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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오계현(吳桂賢):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여성부총리

by 중은우시 2008. 12. 18.

 

 

 

글: 김산(金汕)

 

최근 봉황TV를 보다가, 건국이래 첫번째 여성부총리인 오계현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녀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이전에 만난 것같고, 기질이나 풍도가 요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할머니들 같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경력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30여년전에, 37세였던 그녀는 바로 부총리였다. 공화국이 성립된 이래 처음으로 이런 영광을 얻은 것이다. 나중에 부총리에 오른 노혁명가 여성부총리 진모화(陳慕華)나 능력있는 지식형 여성부총리 오의(吳儀)와는 전혀 달랐다.

 

오계현에 대하여, 그녀가 제4기 전인대에서 부총리로 지명된 것을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다지 돌발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전에 모택동이 "공농병(工農兵)을 모두 해봤다"고 평가를 받은 왕홍문(王洪文)이 서열3위의 인물로 승격되어, 등소평, 섭검영보다도 서열이 앞섰다. 그러니, 어떤 자리배치를 하더라도 더 놀랄 일도 없었다.

 

오계현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수억명이 알고 있는 "이시진사건(李時珍事件)"이다. 오계현이 위생을 주관하는 부총리가 되어 외빈을 맞이했는데, 상대방은 중국의 중의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시진의 의술이 뛰어나서 감탄했다고 말했다. 오계현 부총리는 그 자리에 배석한 중국관리에게 바로 물었다: "이시진이 와있나요?" 이런 일이 있었는지는 반신반의한다. 사인방이 분쇄된 후, 과학을 주관한 방의(方毅)에 따르면, "오계현이 이시진이 왔느냐고 물었다는 사실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봉황TV와의 인터뷰에서, 만일 오계현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해명을 했어야 할 텐데, 그녀는 이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의 부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도 오계현 조차도 이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70년전에 오계현은 하남성 공의현의 한 가난한 농민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정이 빈곤하여, 13살된 오계현은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먼친척이모네집으로 갔다. 나중에 고성 함양에 신중국 최초의 국가방직공장인 섬서서북국면1공장이직원모집을 할 때, 나이 겨우 13살된 오계현은 3살을 속여서 신청한다. 이때부터 오계현은 하얀 목수건을 두르고, 하얀 모자를 쓰고, 대형국유기업의 제1차 노동자가 된 것이다.

 

오계현의 인생궤적을 보면, 노동모범이 가장 어울렸다. 그녀는 연속 2회 북경의 국경절에 참가했다. 1965년에는 다시 서북국면1공장의 부공장장에 오른다. 다만, 문혁은 이 성실한 노동모범을 갑자기 발탁하게 된다. 오계현은 먼저 "노중청(老中靑)"이 결합된 청년간부로 섬서성혁명위원회로 뽑혀 올라가고, 연이어 당의 "9차대회" "10차대회" "11차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뽑힌다.

 

