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제갈량)

마속(馬謖)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

중은우시 2008. 8. 4. 16:01

글: 문재봉(文裁縫)

 

마속(馬謖)의 자는 유상(幼常)이며, 양양(襄陽) 의성(宜城) 사람이다. 마속은 형주에서 유비를 따라 촉으로 들어갔고, 면죽현령, 성도현령, 월준태수를 역임했다. 군사에 재능이 있어, 제갈량이 아주 높이 평가했다. 유비는 생전에 제갈량에게 마속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마속은 실질보다 말이 앞서니, 크게 쓸 수가 없다. 그대가 잘 살펴보아라"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고, 여전히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썼다.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할 때, 마속은 확실히 적지 않은 공을 세웠다. 그는 억지로 복속시키려 하면 안되고, 마음을 얻는 것이 상책이며, 힘으로 싸워서 이기는 것은 하책이라고 하였다. 제갈량은 그의 계책을 채택하여, 맹확을 칠종칠금(七縱七擒)함으로써, 결국 남방을 얻을 수 있었다. 총한 건흥6년(228년)에 제갈량은 제1차북벌을 감행한다. 마속은 친히 주력군을 이끌고 오늘날 백수강에서 기산(祁山, 지금의 감숙성 기현의 동쪽)을 맹공한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 조조의 위나라는 많은 땅을 촉한에 빼앗긴다. 제갈량은 승세를 틈타 추격하는데, 마속을 선발해서, 마속으로 하여금 전군이 나아가기 전에 가정에서 위나라군과 싸우도록 한다.

 

위나라를 북벌하는 것은 촉한정권의 생사존망이 걸린 중대한 의사결정이었고, 촉은 이를 위하여 장기간의 준비를 해왔다. 촉군은 먼저 몇차례의 전투에서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가정에서 벌인 위나라군대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제갈량은 사람을 잘못 써서, 마속의 실책으로, 전술상 피동적으로 몰려버리고, 위나라군대에 대패한다. 제갈량은 부득이 한중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촉한의 제1차북벌은 이로써 좌절된다. 그리고 이러한 실패의 주요한 원인은 제갈량이 아꼈던 마속으로 인한 것이었다. 마속은 가정전투에서 임의로 총사령관의 명령을 위배하여, 병사와 장수를 잃었고, 땅을 잃었다. 그리하여 촉한의 광복대업을 망친 것이다. 군법을 엄히 하고, 사기를 돋우며, 다시 북벌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참한다(소위, 읍참마속). 병사를 일으켜 승리도 거두지 못하고, 아끼는 수하장수는 목을 쳐야만 했으니, 제갈량으로써는 아주 가슴아픈 사건이었다.

 

이 이야기는 일찌감치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었다. 228년 늦봄, 한중의 감옥에 갇히어 군법의 처분을 기다리던 마속은 공개적으로 참수를 당한다. 마속은 형을 집행하기 전에 제갈량에게 글을 써서 올렸다: "승상은 나를 아들처럼 대했고, 나도 승상을 부친처럼 존경했습니다. 저는 비록 죽지만 황천에 가서도 아무런 한이 없습니다" 참수할 때, 제갈량은 눈물을 뿌렸다. 한중의 십만촉군의 장병도 누구 하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역대로 사람들은 마속이 가정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스로 죄를 벌해달라고 청하면서, 제갈량의 군영으로 되돌아왔다고 알고 있고, 제갈량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를 참했다고 알고 있다. 경극중 <<실가정(失街亭)>>은 바로 이러한 이야기를 읊고 있다.

 

