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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이작붕(李作鵬): 사람은 가고, 수수께끼는 남고...

by 중은우시 2009. 1. 17.

 

이작붕,오법헌,임표,황영승,구회작(왼쪽부터)

 

 

글: 한복동(韓福東)

 

2009년 원단후 이틀만에(1월 3일), 파란색 환자복을 입은 이작붕은 북경안정병원 18병구의 병상에서 영원히 두 눈을 감았다. 향년 95세이다. 이제 임표(林彪)의 소위 "사대금강(四大金剛)"인 황(黃永勝), 이(이작붕), 오(吳法憲), 구(邱會作)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9.13사건"은 임표를 몽골 온도르한에 묻었을 뿐아니라, "사대금강"이 미끄럼틀을 타고 하락한 날이기도 하다. 중국인민해방군 부참모장 겸 해군제일정위인 이작붕은 이때부터 구금된다. 그리고 당적을 박탈당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에서 면직된다. 1981년,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은 그가 "임표반혁명집단"의 주범이라고 확인하고, 유기징역 17년, 정치권리박탈 5년형에 처한다.

 

형기를 끝내기 전에 이작붕은 보석으로 석방되어 병원으로 보내어진다. 만년에 그는 진정을 내서 임표와 경계를 긋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임표반혁명집단의 주범"이라는 표찰을 떼어내지 못했다. 감옥에서 돌아온 후, 이작붕은 자신의 일생을 회고록에 써넣었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의 명성을 신경쓰는 것같았다. 황영승의 아들인 황춘광(黃春光)이 기자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이작붕은 암으로 죽었다고 한다. 간암이 폐암으로 전이되었다. 이전에, 그의 전우들은 이미 하나하나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1984년, 전 해방군총참모장 황영승이 병사한다; 2002년, 해방군 부참모장 겸 총후근부부장인 구회작도 세상을 떴다; 2004년, 부참모장 겸 공군사령관 오법헌이 제남에서 사망한다. "사대금강"이 한창 날리던 시절을 이제 과거형이 되었다. 이작붕이 최후의 만가를 울릴 때, 하나의 시대극이 정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임표와 그의 "반혁명집단"이 우리에게 남긴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임표에 의탁하다

 

모택동은 천안문에서 신중국의 성립을 선포할 때, 이작붕은 제43군을 이끌고 남하하고 있었다. 광동을 점령한 후에 해남을 공격하고 있었으며, 대륙의 마지막 해방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전공이 탁월했던 그는 1955년 전군에 처음 계급을 부여할 때, 중장(中將) 계급을 받는다.

 

이작붕은 장정에도 참가했고, 항일전쟁기간에는 항일군정대학 참훈대 대장을 맡았다. 이때 항일군정대학의 교장이 바로 임표였다. 이작붕은 임표의 신임을 받았다. 임표는 그 후에 팔로군 115사단의 사단장이 되는데, 이작붕은 그 부대에서 정찰과과장, 작전과과장을 맡았고, 이후 직위가 계속 올라갔다.

 

"그는 아주 능력있었다. 임표가 그에게 작전과장을 맡긴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는 그가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그는 약간 멍청한데가 있다. 술꾼이다. 어디를 가든 술없이는 못산다. 임표가 그에게 아주 잘해준 것은 아니다. 임표를 연구한 한 역사학자는 기자에게 예를 들며 설명했다. 내전기간동안, 동북의 한 전투에서 국민당에게 쫓겨 도망을 다녔다. 임표가 송화강까지 도망을 갔는데, 이작붕은 하얼빈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임표는 이를 보고, 등짐을 벗고 술상을 뒤집어버리고, 한바탕 욕을 해댔다. 그 후에 계속 더욱 북쪽의 후란방향으로 도망쳤다.

