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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왕양(汪洋)과 오지포(吳芝圃)

by 중은우시 2009. 1. 12.

글: 주건국(朱建國)

 

한가지 소식을 2008년 11월 28일에 보니 한가지가 생각난다. 현임 광동성위서기인 왕양의 "등롱환조(騰籠換鳥, 새장을 비워서 새를 바꾼다)"의 산업업그레이드는 50년전의 하남성위서기 오지포의 공산주의 "대약진"과 너무나 닮았다. 문혁전에 광주로 가서 중남국 문교서기를 맡았던 오지포의 대약진사고방식이 왕양에게 유전되었나보다. 50년의 세월을 넘어 오지포와 심심상인인 왕양은 대약진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그 소식이란 다름아닌 그날의 남방도시보의 보도이다: "광동의 중소기업도산붐은 작년말 왕양이 광동을 맡은 후 얼마되지 않아 제안했던 '등롱환조' '쌍전이전략(雙轉移戰略)'에서 유래한다. 중점을 노동밀집형, 저부가가치의 전통제조업을 주삼각에서 이전시키고, 그 빈 공간에 고부가가치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는 한 가지 비밀을 드러냈다: 광동의 '도산붐'의 원흉은 바로 왕양이었던 것이다.

 

한가지 돌연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오지포가 하남을 맡았을 때도, "쌍전이전략"을 추진했었다. 그리하여 하남성으로 하여금 "보리를 버리고 벼를 심게 함으로써" "농업대약진"을 추진한 것이다. 그리고 하남성의 전체에 걸쳐 중소농업사를 개조하여 인민공사로 만들어서, "공산주의실험"을 추진했다.

 

자세히 비교해보면, 이 두가지 발묘조장(拔苗助長)의 쌍전이전략은 50년의 시간차이를 두었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하나는 수백만명을 굶겨죽이면서 하남을 망쳤고, 하나는 수만개의 기업을 도산시키켠서 광동을 쓰러트렸다. 그 배경, 목적, 방법은 놀랄 정도로 일치하는 면이 있다. 이는 모두 최고지도자가 관심을 가진 "대약진"과 "대승급"이 기초를 이루었다.

 

개인배경을 보면, 왕양과 오지포는 네가지 점에서 놀랄 정도로 닮았다.

 

첫째, 모두 교사를 지냈다. 왕양은 1976년에서1981년까지 오년간 안휘성 숙현지구의 "5.7"간부학교 교원과 안휘숙현지위당교 교원을 지냈다; 오지포는 1929년에서 1935년까지 하남수현, 부구와 용성일대에서 교사를 하였고, 고성현제일고급소학교장을 역임했다.

 

둘째, 모두 공청단간부출신이다. 왕양은 1981년부터 1984년까지 공청단 안휘성 숙현지위 부서기, 공청단 안휘성위 선저누장, 공청단 안휘성위 부서기를 지냈다; 오지포는 1925년 3월 중국공청단에 가입하였고, 처음에는 역시 단파의 우수한 단간부였다.

 

셋째,모두 최고지도자와의 관계가 각별하다. 오지포는 1926년 2월 광주농민운동강습소에서 배운다. 그리고 모택동을 따라 곡강, 해풍등지에서 완소선, 팽배등이 이끄는 농민운동을 참관하면서, 모택동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1950년, 어느 신문사에도 글을 써주지 않던 모택동은 오지포의 요청에 따라 "하남일보"의 이름을 써준다. 나중에 오지포 성장을 도와서 당시 성위 제1서기인 반복생을 몰아낸다. 이는 신중국에서 유일하게 '2인자가 1인자를 몰아낸' 성공사례가 된다. 왕양은 공인된 호금도 총서기의 사람이다. 비록 구체적인 점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호금도와 관계가 밀접하다는 것은 여러가지로 드러난다. 왕양이 공청단 안휘성 부서기때, 바로 호금도가 공청단 총서기였다. 1999년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이 된 것도 호금도가 후계자의 지위에 앉아 중앙조직부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단 호금도가 16대의 핵심이 되자, 왕양은 2003년 국무원 부비서장이 되고, 나중에 중경시위 서기로 간다. 다시 후보중앙위원에서 바로 정치국위원이 되고, '중국경제엔진'인 광동을 책임진다. 이같은 승진은 확실히 최고지도자의 보살핌이 없이는 곤란하다.

