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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대륙과 대만

대만의 5대 재벌가문

by 중은우시 2008. 7. 16.

글: 환구(環球)

 

첫째, 왕가(王家)는 후계자 문제가 골치

 

대표인물:  왕영경(王永慶)

 

오대재벌가문중에서 대소(臺塑, 포모사 플라스틱)그룹은 가장 실적이 좋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 90여세인 왕영경이 경영하는 대소그룹은 거의 손실을 본적이 없었고, 주주들이 손해보도록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영경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내부의 갈등이 아주 복잡하다는 것이며, 후계자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중국대륙에서 창업하여 성과를 거둔 장남 왕문양(王文洋)은 일찌기 매체를 통하여 말한 바 있다. 그는 이전에 부친의 도움을 받은 바가 없으며 절대 타이완으로 돌아가서 부친의 사업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하여, 이 '경영의 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왕영경은 3명의 부인을 얻었는데, 첫째 부인은 자녀를 낳지 못했다; 둘째 부인은 2남2녀를 낳았고; 셋째 부인 이보주는 딸만 5명을 낳았다. 장남 왕문양은 원래 왕영경의 가장 알맞은 후계자였다. 그는 학식도 풍부하고 능력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는 예측못한 풍운이 이는 법이다. 1996년, 왕문양은 여안니(呂安)와 혼외관계를 맺게 되었고, 왕영경은 공개적으로 '전현부전자(傳賢不傳子, 현명한 사람에게 넘기지, 아들에게 넘기지 않겠다)"라는 말을 하면서, 왕문양을 대소그룹에서 쫓아냈었다.

 

둘째, 채가(蔡家)는 큰아들을 내세운다.

 

대표인물: 채만림(蔡萬霖), 채굉도(蔡宏圖)

 

채씨는 보험으로 성공한 집안이다. 옛날, 채만춘(蔡萬春), 채만림과 채만재(蔡萬才) 형제 몇 사람은 한마음으로 협력하여 그 이름도 유명한 국태그룹(國泰集團)을 일으킨다. 채만춘이 중풍에 걸린 후, 지분교환방식으로 가업을 나누게 된다. 채만춘의 두 아들은 운영을 잘 못하여 금방 무너지고 만다.

 

채만림의 임원그룹(霖園集團)과 채만재의 부방그룹(富邦集團)은 비록 큰 댓가를 치렀지만, 그래도 이 난국을 벗어난다. "항심을 가지고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 해나간다". 곤란을 겪은 채만림은 이 말에 의지해서 놀라운 재산을 일군다. 대륙시장에 진입하는데 있어서도, 채만림은 기선을 잡았다. 2001년 국태인수(國泰人壽, 국태생명보험)은 북경에 판사처를 설립한다. 2005년, 국태금융지주는 대륙의 동방항공과 합작하여 보험회사를 정식 설립운영한다.

 

채만림이 죽은 후 장남은 몸이 좋지 않아서, 둘째 아들 채굉도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1952년생이고, 나중에 대만대학 법률학과에 합격하였으니, 천수이벤의 동기동창이다. 셋째 아들 채진우(蔡鎭宇)는 가족기업내에서 요직을 맡아왔다. 형제간의 화목을 위해서 채만림은 생전에 주권보관시스템을 만들어, 가족구성원간에 가산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였다. 부친의 "큰아들만 내세운다"는 방침하에 채진우는 형을 보좌하는 역할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고가(辜家)는 돈버는 사람을 잘 붙잡는다.

 

대표인물: 고진보(辜振甫), 고렴송(辜濂松)

 

녹항(鹿港) 고씨집안은 대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대륙에서도 유명하다. 고진보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그가 죽은 후, 고씨집안의 핵심은 그의 조카인 고렴송이 되었다.

 

고진보와 고렴송 숙질은 나이차이가 16살밖에 되지 않는다. 고렴송은 4살때 부친을 잃고 모친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혀서 어려서부터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다. 다섯째 숙부인 고진보는 그를 여러 모로 돌보아주었고, 그는 이를 마음에 깊이 새겼다. 미국 뉴욕대학을 졸업한 후, 고렴송은 고진보의 곁에서 일을 한다. 그의 지휘하에, "중국신탁"은 증권업에만 종사하던 형태에서 상업은행으로 변신한다. 그리하여 지금의 금융지주그룹에 이른다. 현재, "중신"은 대만내에서 발급한 신용카드만 500만장에 이른다.

