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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홍루몽

임대옥(林黛玉): 나의 네번째 선택

by 중은우시 2009. 1. 23.

글: 냉성금(冷成金)

 

현재는 사장이 많다. 그런데, 개혁개방초기에는 시인, 작가가 아주 많았다.

 

1980년대초에 이런 우스개가 있었다. 북경의 한 테라스에서 화분이 깨져서, 지나가던 사람 10명이 다쳤는데, 병원에 등록을 하다보니 9명이 시인이고, 나머지 1명은 소설가였다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는 우스개의 기본스토리는 같으나 다친 사람의 직업이 감독으로 바뀌었고, 90년대초에는 이 우스개의 주인공이 사장으로 바뀌었다. 조류는 시대와 함께 빠르게 흘러간다.

 

당시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하기도 했다. 아마도 작가협회가 그 테라스 아래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나보다고. 어찌되었건, 당시에는 시인, 작가가 확실히 아주 많았다.

 

나는 78학번의 대학생이다. 일찌기 열렬한 문학청년이었다. 그리고 작가의 꿈을 꾸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한다. 첫번째 소설의 소재는 정판교(鄭板橋)의 서예이야기였다. 제목은 <<난석포가(亂石鋪街)>>였는데, 여러번 원고를 기고했었다. 실패하면 다시 투고하곤 했다. 그러나 모두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다로 들어간 것처럼 소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편집자들이 눈이 삐어서, 사람을 못알아본다고 속으로 욕을 해댔고, 일찌기 맹세를 한 바 있다. <<삼국연의>>까지는 쓰지 못하더라고, 새시대의 <<홍루몽>>은 써보겠다고, 그리하여 그 편집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삼십년이 지났다. 현재 나는 그때의 편집자들에게 정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만일 그들이 눈이 잘못되어서 나의 소설을 실어주었더라면, 정말 당시 격정에 넘쳐있던 나로서는 나의 평생을 소설창작에 매진했을 것이다. 이는 스스로를 망치고 남도 망치는 길이다. 왜냐하면, 사십여세가 된 어느 날, 나는 돌연 깨달았다. 나는 근본적으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나는 이미 소위 교수였다. 하루는, 웬일인지는 몰라도, 갑자기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임대옥(林黛玉)이 좋아졌다. 당연히 그것은 내심 깊은 곳에서 나오는 "문화의 깊이"에 대한 즐거움이었다.

 

마치 선종(禪宗)의 돈오(頓悟)와 같이, 다는 당시 온 몸에 식은 땀이 났다.

 

나는 어떤 사람처럼 몇살때 <<논어>>를 읽곤 하는 소년천재는 아니었다. 오히려 10살때 몰래 황서 <<홍루몽>>을 읽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당시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화습인(花襲人)"이었다(조사에 따르면, 현재의 여자아이들은 북정왕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당시 화습인을 좋아한 것은 아마도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 당시의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철의 여인'형이었는데, 습인은 아주 말을 잘 듣고, 아주 잘 돌봐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에 만일 앙케이트조사가 있어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면 나는 분명히 "화습인"이라고 써넣었을 것이다. 그녀는 나의 첫번째 선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점차 화습인을 좋아하는 것이 약간의 "저급한 취미"라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위 동창들의 영향을 받아, "설보채(薛寶釵)"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스승들도 대부분 이런 기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우리 산동 사람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길 좋아한다: "임대옥은 매일 질질 짜고, 속이 좁은데, 어떻게 같이 살 수 있겠는가? 설보채를 봐라. 대갓집 규수이고, 글도 알고 예의도 알며, 부티가 흐른다. 얼마나 좋으냐?" 그래서 나는 설보채에 대한 감정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두번째 선택이다.

 

이 감정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유지되었다. 대개는 15세때부터 35세까지인 것같으니 개략 20년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중에 자신이 아직도 "저급취미"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으로 선택한 것은 여종이고 두번째로 선택한 것은 부인이다. 이게 어디 문학명작을 읽는 방식이냐. 너무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가?

