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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민국 후기)

서안사변(西安事變)의 또 다른 해석

by 중은우시 2009. 1. 7.

글: 지효민(智效民)

 

2008년 12월 12일은 서안사변 72주년 기념일이다. 72년전에, 장학량(張學良), 양호성(楊虎城)이 장개석(蔣介石)을 구금한 후, 연안(延安)에서는 일찌기 처형대를 만든 적이 있다. 공개심판을 통해서 장개석을 처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왜 2,3일후에 연안에서는 다시 장학량에게 장개석을 석방하라고 했을까? 그리고, 서안사변후, 왜 장학량은 장개석을 따라 남경으로 돌아갔을까? 그리고 그 후로 입을 꽉다물고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여러해동안 납득할만한 답안이 나오지 않았다. 최근에 <<장정불회고록>>을 읽다보니 소련당국의 서안사변에 대한 반응이 나왔다. 아마도 이것이 위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는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장정불(蔣廷)은 일찌기 미국에 유학하여, 컬럼비아대학의 철학박사이다. 귀국후 남개대학, 청화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호적등과 함께 <<독립평론>>을 펴내기도 하였다. 나중에 행정원 비서장 옹문호의 추천을 받아 학자신분으로 정계에 뛰어들어, 행정원 정무처장을 맡았다. 1936년, 그는 주소련대사로 임명되어 11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떠나기 전에 송미령은 그에게 장개석이 멀리 소련에서 소식 한장 없는 아들을 아주 그리워한다는 말을 했다. 이렇게 하여 소위 "집안 일이 국가 일이고 천하 일이 되었다"  이것은 그의 어깨에 짊어진 업무였다.

 

1개월여후, 장정불은 라이오에서 서안사변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날 저녁 공상희와 옹문호는 연명으로 전보를 보내왔다. 그리고 "공군이 서안지구를 정찰한 결과에 따르면, 장학량은 이미 서안 각처에 홍기를 올렸다"는 것이다. 전보는 그에게 즉시, "소련이 나서서 장위원장은 안전하게 석방하도록 협력해달라고 요청"하라고 했다. 이 지령에 대하여 장정불은 아주 곤란하게 생각했다. 그는 소련당국이 이 요구를 거절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장학량과 그의 일당은 소련의 명령을 듣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다음 날 아침 일찍, <<이즈베스티야>>와 <<프라우다>>의 눈에 띄는 위치에 서안사변의 소식이 실렸다. 그리고 이는 장학량과 왕정위(汪精衛)가 협력한 결과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장정불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는 왕정위와 장학량은 정치적 입장이 아예 다르다고 알고 있었다. "왕정위는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일본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는 것이고, 장학량은 즉시 일본과 전투를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그가 몰랐던 것은, 통신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장개석을 억류하는 문제에 있어서, 소련에 제대로 보고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큰 물이 용왕묘를 덥치는 결과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소식에서 장정불은 소련당국이 장학량의 행동을 크게 반대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남경정부의 재촉하에, 장정불은 어쩔 수 없이 철판을 깔고 소련외상 리비노프를 찾아갔다. 그는 상대방에게 말했다: "장학량과 그의 일당은 모두 소련을 아주 믿고 있다.  만일 외상이 의견을 제시해주면, 사변을 해결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겠다" 이 말을 듣고, 리비노프는 바로 말을 막았다: "소련정부는 장학량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련측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변의 진상을 보도하는 것뿐이다." 리비노프는 소련의 호의가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히려 의심을 받는게 억울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미 주중국소련대사로 하여금 중국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도록 시켰다고 했다.

 

며칠 후, 장정불은 다시 소련외상을 만나러 갔다. 이번에 리비노프는 더욱 격분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소련정부는 장락량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장정불이 "장학량은 제3인터내셔널이 기른 통일전선분자"라고 지적하자, 그는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의 주인이 아니다...모스크바는 제3인터내셔널의 행동에 책임지지 않는다." 장정불은 어쩔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서안사변은 결국 모스크바의 감독하에 해결되었다. 장정불은 당시에 그 사실을 몰랐다. 여러해 후에 이 사건을 되돌아보고, 그는 자신의 소련에 대한 인식을 근거로 이렇게 결론내렸다: 서안사변은 중일전쟁을 앞당겨 발발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바로 소련이 바라던 바이다. 왜 소련은 중일간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바랐다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이 전쟁은 일본이 소련으로 진공할 가능성을 제거해주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만일 장학량등의 생각대로 장개석을 죽여버렸다면, 아마도 왕정위가 정권을 잡았을 것이고, 중일양국은 결맹을 맺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소련으로 진공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여, 스탈린은 서안사변에 아주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소련이 왜 장학량과 왕정위를 동일하게 취급했는지를 말해준다. 왜 중국항전을 원조하려 했는지의 근본원인이다. 서안사변후, 장정불은 송미령의 분부에 따라, 외교경로를 통하여 인질로 잡혀있던 장경국을 소련에서 빼낸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서안사변이 하나의 막후거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1950년, 호적은 장문의 글을 쓴 바 있다. 제목은 <<스탈린 책략하의 중국>>이었다. 이 글은 서안사변을 언급하면서, 스메들리(Smedley)의 말을 인용했다: 장개석 일행이 서안을 떠난 후, 일군의 젊은 동북장교와 구국회 지도자들은 그녀에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속았다. 홍군은 장사령관에게 장개석을 풀어주라고 했다." 이와 동시에, 글에서는 한 미국학자의 극동형세에 대한 분석을 소개한 후, 스탈린이 서안사변을 처리한 책략을 분석했다: "크레믈린궁은 일본에 대하여 겁을 먹고 있었지만 그는 장개석이 일본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호적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소련은 아무런 조약도 체결되지 아니한 상황하에서 장개석을 회유했다. 이는 스탈린의 책략중 "뛰어난" 수법이었다. 그의 정치수완이 고명했음을 보여준다.

 

재미있는 것은, 호적은 서안사변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가 탄생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았다. 만일 장개석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중국은 20년 후퇴할 것으로 보았다. 장학량이 만년에 침묵을 깨고, 서안사변을 일으킨 것은 "장관(장개석)을 그르치게 하고, 친구를 해치고, 부하를 망친 것이 이것보다 더 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고 한다.

 

저명한 사학자인 당덕강은 항일전쟁은 일어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1937년 7월 7일에 개시된 것은 바로 소련이 서안사변에 간여한 직접적인 결과이다. 만일 항일전쟁이 1939년까지만 미뤄질 수 있었다면, 전체 국면과 중국의 운명은 아마도 전혀 다른 모양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