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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분석

남경을 도읍으로 정하면 단명한가?

by 중은우시 2008. 8. 21.

글: 성시전기(城市傳奇)

 

남경의 왕기(王氣) 및 진시황이 왕기를 끊었는지에 관하여는 <<사기>>에 명확히 적고 있다. 당시 진시황의 마지막 남순(시황37년)의 목적은 바로 동남에 왕기가 있다는 것때문이었다. 이 동남의 왕기가 바로 지금의 남경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중에 지금의 남경에 왕기가 있다는 얘기는, 삼국시대에 손권을 비롯한 일부 통치자들이 남경에 도읍을 정하면서, 정치적인 여론을 형성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진시황의 명성을 빌어서 전파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왕기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는가?

 

후세인들의 분석에 의하면, 왕기라는 설은 동오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금릉(남경)에 도읍을 정하려는 왕조들마다, 모두 이 곳은 왕기가 성한 곳이라고 말을 해왔다. 혹은 이 왕기가 아직도 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금릉에는 왕기가 남아있다고 했다. 동오도 그러했고, 동진도 그러했고, 나중의 남당, 심지어 대명왕조의 개국황제까지 그러했다. 이 지방에 왕기가 있다는 것은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을 도읍으로 삼으면 바로 하늘이 내린 왕조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중에서, 동진때에는 금릉의 왕기를 특히 중시했다. 왜냐하면 동오때에는 그래도 소주에서부터 진강으로 발전하다가 나중에 남경에까지 이른 것이므로 계속하여 전진하고 확장해나갔었다. 그러나, 동진은 중원을 전부 차지했다가 물러난 것이다. 즉, 당시 중국의 가장 중심지이며 가장 발달한 지방을 남에게 빼앗기고 남경으로 도망쳐와서 왕조를 유지했던 것이다.

 

남경으로 도망쳐 온 후에 충분한 이유를 설명해야했다. 왜 낙양을 선택하지 않았는지, 왜 낙양을 버리고 도망쳐왔는지? 그리하여 권력자들의 뜻에 따라 어떤 사람이 이 곳, 즉 남경은 왕기가 있고, 천자의 기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왕은 당연히 이 곳에 자리잡아야 하는 것이다. 심지어 진시황도 일찌기 이를 갈파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왕기는 아직 끊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직 왕성하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에 따라, 우리는 낙양을 도읍으로 해서는 안되고, 낙양을 남에게 넘겨주고, 남경으로 와서 도읍으로 정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왕기설이 나오고나서 정권이 점차 안정되었다. 이 풍수설은 최고통치자에게 있어서 최고의사결정기관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진의 정권은 비록 동오에 비하여 한쪽 귀퉁이에서 편안하게 지낸 정권이지만, 동진은 동오와 차이가 컸다. 당시 북방은 오호십육국이 들어섰는데 모두 소수민족이 건립한 자잘한 국가들이었고, 국토도 넓지 못했다. 동진은 강역이 전국토의 절반가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동진의 정통적인 지위는 북방의 오호십육국보다 더 확고하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동남아의 일부 국가, 한반도의 일부국가들까지도 동진을 정통으로 받들었다.

 

그리고, 동진이 건국했을 때, 금릉의 왕기에 대한 화제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정확한 시간개념이 추가되었다. 즉, 500년이라는 것이다. 진시황은 500년이후에 제왕이 출현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500년이 무슨 뜻인가? 바로 동진이 건국한 때라는 것이다. 진시황37년부터 계산하면 딱 520년째였다. 그리고 손권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해서 금릉의 왕기를 받고자 했지만, 아직 500년이 되지 않았고 437년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동진의 사람들은 금릉의 왕기는 손권의 동오가 아니라, 동진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동진이 바로 500년이 지나서 건립되었기 때문이고, 바로 동진이 진정한 진시황이 말한 500년후의 왕기였다는 것이다. 동오는 정통의 500년 금릉왕기를 계승한 자가 아니므로 금방 멸망했지만, 동진은 진정으로 금릉의 왕기를 이어받았으므로 오래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진이 시작되면서, 구체적으로 이 시간개념이 나타난다. 그리고 동진시기에 금릉왕기설이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금릉의 왕기에 대하여, 나중에 역대의 통치자들은 모두 중요시했다. 청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금릉의 왕기를 얘기하자면, 많은 사람들은 남경에 도읍을 정하면 모두 단명왕조라고 말한다. 남경을 수도로한 왕조는 대부분 중원왕조를 잃고 북방의 절반을 잃은 후에 이 곳으로 물러난 할거정권이라는 것이다. 송나라이전에 국력, 군사력은 모두 남방이 북방만 못했다. 송나라이후에도 남방에는 충분한 군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전국을 통일할 능력이 되지 않았다. 명나라의 원나라북벌이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이다.

 

이외에 고대의 남경은 확실히 수비하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어려웠다. 장강의 천험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조건이 있다. 사실 서쪽, 즉 장강의 상류를 반드시 장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키기가 힘든 것이다. 삼국시대에 오나라의 손권은 여러번 형주를 빼앗고자 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촉이 진나라에 멸망한 이후, 장강의 천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오나라의 멸망이 가속화되었다. 이후 남경을 수도로 정한 왕조는 거의 모두 적군이 장강을 상류에서 내려오면서 공격해서 망하게 된다.

 

과거에 가장 큰 전투력은 기병이다. 중국은 북방의 일부 지방에서만 말이 난다. 그리하여 북방을 수도로 정하는 것은 이러한 말과 병력을 얻기 쉬웠기 때문이다.

 

남경을 수도로 정하면 단명하다는 것은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1. 남경을 최초로 수도로 정한 것은 삼국시대 동오였다. 당시 이름은 건업이다. 삼국의 역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다시피, 오나라는 삼국중 가장 나중에 멸망한다. 성도에 도읍을 정한 촉이나 낙양에 도읍을 정한 위나라보다 훨씬 길게 존속했다.

 

2. 삼국이 진으로 통일된 후, 동진이 남경으로 옮겨온다. 그리하여 남북조시대를 연다. 남북조는 비록 여러 작은 나라들의 황제가 자주 바뀌었지만, 남경은 전국의 절대적인 경제문화중심지였다. 특히 중원을 수도로 하였던 서진이 먼저 멸망했고, 남경을 수도로 정한 동진의 수명은 더욱 길었다.

 

3.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시대에 중원지역은 정권이 10년도 되지 않아 바뀌었다. 십국중 양오(楊吳) 및 이를 대체한 남당(南唐)이 다시 가장 오래 존속했던 나라이면서 국토면적이 가장 넓었던 나라가 된다. 그러다가 결국 송나라에 멸망당한다.

 

4. 명나라가 남경에 도읍을 정한 후, 중국은 역사상 최고로 발달한 시기를 맞이한다. 이때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을 훨씬 앞선다. 명나라 160여년에서 북경의 15명 황제는 겨우 100년이었지만, 남경의 2명(엄격히 말하자면 3명)의 황제는 60년간 존속했다.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 쇠락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60년은 이자성과 청나라에 고통을 받았다. 그리고 명나라는 남경에 일련의 제도를 확립해두어(정치,경제,문화,사회등 각 방면에서),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5. 중화민국시대에 중국인은 역사상 최초의 민선국가지도자를 남경에서 탄생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