 

넷째, 모두 "한사람에게만 감사한다"는 관료철학을 가지고 있다. 많은 관리들은 개의 처세철학에서 배웠다. 한 집안에서 같이 개를 길러도, 개는 단지 그가 가장 좋아하는 한 사람만을 따른다. 경찰견은 오직 한 사람의 훈련사의 명령만을 듣는다. 오직 한 사람의 명령만 듣는다는 것은 개의 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개를 좋아한다. 오지포는 이 개원칙을 잘 알았다. 모주석의 말이라면 다 따랐다. 바로 위의 상사에게도 들이받고, 부주석 유소기, 진운의 말도 듣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택동이 '반우경'의 뜻을 밝히자, 오지포는 더욱 소리높여 대약진을 부르짖었다. 오지포는 1958년 3월 성도회의에서 전국에서 가장 급진적인 구호를 내세웠다: 1년에"4.5.8"(즉, 황하이북의 식량생산량을 1무당 400근, 황하이남은 1무당 500근,회하이남은 1무당 800근)을 실현하고, 하남은 1년에 4화(수리화, 사해제거, 녹화, 문맹소멸)를 실시하고, 4년만에 집체소유제를 전민소유제로 바꾸겠다고 하였다.

 

왕양도 마찬가지이다. 자기의 영화부기는 모두 총서기의 총애에 달렸다고 본다. 그래서 호금도가 '과학발전관'을 내세우자, 왕양은 광동으로 가자마자 '등롱화조'의 대업그레이드를 이치고, '쌍전이전략'으로 낙후된 중소기업을 모두 몰아냈다. 비록 원자바오가 1년에 두번이나 광동에 와서 중소기업을 도우라고 했지만, 왕양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광동은 자신의 길을 가겠으니, 다른 사람은 말하지 말라고 했다.

 

방법적으로 보더라도 왕양과 오지포는 네가지 닮은 점이 있다.

 

첫째, 성지(聖旨)의 말을 따라 "사상해방"을 한다. 왕양과 오지포의 대약진, 대승급은 모두 '사상해방'의 무기이다. 다만 이 '사상해방'은 '성지에 따른' 사상해방이다.

 

유소기, 주은래는 1956년에 공동으로 '반모진(反冒進)'을 내세운다. 발묘조장식으로 합작서를 건립하는데 반대하는 것이다. 1957년과 1958년, 모택동은 이에 대하여 손을 보고, '우경보수'로 비판한다. 그리고 사상해방을 내세운다. 오지포는 그 소식을 듣고 바로 움직인다. 그리고 십여장의 반우경대자보로 성위제1서기인 반복생을 '우경기회주의분자'로 몰고, 전성에서 '소반복성' 20만명을 체포한다. 이 기초상에서 수리대약진, 농업대약진과 인민공사화를 추진한다. 이것은 모두 모택동의 말에 따라 진행한 '사상해방'이었다. 자연히 최고지도자의 칭친을 받고, 하남은 모택동이 대약진을 전개하는 시험밭이 된다.

