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창(劉暢). 환구인물 2008년 제2기
호요방의 자녀들의 이력을 뒤져보면, 모두 성공한 인사들이다. 장남 호덕평(胡德平)은 중앙통전부 부부장, 전국공상련 부주석이며, 차남 유호(劉湖)는 화윤집단 상무동사, 부총경리이며, 삼남 호덕화(胡德華)는 1990년대에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센터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과학기술개발, 조림식수, 간척사업등에 걸쳐 있다. 딸인 이항(李恒, 胡滿妹)은 중화의학회 부비서장이고 모 외국계기업의 고위관리직에 있다.
"나는 여러번 모친에게 나의 출생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기억안난다'는 것이었습니다" 호덕화는 이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1948년 11월, 병단정치부 주임을 맡고 있던 호요방은 태원전투의 전선에 나가 있었고, 부인 이소(李昭)는 후방의 석가장에 있었는데, 출산이 임박했다. 석가장은 국민당의 기습을 받아, 이소는 경비의 도움을 받아 이전했다. "모친은 겨우 석탄운송차에 올라탔는데, 개략 하루이틀 달려가서 도중에 나를 낳았답니다" 호덕화는 스스로 추산해보고서는 하북성 정형(井陘)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집안에는 이미 두 명의 남자아이가 있었으므로, 부모는 모두 딸을 원했었다. 그가 출생한 후, 부친이 전선에서 말을 전해왔는데, "남자아이라면, 돌아가서 볼 것도 없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부모의 실망속에 호덕화는 묵묵히 인간세상으로 왔다. 출생지도 없었지만,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아명만 있었고, 정식 이름도 없었다.
"현재의 말로 하자면, 나의 부모는 전형적인 워콜릭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신경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살아라는 것이었습니다" 호덕화와 형제들은 외할머니에게 데려가서 자랐다.
1950년봄, 사천북부지역이 공산당의 수중에 들어왔다. 호요방은 식구를 데리고 사천으로 갔다. 온 가족이 만났을 때, 호요방의 부친은 아명만 가지고 정식 이름을 갖지 못한 아이들을 보고는 가보를 정중하게 끄집어 냈다. "할아버지가 선포하였습니다. 부친의 항열은 요(耀)자였고, 저희는 덕(德)자였습니다. 그리하여 순서에 따라, 평(平), 안(安), 발(發), 재(財)로 불렀습니다" 그리하여, 호요방의 장남은 호덕평, 차남은 호덕안, 삼남은 호덕발(胡德發)이 되었다. 이후 북경에서 유치원에 들어갈 때, 덕발의 '발'자는 번체자로 쓰기가 너무 어려워서, 유치원의 선생이 '호덕화'로 바꿔 주었다. 당시 아이 이름을 어떻게 지을 것인지, 적당한지 아닌지에 대하여 호요방 부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1952년, 호요방 부부는 사천의 남충에서 딸을 낳는다. "집안 사람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외할머니도 손자, 손녀가 다 있다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동생의 이름은 만매(滿妹)라고 짓게 됩니다." 호덕화가 보기에, 집안에서 막내이면서 딸이어서 아주 사랑을 많이 받았다. 만매는 나중에 군에 들어가서 비로소 '이항'으로 이름을 고치고, 모친을 따라 이씨로 바꾼다.