 

고진보가 살아있을 때, 고렴송 숙질 두 사람은 분가를 한 적이 있었다. 고진보의 사업판도가 잘 개척되지 않았으므로, 고렴송은 자기 휘하의 "중신집단"이 영향을 받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분가후, 금융사업은 고렴송 가족에 귀속되고, 제조업은 고진보가족에 귀속된다. 대만내에서는 마침 이 '이성적인 분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녹항 고씨집안의 실력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뛰어난 경영재능외에, 고렴송은 "돈을 잘 버는 사람을 붙잡아두는데" 뛰어나다. 이 사람은 현재 이미 따로 독립하여 대만공상은행 총경리가 된 낙금명(駱金明)이다. 낙금명은 고렴송을 도와서, "중국신탁상업은행"(중신은)이라는 집안을 잘 지켰을 뿐아니라, 더더구나 관련사업에서 사업판도를 개척해 나갔다. 낙금명은 대만공상은행의 전망이 좋다고 보고, 중신은행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러면서도 옛날 오너에게 지분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현재 이 은행은 이익을 많이 내고 있어, 고렴송도 따라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넷째, 서가(徐家)는 백화점의 거두이다.

 

대표인물: 서유상(徐有庠), 서욱동(徐旭東)

 

원동(遠東) 서씨집안의 창시자는 서유상이다. 그는 강소성 해문현 사람이며, 2000년에 서거했다. 그는 20세경에 개인이 운영하는 잡량행(雜糧行)에 들어가서 직원으로 배우다가 나중에 스스로 창업한다. 그리고 점차 대만 재벌가족의 대열에 진입했다. 현재 원동집단의 동사장은 서유상의 아들인 서욱동이다.

 

대만의 오대재벌가족중에서 원동집단은 아주 특이하다. 경영범위가 아주 넓다. 시멘트, 방직, 항운, 은행, 백화 및 전신등 각양각색의 업종을 다 한다. 그중 백화점의 발전은 특히 주목을 끈다. 2002년말, 태평양Sogo백화점의 모회사인 대만태평양건설주식유한회사가 재무위기로 분할계획을 진행할 때, 여러 그룹이 지분경쟁을 벌였다. 관건적인 순간에, 서욱동은 태평양유통투자회사에 증자참여하여 99%의 지분을 취득하였다. 태평양유통은 태평양Sogo백화점의 84%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원동집단은 순조롭게 태평양Sogo백화점의 경영주도권을 장악했고, '명실상부한 아시아백화점업계의 패주"가 되었다.

 

원동집단은 일찌기 사업을 대륙으로 진출했다. 그룹은 이중브랜드 경영전략으로, 태평양백화점은 현재의 시장포지셔닝을 유지하여, 젊은 사람들을 공략하고, 원동백화는 측면에서 성숙한 고객을 상대로 하며 상품은 더욱 고급품을 다룬다.

 

다섯째, 오가(吳家)는 형제가 재산때문에 원수가 되었다.

 

대표인물: 오동진(吳東進), 오동승(吳東升)

 

신광그룹(新光集團)의 창시자인 오화사(吳火獅)는 방직업과 백화점업으로 기반을 잡았다. 4명의 아들인 오동진, 오동현(吳東賢),오동량(吳東亮), 오동승은 가업을 승계한다. 재산때문에 오씨형제는 서로 반목하여 일시에 대만섬을 진동시킨 바 있다.

 

1986년 오화사가 서거한다. 가족회의에서 사업전권을 장남 오동진에게 넘기는데, 이때 갈등의 씨앗이 뿌려진다. 몇년전에 오동승은 "입법위원(우리나라 국회의원)"에 출마하고자 하는데, 오동진은 출마하면 돈이 많이 들 뿐아니라, 낙선하게 되면 오씨집안의 이미지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리하여, 형제간에 주먹질을 하게 된다. 오동승은 화가나서 미국으로 가버린다. 1996년, 오동진은 오동량과 회사인감문제로 충돌이 일어난다. 오동진은 그가 동사장이지만, 인감은 총경리인 오동량이 보관하고 있어서, 기업의 적지 않은 의사결정에 대하여 그 자신이 모르는 것도 있었다. 그리하여 형제간에 다툼이 벌어진다. 가족내부협의를 거쳐, 모친이 친히 동사회를 차지하고, 회사인감은 총경리실주임에게 보관토록 한다. 가족갈등은 그래도 결국 폭발해버린다. 2004년, 오화사의 미망인은 성명을 발표하여, 4형제는 각각 책임지고 각각의 기업을 경영하도록 하여, 오씨형제는 이때부터 각자 갈라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