 

마찬가지로, 왕양은 2007년말 광동에 오자마자, 호금도의 '과학발전관'에 근거하여 대거 '사상해방'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광동경제가 중소기업을 위주로 하는데서 본사경제와 대형하이테크기업을 위주로 하도록 업그레이드되어야만 광동이 '과학발전과'의 시험기지가 될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광동의 각지에서는 '등롱환조, 쌍전이전략'을 진행하도록 한다. 중점은 노동밀집형, 저부가가치의 전통제조업을 주삼각에서 이주시키고, 빈 공간에 고부가가치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성지에 따라 진리를 실험하고 사상을 해방하게 되니, 사상을 해방하면 할수록 피해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오지포의 대약진이 2년내에 하남을 전국에서 가장 먼저 수백만명이 굶어죽도록 만들었지만, 왕양의 대승급은 1년도 되지 않아 광동의 5만여개 중소기업이 문을 닫게 만들었다. 50년전의 오지포는 중국이 '삼년자연재해'로 4천만명이 굶어죽도록 하는 물꼬를 텄지만, 2008년의 왕양도 중국각지에서 대량의 중소기업이 문을 닫고, 수천만명이 실업으로 추위와 배고픔의 고통을 겪게 만들었다. 오지포와 비교하자면, 왕양은 오십보백보이다. 다만 죄책은 큰 차이가 없다.

 

둘째, 궤변과 공담으로 사상해방

 

당시 오지포가 사람에게 준 인상은 철학을 깊이 연구한 철학서기라는 것이었다. 오지포의 명문 <<약진의 철학과 철학의 약진>>(하남일보 1959년 10월 19일)에서 오지포는 우경분자의 '생산비관론'을 깊이 비판함으로써만이, '백기를 뽑고, 홍기를 꽂고, 사상을 해방하고, 생각하는 것은 저질러버림으로써" 철투철미하게 우경기회분자를 분쇄할 수 있다는 황당한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허위의 날조된 실적을 선전하면서, '약진의 발생이치를 분석했다' 그리고 고지표, 고속도의 경제대약진의 실천을 하는 것이 모택동의 철학저장에 대한 가장 좋은 학습이며, 마르크스철학의 발전과 약진을 추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오지포는 "결심만 하면, 못할 일이 없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사람이 얼마나 대담하냐에 따라, 땅은 얼마의 산출을 준다" 허위철학, 허위과학으로 이런 엉터리주장을 한 것이다. 그는 '철학약진의 종소리가 울렸다. 철학의 꽃이 중주대지에 활짝 폈다'고 환호했다. 하남은 과연 농민철학을 고조시켰고, 4천만이 굶어죽는 대기근을 초래했다.

 

오늘의 왕양도 하나의 사상해방을 주장하는 박학한 개혁가로 관료사회에 이름이 높다. 2007년 12월에서 2008년 11월까지, 왕양은 광동에서 무수한 제3차 사상해방의 강연을 했따. 그가 처음으로 논증한 것은 광동이 '과학발전관'의 사상발원지라는 것이다. "2003년봄, 호금도 총서기가 광동에서 과학발전관의 사상을 제출했다. 바로 이 정확한 사상이론의 가이드에 따라, 광동개혁발전은 전국에서 가장 앞장서게 되었고, 역사적인 비약을 이루었다. 광동은 개혁개방의 선행구이며, 과학발전관사상의 제출지이다. 당연히 과학발전관을 실현하는 선두가 되어야 한다. 당년 개혁개방초기에 혈로를 뚫고 나왔던 기백으로 과학발전관의 새로운 길을 뚫고 나가자"

 

이런 주장은 광동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웠다: "과학발전관사상의 제출지"는 "과학발전"의 신면모가 없다. 이게 될 말인가? '과학발전관'을 증명하기 위하여, 광동은 반드시 '백기를 뽑고, 홍기를 꽂아야' 했다. 전통적인 중소기업은 하이테크대기업에게 양보해야 했다. 그리하여 대승급을 이루어야 했다.

 

왕양은 또한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미국학자 토마스 프리드만의 <<세계는 편평하다>>는 며어를 곡해하여 설명했다. 그리하여 뉴욕타임즈는 그에 대하여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약간의 칭찬을 한다. 불행히도 왕양의 혈로를 뚫고 만든 길은 5만의 기업이 도산하는 길이었다. 천만민공이 실업하는 길이었다. 다만 왕양은 '과학발전관'의 검증으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하이테크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틀리지 않다. 틀린 것이라면 도산한 기업과 실업자가 "낙후된 생산력"이라는 말이다.