 

다만 건국후에 이작붕은 중남군정대학 부교장을 맡는데, 1962년 6월에 해군부사령관이 된다. 이것도 임표의 추천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작붕이 '문혁'후에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변론을 하는데, 공소인인 장조기(張肇圻)도 "이작붕이 임표와 결탁한 반혁명본질"을 들추어내는데 집중했다. <<인민일보>>의 당시 보도에 따르면, "이작붕은 오랫동안 임표를 따라다녔고, 임표도 이작붕을 아주 중용했다.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되었을 때, 이작붕은 해군에서 음모궤계를 꾀하여 적발되어 더 이상 계속하기 힘들게 되었는데, 임표가 그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극력 이작붕을 보호하고, '좌파'를 봉쇄하는 수단을 이용하여 이작붕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임표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반이작붕은 허용할 수 없다. 내가 죽은 후라도 반이작붕은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작붕은 그가 잘 쓰는 음모수단을 이용하여 당과 국가지도자 및 군인간부들에게 각종 말도안되는 죄명을 뒤집어씌워, 그들을 타도하고, 임표를 위하여 일했다. 이작붕은 해군에서 친히 이름을 찍어 120명의 간부를 모함, 박해하고, 그중 3명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상술한 임표를 연구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해군에서 정치부주임 장수천등 3사람과 힘을 합쳐서 초경광(肖勁光)등을 집중적으로 끌어내려, 권력을 빼앗았다."

 

1971년 9월 13일, 임표의 비행기가 도망갈 때, 이작붕은 이미 해방군 부참모장 겸 해군제일정치위원이었다. 모택동의 지시하에, 주은래는 왕동흥과 황영승, 오법헌, 이작붕, 구회작에 대하여 격리조사를 실시하는 방안과 관련된 구체적인 일들을 연구했다. 24일 오후, 이작붕등은 통지서의 요구에 따라 인민대회당의 한 회의실에 도착한 후, 주은래가 그들에 대하여 격리조사를 실시한다고 선언한다.

 

재판때 그는 아무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이작붕에 대한 재판은 '문혁'후에 이루어진다. 모택동이 지정한 후계자인 화국봉과 노원수 섭검영이 손을 잡고, '사인방'을 분쇄하였다. 그리고 억울하거나 잘못되거나 무고한 사건들을 바로잡고, 법률제도를 새로 재건하는 일들이 의사일정에 올라왔다. 임표, 강청의 반혁명집단사건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는 것도 당연히 진행되어야 할 일이었다.

 

이작붕등 "사대금강"을 제외하고,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진백달, 강등교등 모두 10명이 이 '세기적 재판'의 피고인석에 섰다. 당시 장춘교등은 변호사의 변호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작붕등은 변호사를 선임해서 변호를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작붕은 전혀 예상도 못하게 나에게 한 가지만을 말했다. 즉, 그는 '식대체, 고대국(識大體, 顧大局)'하는 사림이며, 첫째, 그는 억울하다고 호소하지 않고, 둘째는 아무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누구이 노선을 집행했다'고 말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책임을 벗을 수 있는 길이었는데, 그는 한번도 '나는 임표의 결정을 집행했다'는 류의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작붕의 변호사였던 장사지(張思之)의 말이다.

 

기소장에는 이작붕에 대하여 주로 세 가지를 문제삼았다: 해군내부에서 간부를 박해했다; 모주석의 남순담화내용을 비밀리에 보고했다; "9.13사건"때 산해관 공항을 처리하는 문제에 있어서, 주은래총리의 임표 전용기는 반드시 4명의 수장의 공동지시하에서만 출발시킬 수 있다는 지시를 임의로 고쳤다

 

소위 모주석의 남순담화내용을 비밀리에 보고했다는 것은 바로 1971년 9월 6일, 이작붕은 모택동이 각지 책임자들과 담화한 내용("단결하여야 하고, 분열을 꾀해서는 안된다; 광명정대해야 하고, 음모궤계를 꾀해서는 안된다"는 등)을 비밀리에 보고한 후, 그날로 무한에서 북경으로 되돌아왔고, 각각 황영승과 구회작에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황영승은 밤중에 전화로 북대하의 섭군(葉群, 임표의 처)에게 얘기했다. 기소장에 따르면, 이로 인하여 임표가 모택동을 모해하는 행동을 취하도록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표, 섭군등이 도망가기 전에, 주은래총리는 임표가 탄 256호 전용기는 반드시 주은래, 황영승, 오법헌, 이작붕의 4사람이 함께 명령해야 비행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기소장에는 이작붕이 해군 산해관공항에 명령을 하달 할 때, 비행을 저지시키는 여하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부하의 보고에 그저 '직법 총리에게 보고할 수 있다'는 말로써 시간을 지연시켰다. 임표의 비행기가 떠난 후에는 전화기록을 변조시켰다.