나관중은 <<삼국연의>> 제95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속은 군령장을 썼고, 왕평을 부장으로 하여 병사 2만오천을 이끌고 가정으로 나가 지켰다. 가정에 도착한 후, 병법에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파죽지세로 이길 수 있다'는 것과 '사지에 빠진 후에 살아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제갈량의 길입구에 병영을 두라는 당부를 따르지 않고, 왕평의 '위나라군대가 우리의 물을 끊을 수 있다'라는 경고도 듣지 않고, 병사들을 산머리에 주둔시킨다. 나중에 위나라장수 사마의가 장합과 군대를 이끌고 도착한 후, 마속을 포위한 후 오랫동안 공격은 하지 않았다. 물을 끊어버리자, 마속은 싸우기도 전에 혼란이 왔다. 사마의는 나중에 화공을 써서, 마속을 대파하고, 마속은 겨우 도망쳐 돌아온다. 가정을 잃은 후, 전방의 촉군은 거점이 없어지게 되었고, 물러날 곳도 없어지게 되었다. 할 수 없이 한중까지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마속은 스스로를 묶고 장막 앞에 꿇어앉았다. 공명은 얼굴색이 변해서 말했다: '그대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잃어서 전법을 잘 알고 있는데, 내가 여러번 당부하고 경고했다: 가정은 우리의 근본이다. 그대는 전 집안의 목숨을 걸고 이 중요한 임무를 맡으라고. 그대가 왕평의 조언을 들었더라면 어찌 이런 화를 입었겠는가? 이제 전투에 패하고 장병을 잃었으며, 성과 땅을 빼앗겼으니, 모두 그대의 잘못때문이다. 만일 군율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군대를 통솔할 수 있겠는가? 네가 오늘 군법을 어겼으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 그대가 죽은 후, 그의 집안 가솔들은 내가 매월 녹봉과 양식을 보내줄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는 좌우에 그를 끌어내서 참수하게 했다." 제갈량은 글을 올려 스스로 3등을 강등당했고, 마속은 군영에서 죽음을 받았다. 참수할 때, 전군이 눈물을 흘렸다. 제갈량도 대성통곡했다. 이것이 소위 '읍참마속'의 고사이다. 후세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실수가정죄불경(失守街亭罪不輕)

감차마속왕담병(堪嗟馬謖枉談兵)

원문참수엄군법(轅門斬首嚴軍法)

식루유사선제명(拭淚猶思先帝明)

 

가정을 잃은 죄는 가볍지가 않도다

마속이 헛되이 병법을 논한 것을 한탄한다.

목을 잘라 궁법을 바르게 하고,

눈물을 닦으며 생각하니, 선제(유비)의 사람보는 눈이 뛰어났구나.

 

<<삼국연의>>에서 이 장면은 아주 잘 썼다. 읽다보면, 깜짝 놀랄 정도이다. 사실상 이것은 모두 소설가의 예술적인 가공이다. 사실은 이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가정을 잃은 후에 마속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삼국지>> 및 배송지의 주석에는 다섯 곳을 언급한다. 그것들을 종합해서 살펴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제갈량전>>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제갈량이 (마)속을 죽여 군중들에게 보였다" 이와 동일한 견해를 견지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사서가 있다. <<왕평전>>: "승상 (제갈)량은 마속과 장군 장림(張霖), 이성(李盛)을 주살했다". <<마량전>>에 붙은 <<마속전>>에는: "(마)속이 하옥되어 물고(物故, 죽었다)했다. (제갈)량이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몇개의 다른 사서에서는 이것과는 서로 다른 기록이 있다: <<향랑전(向郞傳)>>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향)랑은 평소에 마속과 잘 지냈다. (마)속이 도망갔는데, (향)랑이 그 사정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았다. (제갈)량이 그를 미워해서, 관직을 파면하고 성도로 불러들였다" 향랑은 당시 승상장사(丞相長史)였고, 군대를 따라 전투에 나가 있었는데, 평소에 마속과 교분이 깊었다. 이 기록의 가치는 아주 높다. 그 의미도 아주 분명하다. 가정전투이후, 마속은 스스로 자수하여 처벌받은 것이 아니라, 겁을 내서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향랑은 그 사실을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아서, 제갈량에게 파면당한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제갈량이 죽은 후에야 향랑은 비로소 다시 나와서 관직을 맡았고, 수십년간 관리로 지냈다.

 