 

옛날에 오지포가 온 천지에 굶어죽는 농민들을 향해서 "생산량을 속이며 자기들끼리 나눠먹었다"고 욕해댔듯이, 왕양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도산기업은 낙후된 생산력이다"라고 웃으며 말한다. 망해도 좋다. 다 망하면 통쾌하겠다.

 

셋째, 언론자유를 제약하면서 사상을 해방한다.

 

1957년, 1인당 식량생산량은 257킬로그램이었던 하남이, 대약진후 생산량이 절반으로 뚝 떨어져서, 1960년에는 140킬로그램으로 줄었다. 이것은 당시 각 성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감산의 상황하에서, 오지포는 농민들에게 고지표로 양식을 수매했다. 농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오지포는 여하한 매체도 이를 사실대로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반대로 '반만산(反瞞産)', '반우경'의 명목으로, 우체국에서 일체의 서신을 검열하여, 다른 성으로 보내는 것은 모조리 압수했고, 대약진에 대하여 불만스러운 내용이 한 줄이라도 있으면, 그 거지에 가까운 농민을 묶고, 때리고, 매달고, 구금했다. 1958년 11월말, 밀현에서 대량의 굶어죽는 자가 나나난다. 다음 해 봄에, 신양지구에서 200만명이 굶어죽었다. 오지포는 이같은 비극앞에서, 한 것이라고는 매체에 대한 감시감독을 강화한 것이다. 한편으로 민간과 외성간의 일체의 장거리전화를 막고, 전면적으로 정보봉쇄를 실시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앙에 하남은 대약진에서 대풍년을 이루었다고 허위보고를 한다. 1960년 2월, 중공하남성위는 제15차전회와 전성5급간부회의를 개최한다. 오지포는 극력 대표들이 하남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부인하고, <<1960년에 지속적으로 대약진을 실현하기 위하여 분투하자>>는 보고서를 통하여 계속 반우경을 힘껏 추진하도록 요구한다; 오지포는 당시에 굶어죽은 자는 모두 부종병으로 병사한 것이거나 정상적으로 늙어죽은 것이라고 하였다.

 

나쁜 짓은 꼭 짝이 있다. 지금 광동의 정부에서 5만중소기업이 도산한 현실에 대하여 계속 부인하면서 신규증가기업이 도산기업보다 많다고 우기고 있다. 그리고 아예 농민공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붐도 없다고 말한다. 실업자수도 전년동기보다 감소했다고 말한다...2008년 11월 20일, 왕양은 광동성 특구공작회의에서 논쟁할 때, 그가 추구하는 것은 광동경제의 장기적인 발전이고, 현재 도산한 기업은 대부분이 방직, 오금, 도자기, 건자재등 전통적인 노동력밀집형, 에너지고소모형기업이다. 광동의 25%토지자원을 점유하면서, 겨우 8%의 GDP공헌도밖에 없다고 했다. 그들의 도산은 왕양에게 있어서 바라마지 않는 일처럼 보인다.

 

민간에서는 반박한다. 현재 굶어죽는 사람들이 구해달라고 소리쳐도 구해주지 않으면서, 그 이유를 나는 장기적인 이익을 보살피느라 바쁘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과학발전관'이란 말인가? 지금 굶어죽으면, 무슨 미래가 있는가? 단순히 '25%의 토지자원으로 겨우 8%의 GDP공헌을 한다"는 것으로 기업의 우열을 판단한다면 이것은 GDP지상주의가 아닌가? 그것이 '과학발전관'인가?