공농병을 중용하는 것은 모택동의 문혁기간동안의 중요방침이었다. 노동자출신의 왕홍문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진영귀(陳永貴), 예지복(倪志福), 오계현등이 모두 국가지도자의 지위에 올랐다. 오계현은 주은래가 사인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뽑은 사람이었다. 원래 상해에서 중앙으로 올라온 장춘교(張春橋), 왕홍문, 유문원(姚文元)등은 상해의 조반파 두목인 왕수진(王秀珍)을 부총리로 삼고자 했다. 주은래는 그리하여 서북의 노동모범중에서 한 사람을 선발했고, 그리하여 오계현이 낙점을 받은 것이다. 중앙조직부의 심사를 거쳐 모택동에게 올렸고, 모택동의 동의를 받는다. 오계현은 바로 북경으로 와서 임명장을 받는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이 부총리를 한다는데 불안해 했다. 그러나, 점차 이 자리에 오른 후 많은 부하들이 존중해주자, 점점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때는 정치풍운이 파란만장할 때였다. 고위직에 있어본 적이 없던 오계현은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녀의 능력은 노혁명가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뿐아니라, 교활하고 간사한 장춘교와도 차이가 컸다. 만일 정치적 과오가 있다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다. 사람이 강호에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 난세에, 한 노동모범에게 더 이상 많은 것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나는 그저, 오계현이 중국의 첫 부총리라는 것만으로 상당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본다. 그녀가 얘기하는 중에 하루는 모택동이 외지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데, 수영장에서 중앙정치국회의를 개최했다. 그녀는 정치국후보위원으로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모택동은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과 하나하나 악수를 했다. 정계의 몇 가지 일을 얘기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었다. 그러나 인터뷰에서 이 부분은 그냥 슬쩍 지나가 버렸다. 봉황TV가 이 정도까지 한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오계현은 어쨌든 70의 고령이다. 하루빨리 회고록이라도 써서 역사에 책임을 지는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오계현이 많이 얘기한 것은 고위관료가 된 후의 구체적인 생활에 관한 사항이었다. 예를 들어, 부총리가 되고나서도 감히 차를 마실 수 없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매월 서북국면1공장의 76위안의 급여밖에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민대회당에서 회의할 때 차를 마시면 2각의 차값을 내야 한다. 오계현은 매번 맹물만을 마셨고, 찻물을 마시지 못했다. 복무원이 그녀에게 "오부총리, 왜 차를 마시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녀는 그저, "나는 차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잠이 안올까봐."라고 둘러댔다. 사람들이 이 말을 들으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때는 제도가 아주 엄격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그때는 너무 가난했다. 가난해지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는 아니지 않은가?

 

문혁의 수혜자로서, 오계현은 정치적인 과오가 크지는 않다. 그러나, 적지 않은 극좌노선의 일들을 집행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루도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인방을 분쇄한 후에도 그녀의 책임을 추궁해야한다는 목소리는 작았다. 그녀도 등소평, 화국봉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서, 하나는 자신이 부총리직을 수행하는데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소위 주은래를 반대했다는 것의 진상을 설명하고, 이것은 그녀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고위지도자들은 모두 관용적이었다. 화국봉은 '당신은 공장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데, 공장에는 할 일이 없다. 성에 가서 일을 해라"고 하였다.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인 호요방은 "오계현 동지는 섬서로 돌아가서 일한다. 이미 중앙의 동의를 얻었다. 대도시의 부시장 혹은 대형국유기업의 부공장장에 안배하라" 그러나, 그녀는 역시 공장의 노동자 자매들 곁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온 것이다. "나는 항상 잊지 않았다. 나는 방직노동자이다"

 

문혁때 이름을 날렸지만, 사인방과 조직관계가 없던 사람들의 현재 처지는 모두 괜찮은 편이다. 대채 철꾸냥, 9차대회 중앙위원인 곽봉련(郭鳳蓮)은 많은 돈을 가진 기업가가 되었다. 오계현은 유명했고, 역시 재산이 상당하다. 심천의 한 대형방직공장에서는 그녀에게 중임을 맡겼다. 그녀는 온 가족과 함께 심천에 자리잡았고, 처지는 아주 괜찮은 편이다. 그녀는 일찌기 황제릉을 중수하는데 25만위안을 기부한 적이 있는데, 이를 보아도 그녀의 경제상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계현 뿐이 아니다. 문혁때 유명했던 인물들은 모두 일반사람들보다는 잘 지낸다. 백권영웅 장철생도 이미 부자가 되었고, 때리고 부수고 빼앗던 선봉장 붕대부도 지금은 기업가이다. 반조류조반의 어린 영웅 황수는 다른 사람에게는 공부하지 못하게 해놓고 자신은 일본유학을 갔다. 이러한 것은 속담이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명하다는 것이 바로 자본이다. 그것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일로 유명한 것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