 

이번에는 약간 총명해졌다. 청문(晴雯)을 선택한 것이다. 왜 그랬는가? 왜냐하면 당시 모든 사람이 개성을 얘기했는데, 청문은 개성이 있었다. 그녀는 부채를 찢을 줄도 알았고, 상자를 집어던지기도 했으며, 그러면서도 병중에 용감하게 공작구(孔雀裘)를 수선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녀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대표이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세번째 선택은 문제가 없다고. 왜냐하면 비록 임대옥이 좋다고는 하지만, 나는 감정적으로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나는 위선적으로 우아함을 따르는척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임대옥을 선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선택하지 않으면 안될까? 나는 스스로에게 답했다: "안된다. 왜냐하면 권위있는 연구에 따르면, <<홍루몽>> 대관원의 여인들중 너에게 맞는 여자가 하나는 있다; 만일 네가 그 중의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의 성별에 문제가 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계기가 왔다. 그 해에 나는 <<중국문학의 역사중 심미>>라는 글을 쓰고 있었다. <<홍루몽>>의 "문학의 깊은 곳에서 온 만가(輓歌)"라는 구절을 쓰고 있을 때, 나는 오랫동안 곤혹해 했다. 마침내, 그 순간, 나는 깨달은 것이다. 나는 마음의 깊은 곳에서 임대옥을 선택했던 것이다.

 

다만, 이것은 이미 나에게 네번째 선택이었고, 당시에 이미 사십여세였다.

 

나중에 나는 자주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홍루몽>>중의 어느 여인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곤 한다. 그들의 대답은 내 과거의 심리역정과 비슷했다. 당연히 임대옥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감은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예외는 있었다. 얼마전에 수업시간에 류씨성의 한 박사생이 오랫동안 방청을 했다. 그날 그는 늦었다. 그래서 앞부분을 듣지 못했다. 그가 교실로 들어서자 나는 바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설보채와 임대옥중 넌 누굴 좋아하는가?" 그의 대답은 아주 간결했다: "당연히 임대옥입니다" 나는 물었다: "확실한가?" 그는 답했다: "확실합니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기습을 했으므로 그가 허위로 가장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너는 나보다 20년 앞서서 저급취미를 벗어났구나."

 

역사는 어쨌든 진보한다.

 

250여년전에 만들어진 형상을 250여년후의 사십여세의 학자가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설명하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것은 그저 나 개인이 아주 멍청하고, "저급취미"를 지녔다는 것을 설명할 뿐인지도 모른다. 다만, 어찌되었건간에, 사십세이전의 내가 만일 <<홍루몽>>을 썼다면, 아마도 임대옥이라는 형상을 절대로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임대옥이 없는 <<홍루몽>>은 전혀 재미없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얼마전에 박사생 면접시험을 보는데, 한 교수가 내놓은 문제는: 네가 가장 좋아하는 당나라의 세 시인과 그 대표작의 특색을 얘기하라는 것이었다. 응시생의 기초는 괜찮았다. 이상은에 대하여 가장 많이 얘기했고, 가장 뛰어났다. 얘기를 마치자, 나는 물었다: "만일 네가 이상은의 시에서 고전소설명작을 하나 생각할 수 있다면, 너는 어느 것이 생각나겠는가?" 응시생은 생각을 한 후에 답했다: "홍루몽." 나는 말했다: "당연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왜 그런가?" 응시생은 답했다: "왜냐하면 모두 애정을 묘사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말했다: "그것도 맞다. 그러나 아마도 이해가 깊지 못한 것같다." 기록을 담당하던 조씨성의 학생이 웃었다. 왜냐하면 바로 전날 이상은의 시가중에 불교의 "환멸의식"이 있다는 것을 얘기했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 중 누가 진정한 작가가 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임대옥은 근본적으로 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