 사이에서 명망이 있었다. 그는 유생들을 모아서 <<후한서>>에 주석을 달게 하였다. 부황은 이를 칭찬했으나, 모후의 의심을 샀다. 왜냐하면 후한의 대권이 황후와 외척의 손에 떨어졌던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당시의 정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닌가 했기 때문이다. 이년후, 당고종이 조서를 내려 연호를 "조로(調露)"로 바꾸고, 무측천과 동도 낙양으로 순시를 간다. 그리고 이현에게 감국을 명한다. 감국기간동안, 이현은 일처리를 바르게 하여, 조정대신들로부터 존중을 받는다.

 

아들이 능력이 뛰어나서 나중에 갈수록 통제하기 어려워질 것이며, 장래에 무측천이 황제가 되는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측천은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가 총애하는 신하인 명숭엄이 여러번 진언했다. 무측천도 점차 이현을 폐위시킬 생각을 품게 된다. 그녀는 여러차례 글을 내려 아들을 훈계했고, 사람들에게 <<소양정원(少陽政院)>>과 <<효자전>>을 편찬하게 하여, 이 두책을 가지고 이현이 충과 효에 대하여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 책에는 암중으로 아들을 나무라는 뜻이 있었다. 이현은 천성이 총명했고, 그 안의 의미를 잘 이해했다. 모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그러는 중에 명숭엄이 길을 가다가 강도에게 피살되는데, 무측천은 이현이 시킨 것이라고 의심한다. 대대적으로 강도를 수색하였으나  몇달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이현은 모후의 방식에 어느 정도 실망하고, 또한 자포자기한다. 그는 여색을 탐하기 시작하고, 방탕하게 변한다. 무측천은 이현을 낙양으로 부르고, 설원초, 배염, 고지주의 세 사람을 보내어 동궁을 수색하게 한다. 세 사람은 동궁에서 갑옷 수백벌을 찾아낸다. 그리고 조도생을 끌어들여 이현음 모함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명숭엄 피살의 책임을 억지로 이현에게 덮어씌웠다. 무측천은 대의멸친이라는 기치를 들고, 이현을 사지로 몰아넣고자 한다. 당고종이 아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함에 따라, 이현을 서인으로 폐하고 방에 감금한다. 오래지 않아 경사에서 2천리나 떨어진 파주(巴州)로 유배보낸다.

 

그러나, 이미 부활할 힘을 잃은 이현에 대해서도 무측천은 안심하지 못한다. 그는 일찌기 <<황대과사>>라는 글을 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종과황대하(種瓜黃臺下)

과숙자리리(瓜熟子離離)

일적사과호(一摘使瓜好)

재적사과희(再摘使瓜稀)

삼적유위가(三摘猶爲可)

사적포만귀(四摘抱蔓歸)

 

흙담 아래에 수박을 심었네

수박이 익으면 떨어져 나가는 것

한번 따면 가장 좋고

두번 따면 더이상 열리기 힘들지

세번 따는 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지만

네번 따게 되면 줄기만 남을 것이라네.

 

이 시는 조식의 칠보시와 비슷한 점이 있다. 모친이 친아들들에 대하여 냉혹하게 대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어, 당시에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아마도 살인에 습관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이현의 능력이 정말 그녀에게 위협적이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무측천은 다시 모살을 진행하여, 그에게 대들 수 있는 위협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어, 이현을 자살하게 한다. 그 후에 구신적을 첩주자사로 좌천시키는 것같은 외양을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점차 안정되자, 다시 구신적을 금오장군으로 불러들인다. 이로써 궁중내에서는 무측천이 이현을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현이 죽은 후, 그녀와 당고종 사이에 낳은 다른 두 아들은 평범했다. 그리고 하나는 공처가였고, 다른 하나도 간이 작고 유약했다. 어떻게 하더라도 무측천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는 없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수십년을 하루같이 "나를 따르는 자는 살고, 나를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정책을 실시해오던 무측천은 마침내 황조를 바꾸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이제 여황제가 탄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