같은 해에 호요방은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당 중앙서기에 임명된다. 다음 해, 이미 4살이던 호덕화는 사천사투리를 하면서,모친을 따라 북경으로 왔다. 호덕화의 기억에 의하면, 부모가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였다. 모조리 맡기는 것이다. 기숙학교를 찾았다. 만매의 회고록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어릴 때, 부친은 나에게 있어서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낯이 아주 익지도 않았다. 최소한 친근함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정도 나와 한번도 놀아주지 않은 부친을 무서워했었다. 모친은 일만 했지, 집은 신경쓰지 않았다. 1952년 나는 부친을 따라 북경에 왔는데, 얼마되지 않아, 북경의 면방업체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공장이 집이었다. 내 기억에 모친은 나를 딱 한번 안아주었다. 그러나 내가 호기심에 손을 뻗어 반짝이는 안경을 만지자, 그녀는 '철썩'하고 내 뺨을 때렸다. 나는 놀라서 엉엉 울었다. 외할머니가 황급히 모친의 품에서 나를 빼앗았고, 볼멘 소리를 했다. '한번도 아이를 안아주지 않더니, 한번 안으면서 어떻게 때리냐' 그러자 모친이 말했다: '얘가 안경을 망가뜨리면, 저는 내일 어떻게 일을 하라구요'"
호요방(후야오방)의 네 자녀는 3개의 성씨를 지니고 있다. 각각 부모의 성을 따서, 호(胡)와 이(李)씨성을 가진 외에, 유(劉)씨도 있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자로 보내어진 차남의 성이다.
1945년 겨울, 호요방은 기열요군구의 정치부주임을 맡고 있었고, 전선에 나가서 일을 했다. 이소도 함께 전투에 참가했다. 어쩔 수 없이, 호요방 부부는 40일도 되지 않은 차남을 섬서북부 농촌의 유세창(劉世昌)에게 주어버린다. "부친은 3가지 조건만 요구했습니다. 하나는 아이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 것, 둘은 나중에 아이를 학교에 보낼 것, 셋은 자유연애로 결혼하게 할 것. 부친은 아이에게 그 사람을 따라 유씨로 하도록 하였는데, 유세창은 절충적인 방안으로 유호(劉湖)라고 하였다. '호(湖)'는 '호(胡)'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두 성을 한꺼번에 쓴 것이다"
호덕화는 태어나면서부터 둘째형을 보지 못했다. 이때 헤어진 후에 10여년간 서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해방후 유세창 일가는 전전하여 청해(靑海)로 가게 된다. 그는 호요방의 부탁을 잊지 않고, 집안에 먹을 것도 모자라는데, 유호는 학교를 보냈다. 13세때 유호는 소학교를 졸업했고, 학업성적이 우수하였다. 그 동안 호요방은 아들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호요방이 이미 북경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을 알고는, 유세창과 처는 여러번 망설이다가, 힘들게 키운 유호를 북경으로 돌려보낸다. "부친은 유세창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는 둘째형의 머리를 치면서 말했습니다. '기억해라. 유세창은 영원히 너의 부친이다!'" 이후 매번 겨울방학 여름방학이 되면, 유호는 유세창 부부를 보러 갔습니다.
"문혁"시대에, 호요방은 "주자파"로 몰린다. 그리하여 하남성 횡천현 황호농장에서 노동을 한다. "모친은 격리심사를 받았고, 나이 칠순인 외할머니는 안휘 고향집으로 보내어졌다. 부친의 비서, 기사도 모두 가버렸다. 만매는 혼자서 큰 집에 살았다. 수십칸의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호덕화는 당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의 꿈은 청화대학에 합격하여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자마자, 북경시정2공사로 보내어졌고, 도로수리를 맡았다.
호덕화가 기억하기로, 모친은 부친보다 더 일찍 타격을 받았다. "문혁" 기간동안 상황은 아주 참혹했다. 그녀는 혈혈단신으로 소우리에서 1년여를 보냈다. 그러나, 강인한 그녀는 한번도 자신이 '문혁'기간동안에 겪었던 고난을 얘기한 적이 없다.