 

다만 여하한 질의도 왕양을 어찌하지 못한다. 왕양은 입으로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라는 말을 달고 다닌다. 실제로는 '다른 사람은 말하지 말라'는 취지이다. 감히 이를 지적하는 남방도시보는 절반의 언론시평면이 없어져 버렸다. 성위와 일치하지 않은 일체의 민간의 원성을 보도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많은 민간웹사이트도 폐쇄하였고, 엄격히 감시하고 있다. 2008년 11월 28일, <<심천특구보>>는 44명이 불타죽은 9.20화재사건과 관련한 탐관오리에 관한 소식을 11면에 겨우 실었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대형독직사건도 이렇게 숨겨서 조그맣게 보도하고 있다. 왕양이 있는 광동은 언론통제의 면에서 50년전의 오지포와 다를 바 없다.

 

넷째, 오지포는 진운의 말을 따르지 않고, 왕양은 온가보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옛날 하남에서 대량으로 아사자가 나타날 때, 성위서기 오지포는 여전히 중앙에 양식을 많이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미 백만명이 굶어죽은 신양지구로 하여금 계속 양식을 상부에 바치도록 독촉했다. 이는 실사구시로 유명한 진운을 참지 못하게 했다. 1960년 10월, 당시 중공중앙부주석인 진운은 하남으로 간다. 오지포와 얘끼한다: 하남에 얼마의 경작지가 있고, 얼마의 양식을 생산하는지, 얼마나 많은 농촌인구가 있고, 최저한도의 농촌인구가 얼마의 양식을 먹어야 하는지. 종자는 얼마나 필요하고, 사료는 얼마나 필요한지, 전성에서 상품양식을 먹는 인구가 얼마인지...이것들을 얘기한 후에 진운은 오지포에게 권한다: 나는 하남에서 양식을 다른 곳으로 반출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오지포는 대약진으로 인한 대기근을 감추기 위하여, 여전히 우긴다: 하남의 양식생산량은 작년보다 배가 늘었다. 국가에서 양식을 받는 것은 불필요하고, 계속 양식을 반출할 수 있다...이렇게 하여 오지포는 원래 중앙의 지원으로 겨우 살아갈 사람들을 계속 굶겨죽었던 것이다.

 

역사는 놀랄정도로 닮았다. 2008년 7월 19일과 11월 14일, 광동에 도산붐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들은 온가보총리는 왕양이 중소기업을 '낙후된 생산력'이라고 욕하는 것을 제지하기 위하여, 두번이나 광동으로 날아가서 왕양에게 권고했다: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라" 그러나, 왕양은 계속 이를 받아들이기 거부하고, 광동은 우선적으로 대형중앙기업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심지어 11월 28일 중앙회의에서 '성장유지'를 요구할 때, 그는 여전히 '절대로 성장유지를 위하여 뭐든지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길을 간다. 과학발전의 길을 간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쌍전이는 이룰 것이고, 등롱환조도 이룰 것이다" 이렇게 도산하는게 이치에 맞다는 주장으로 광동은 도산붐에 이어 절도붐이 일어나고 있다. 대량 실업자들의 집단충돌과 범죄율이 급증하고 있다.

 

오지보는 1961년 봄에 부득이 대약진의 '쌍전이전략'은 실패했다고 인정하고, 침통하게 반성했다: "성위와 내가 범한 잘못은 엄중하다. 죄악도 크다...극형에 처해지더라도 나는 목을 내밀고 받겠다." "나는 하남 5000만인민에게 평생 못다갚을 빚을 졌다." 그러나, 모택동이 보호해주어서, 오지보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그저 성위서기에서 중남국 문교서기로 같은 직급을 유지하면서 전보되었을 뿐이다. 문혁중에 군중들에게 놀라 죽은 후에 1980년 등소평은 친히 그의 추도사에서 "위대한 공산주의전사"라고 칭송했다. 이것을 보면 중공의 관료사회인물들은 다 알고 있다: 그저 중앙제1호인물만 따르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관직에 영향이 없다.

 

이것이 아마도 오늘의 "왕양"을 낳은 원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