 

"그는 어쨌든 이작붕이다. 그 자신의 혁명생애가 있고, 장기간의 영광된 역사가 있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사고능력이 있었다. 변호때 그는 자신의 주장을 얘기했다. 다만, 그가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어쨌든 문학때 적선에 올라탄 것이니까. 정치상의 잘못이 있을 뿐아니라, 확실히 엄중한 조히행을 범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재판에 대하여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증거가 있다면 처벌해야할만큼 처벌해달라는 것이다. 그가 부담하여야 할 책임은 그가 다 부담하겠다는 것이다. 군인으로서 그는 이 점에 있어서, 태도가 명확했다."

 

장사지는 기억하고 있다. 이작붕은 재판기일을 5번 열었다. 최후진술때, 재판장 오수권(伍修權)은 시작하자마자 이작붕은 몸이 좋지 않으니, 읽지 말라. 네가 쓴 것을 우리에게 제출해라. 우리가 참고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이작붕은 "내가 직접 말하겠다. 내가 반드시 끝까지 읽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사이에 그의 심장병은 2,3번 발작을 일으켰고, 매번 법정에서 최소한 20분씩 휴식했다. 그의 또 다른 변호사인 소혜어(蘇惠漁)는 인터뷰과정에서 이런 말도 했다. 이작붕은 산소를 흡입하면 바로 스스로 피고인석으로 돌아갔다고. 그의 생각에 이작붕의 이런 성격은 그가 여러해동안 군인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인민일보>> 1980년 12월 23일자 사건재판에 관한 보도를 보면, 이작붕은 인정하고 있다: 그가 하룡, 섭검영, 나서경을 모함한 것은 범죄이다; 문화대혁명중 해군에서 대량의 간부과 군중이 모함과 박해를 받았는데, 그는 지휘책임이 있을 뿐아니라 직접책임도 있다; 그는 9.13사건에서 산해관공항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즉, 그가 주은래총리의 임표전용기는 반드시 4명의 수장이 공동지시해야 비행할 수 있는 지시를 임의로 고친 것)에 대하여 과거에는 '잘못은 있지만 죄는 인정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잘못도 있고 죄도 인정한다'고 바꾸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작붕은 기소장에서 지적한 범죄사실에 대하여 일부 구체적인 문제는 해명을 했다고 한다. 모주석의 남순담화내용을 비밀리에 보고했다는 것에 대하여, 그는 "내가 적극적으로 알아본 것이 아니다", "유풍이 나서서 나에게 얘기해 준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군간부와 군중을 모함, 박해한 문제에 대하여 그는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모두 내가 직접 모함 박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특별법원에서 신중하게 고려하기를 요청한다. 뇌영통등 3사람이 박해받아 죽은 것에 대하여는 나는 완전히 승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은래총리의 임표전용기의 비행에 대한 지시를 임의로 고친 것에 대하여는 "나는 현제 이 죄행을 유보적으로 승인한다"고 말했다. 법원은 최종적으로 이작붕이 반혁명집단을 조직하고 지휘한 죄, 정부전복음모죄, 무고박해죄를 인정해서, 그에게 유기징역 17년, 정치권리박탈 5년에 처했다.

 

임표에 좋지 않은 말은 하지 않고, 선은 그으려고 했다.

 

당시 변호했던 것을 회고하면서, 소혜어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우리의 변호는 비교적 정상적이었다. 기소장에서 말한 그가 황영승에게 모택동의 남순담화의 내용을 밀고했다는 죄행은 빠졌다. 비행을 허용한 것은 그의 죄행중 가장 엄중한 것이었다. 나중에 그래도 법원에서 인정을 했다. 그러나, 자세히 기소장과 판결서를 살펴본다면, 거기에는 말하는게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판후 장사지와 소혜어가 이작붕을 만났을 때는, 이작붕은 한편으로 변호사들이 북을 건드리기만 했지, 제대로 울리지는 못했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변호사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하면서 오히려 감사한다고 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시를 썼는데, 20년후에 변호사들에게 보여주겠다고도 했다.

 

이후, 소혜어는 이작붕을 만나지 못했다. 장사지는 그러나 이작붕이 석방된 후 그의 북경에 있는 집에 찾아가본 적이 있다. 그리고 그가 1980년 부흥의원에서 쓴 <<평율사(評律師)>>라는 시를 보았다.