'문혁'때문에, 유호는 예비기간이 가장 길었던 당원이라고 호덕화가 웃으며 말한다. "둘째형은 그때 청화대학 화공과를 다녔는데, 1966년 5월, 예비당원이 됩니다. 일반당원의 예비고찰기간은 1년인데, 그는 입당한지 1년만에 '문혁'을 만났고, 1980년대에 정식당원이 되기까지 10여년을 예비당원으로 있었습니다"
큰형 호덕평도 '문혁'때문에 운명이 바뀌었다. 1962년, 그는 북경대학 역사과에 입학한다. 바로 1967년에 졸업하기 전날, 등소평, 호요방이 '주자파'로 타도대상이 되면서, 등박방과 호덕평도 '흑오류(黑五類)'자녀가 되어버린다. "큰형은 북경대학에서 타도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심신이 극도로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의 큰 형은 어렸을 때 아주 장난꾸러기였는데, 나중에 착실하고 온건하게 바뀌었습니다"
"문혁"후에 호덕평은 중국사상사연구의 대가인 후외려(侯外廬) 교수의 석사연구생이 된다. 졸업후에 역사박물관에서 연구업무를 한다. 1984년, 호덕평은 중공중앙정당영도소조의 특파원이 되어 호북성으로 간다. 그곳에서, 그는 한때 떠들썩했던 이론간행물을 창간한다. 북경에 돌아와서, 호덕평은 중공중앙통전부의 비서장을 지내고, 나중에 통전부 부부장으로 승진한다.
1973년, 호덕화는 중경통신학원에 합격한다. 졸업후에는 남경통신학원에서 교수가 된다. 그는 이후 남경에 10년간 머문다. 1986년, 호덕화는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연구센터에 들어가 일을 한다. 그는 자기의 꿈은 과학구국이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과학자가 되어야 국가에 가장 많이 공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호덕화는 생각이 바뀐다. 특히 부친이 죽은 후, 그는 상사의 격려하에 사업에 뛰어든다.
호덕화는 아주 솔직하게 얘기한다. "우리는 부친보다 많이 못합니다. 부친의 기개와 실사구시의 태도는 아무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서로 연결이 있다면, 그것은 호씨집안 사람들의 공통된 취미인 독서일 것이다.
"부친의 문화수준은 높지 않았습니다. 14살때 혁명에 참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전쟁시대이건 평화시기이건, 부친은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일 1만자를 읽으면 14년이면 학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호덕화는 부친이 읽은 책제목을 보면 합계 5000만자에 이른다고 하였다.
호요방의 자녀들은 부친에 대하여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호덕화는 부친이 자신을 비판하던 상황을 기억하면, 마음이 아직도 어지럽다고 한다. 부친이 가장 사랑했던 여동생마저도 부친의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었다고 한다
1968년에 만매는 북경시로 와서, 제지공장에서 노동자로 지내다가, 다른 사람들이 차례로 군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그녀도 부친이 진찰기야전군3종대에 있을 때의 파트너로 당시 북경군구사령관을 지내고 있던 정유산(鄭維山)을 찾아갔다. 그녀는 경비에게 '나는 호요방의 딸이다. 정사령관에게 내가 군대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말을 전해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나는 병종이 뭐든, 근무지가 어디든 신경쓰지 않았다. 기쁘게 당시 전군최대의 백각장 농장으로 갔고, 사단병원에서 위생병이 되었다" 몇년간 군인으로 지내다가, 만매는 곁에 있는 전우들이 하나 둘 대학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고민끝에 부친에게 편지를 써서, 부친이 관계를 이용하여 대학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기를 기대했다.
호요방은 금방 회신을 보내왔다: "너는 원래 공장에 분배되었다. 나중에 군대에 간 것은 내가 몰랐었는데, 내심으로는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뒷문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대학에 가고싶다고 하니, 내 생각에는 네 자신의 능력으로 해라. 우리 집안 사람들은 뒷문으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자기의 노력을 통하여 자기의 꿈과 이상을 실현시켜라..."그때의 만매는 부친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편지를 좍좍 찢어버렸다.
지금은 모든 것이 지난 일이다. 온갖 풍상을 겪은 호씨집안 자녀들은 평안하게 살고 있다.
'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 > 역사인물 (문혁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멍쉐농(孟學農): 두번째 문책사임 (0) | 2008.12.29 |
---|---|
오계현(吳桂賢): 중화인민공화국 최초의 여성부총리 (0) | 2008.12.18 |
공덕성(孔德成) : 공자의 77대 직계 후손 (0) | 2007.08.29 |
성사위(成思危) : 전인대부위원장 (0) | 2007.05.20 |
옐친과 중국의 인연 (0) | 2007.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