<<마속전>>의 배송지 주석에는 <<양양기>>의 기재를 인용하고 있다: "(마)속이 임종할 때 (제갈)량에게 글을 써서 말하기를: "공명공께서 속을 아들처럼 여겼고, 속도 공명공을 부친처럼 여겼었다. 원컨데 곤(鯤, 우임금의 부친. 황하를 다스리지 못하여 죽임을 당함)을 죽이고 우(禹, 황하를 다스려 천하의 인심을 얻고 왕이 됨)를 썼던 뜻을 깊이 헤아려 주신다면, 속이 죽어서 황천에서도 아무런 한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십만의 무리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제갈량은 스스로 제단을 마련하고 마속의 후손을 평생 돌봐주겠다고 하였다. 장완이 제갈량에게 말하기를, "초의 동쪽에서 신하를 얻으니 후진의 문공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알 수 있다.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는데, 지혜있는 선비를 죽이다니 너무나 아까운 일이 아닌가?' 그러자,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손무가 천하를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은 군법을 바르게 했기 때문이다. 양간이 법을 어지럽히자 위강은 그의 종을 죽였다. 사해는 분열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만일 다시 법을 없앤다면 어찌 도적을 물리칠 수 있겠는가?" 나중에 제갈량은 그의 자손을 자기 자식처럼 잘 돌보아 주었다. 이 이야기를 보면, 마속이 죽기 전에 제갈량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서신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제갈량이 곤을 죽이고 우를 채용한 이야기를 본뜨도록 한 것은 자기의 자식을 제갈량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이상의 관련 기록을 보면,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마속은 가정의 전투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에 넘쳐 제갈량의 당부를 따르지 않고, 결국 참패하게 된다. 이리하여 농우삼군을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리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촉한의 대군은 한중으로 물러난다. 가정에서 패배한 후, 마속은 <<삼국연의>>에서처럼 스스로 제갈량을 찾아가서 죄를 받겠다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실패한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죄를 받을 것이 겁이나 도망치게 된다. 그리고 승상장사의 직에 있던 향랑은 그와의 교분때문에 혹은 그의 재주를 아껴서 이 사정을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속은 결국 붙잡히고, 제갈량에 의하여 처형당한다. 그러나 처형을 하기도 전에 마속은 감옥안에서 죽어버린다. 어떤 학자는 <<제갈량전>>, <<왕평전>>에서 말한 마속을 "죽이다"는 것은 그를 사형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상은 사서에 나오는 마속의 죽음이다. 제갈량이 친히 제사를 지내면서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십만의 병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그의 후손을 평생 돌봐준다. 이처럼 참하면서 다시 그를 긍휼이 여기는 것은 아주 복잡한 원인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먼저, 마속은 유비가 말한 것처럼 "말이 실질보다 앞서는 인물이어서 크게 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마속을 참군으로 삼고, 매번 그를 불러서 병법을 논하면 밤을 새우곤 했다" 이런 요인으로, 가정을 잃은 후에, 제갈량은 글을 올려 스스로 3등급을 강등되도록 청한다. 이는 (1) 마속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것을 나타내고, (2) 유비의 부탁을 중시하지 않아서 기산의 노력이 헛되게 된 것을 자책하는 것이다. 제갈량은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 엄격하였는데, 한편으로는 글을 올려 자신을 강등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마속을 처형했다. 이런 서로 모순된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부득이한 것이다.

 

사실, 제갈량은 마속의 재능을 아꼈다. 마속은 제갈량이 맹획을 붙잡을 때, 제갈량에게 마음을 얻을 것을 건의했고, 작전중에 제갈량은 이런 전략방침을 채택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남방을 안정시킨 것은 마속의 공이 적다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으로, 마씨형제는 형주일대에서는 아주 명성이 있었다. 그중에 "백미(白眉)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마량(馬良)은 제갈량을 '존형(尊兄)'으로 칭했다. 배송지는 <<삼국지>>의 주석에서, "마량은 제갈량과 결의형제를 맺었거나 친척관계에 있었다. 제갈량의 나이가 많아서, 마량은 제갈량은 '존형'이라고 불렀다" 이 기술로 보면, 마씨형제와 제갈량의 교분은 보통이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 재능을 갖추어, 제갈량은 비록 법에 의해 마속을 처벌하지만, 어땠든 인재가 필요한 때였으므로 아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위 '읍참마속'은 비교적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그가 마속의 유가족을 잘 돌봐주었다는데서도 이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나중에 <<삼국연의>>에서는 마속이 죄가 두려워 도망친 일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여기에 예술적인 가공을 더했는데, 이는 아마도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감동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제갈량이 읍참마속한 이야기는 여러 역사이야기 중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할 점을 남겼다. 특히 '천하제일재자'로 칭송받는 나관중은 이것을 인구에 회자되는 <<삼국연의>>에 써두었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역사적인 원인으로, 이 소설은 유비를 높이고 조조를 낮추는 경향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많은 인물, 사건에 대하여 예술적으로 가공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모두 소설에 의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