 

존경공정인(尊敬公正人), 천지무편심(天知無偏心)

관방변호사(官方辯護詞), 화상조염경(和尙照念經)

존명방풍험(尊命防風險), 명철가보신(明哲可保身)

변고고양하(邊鼓敲兩下), 유성승무성(有聲勝無聲)

 

공정을 존경하는 사람, 하늘은 마음이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정부가 정해준 변호사의 말은, 중들이 불경을 읽는 것처럼 똑같은 소리만 한다.

위에서 명을 받아서 불의의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니, 스스로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길이다

북을 부던 두드리는데, 소리가 나는 것이 안나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아래에 주석을 달았다: "변호사의 변호사는 말은 정부에서 수정을 거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원고대로 읽었다."

 

"그는 우리가 그를 위해서 약간의 말을 해주지만, 그래도 정부에서 하는 일이니까, 우리의 변호가 그저 북의 가장자리나 살짝 두드리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변호사들을 모욕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너희에 대한 불공정한 역사의 평가가 아닌가? 그러면 나는 말했다. 이건 이상할 것도 없다. 그가 만일 완전히 공정하게 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그가 우리를 해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작붕이 아닌 것이다. 그가 문제를 그의 입장에서 봤다면 분명히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소혜어의 말이다.

 

다만, 장사지는 이작붕에 대하여 아주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작붕이 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들었다. 현재 나는 이작붕이 말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이 사람은 아주 정직하다. 이작붕이 해야할 말은 다 말했다." 장사지의 말이다. 당시 아작붕이 '문혁'기간에 허세우를 보호한 일도 실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는 대국관이 있다. 모택동이나 주은래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임표도 더더욱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도 임표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임표를 연구한다는 그 역사학자는 이작붕이 임표에 대하여 나쁜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년에 임표와 선을 긋고 싶어했다. "그는 임표 초기의 업무관계는 정확하고, 임표가 나중에 배반한 것은 임표의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자주 나영환(羅榮桓)의 부인 임월금(林月琴)을 찾았다. 그녀와 연락을 많이 했다. 그녀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이걸 도와줄 수 있느냐? 그래도 그는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학자는 이작붕뿐아니라, 오법헌, 구회작도 모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고위층에서 굴러떨어진 후, 죽어라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다."

 

이작붕등이 임표와 공모하여 모택동에 대항하려 하였는지에 대하여, 이 학자는 "그는 절대 모택동에게 여하한 해도 끼치지 않았다. 모택동에 대하여는 너무나 존경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작붕이 감옥에서 나온 후 처음에는 태원(太原)에서 거주하다가, 나중에 북경으로 옮겼다. 그는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작붕과 연락을 갖고 있었던 장사지에 따르면, "이작붕은 현재 마음상태가 아주 평화롭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예를 들어보겠다. 그는 노홍군이다. 산서는 그에게 매년 5만위안의 의약비를 특별히 배려했는데, 그는 한번도 다 쓰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 입원할 때도 좋은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두 하급기준으로 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다. 그는 만일 지금 다시 쓰라면 나는 절대 변죽만 울리게 쓰지 않겠다고 했다. 나도 현재 만일 당신을 위해서 변론하라고 한다면 나도 그 당시처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 아닌가?"

 

다만 임표를 연구한 위의 역사학자는 이작붕의 인품에는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그는 1986년을 전후하여, 이작붕의 아들인 이빙천(李氷天)과 연락을 했고, 이작붕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다. 이작붕은 거절한 후, 산서성 공안청에 서신을 보내었는데, 그의 의복과 노트북을 도둑맞았으며,누군가 그를 해치려고 한다고 했다. 거기에는 이 학자에 대하여도 많이 써놓았는데, 그가 임표사건을 뒤집으려 한다고 하였다. 산서성 공안청은 이 서신을 공안부로 보내고, 공안부는 다시 총정치부로 보내고, 총정치부는 다시 이 학자를 찾아서 얘기했다: 더 이상 개입하지 말고 말년의 절개를 유지해라.

 

"9.13사건"은 중국근대사의 최대수수께끼중 하나이다. 정부의 공식입장은 정리되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의견이 제각각이다. 이작붕의 회고록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아마도 역사사건의 핵심열쇠를 풀어줄 수 있을까? 너무 많이 기대해서는 안될 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