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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중관촌(中關村)의 변천

by 중은우시 2009. 1. 11.

 

 

 

글: 이락(李樂)

 

현재의 택시는 이미 더이상 화물차로 쓰이지 않는다. 예전에 중관촌의 초기단계인 1993년에는 이곳을 다니던 노란색 몐디(麵的, 소위 "빵차")를 불러서 물건을 실어보내는 용도로 썼다.

 

당연히, 현재의 중관촌 상인들이 "택시를 불러서 물건을 보내는 일"은 아주 드물다. "유상(遊商, 떠돌이상인)"에서 "좌상(坐商, 고정상인)"에서 "기업(企業)"까지, 중관촌은 이미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중관촌의 창업자들은 여전히 북대(北大, 북경대학)가 남쪽 벽을 허물어버리던 연대를 그리워하고 하면서, 그 때 얘기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렇지만, 중관촌의 '진화'는 이런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발걸음을 조금도 멈추지 않고 있다.

 

전자일조가(電子一條街)

 

노인 장덕청은 누렇게 변한 <<과기일보>>를 보여준다. 발행일자는 1986년 7월 21일이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신문매체에서 "전자일조가"('전자일번지'라는 정도의 의미임)라는 보도를 보았고, 그는 바로 전자일조가의 최초의 전자시장 사해시장(四海市場)의 창시자이다.

 

"사해시장은 처음에 장사하던 곳이다" 장덕청의 회고이다. 원래 1983년, 시장경리인 장덕청은 많은 과기회사들이 판매점포를 차릴 장소가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그는 영업점포를 임차해줄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방식은 효과가 좋았다. 중국과학원 해전구컴퓨터시스템회사를 포함한 10여개의 전자제조기업이 장덕청과 임대계약을 체결했다. 그때 장덕청은 아마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중관촌 "전자일조가"연대의 중요한 기점중 하나가 될 줄은. 비록 이 시장은 2000년에 4환로를 만들면서 철거되기는 했지만.

 

1985년이후, 전자일조가의 성공적인 발전과 이 거리의 존재는 직접적으로 북경하이테크과기원구(즉, 중관촌과기원구의 전신)를 설립하게 만든다. 1987년, 해전구공소사는 오늘날의 중관촌 과무중심의 장소에 3층짜리 건물을 짓는다.

 

나중에 중국의 1세대 IT기업을 대표하는 롄샹(聯想, Lenovo, 당시는 Legend)과 쓰통(四通, Stone)이 차례로 입주한다. 다만, 이전에 북경시정부는 중앙과기원구의 정책우대조치를 받아내기 위하여, 이 건물을 지으면서, 한때 유명했던 해전구과기경제횡향연합성과전람회를 개최한다. 당시의 <<인민일보>>에서는 시리즈로 보도한다. 이후 얼마되지 않아, 북경하이테크기술과기원구가 정식으로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고, 전자일조가에 대한 각종 논쟁과 이견은 바로 일소된다.

 

여러해 이후, 이 3층짜리 건물은 철거되었고, 더욱 높은 중관촌과무중심으로 된다. 그 3층짜리건물의 건물주는 지금 해룡(海龍)빌딩이라는 중관촌의 랜드마크적인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대중관촌시대

 

이후의 중관촌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1999년, 중앙정부는 북경시기술산업시험구를 중관촌과기원구로 개명한다. 이후, 중관촌은 더이상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서성구, 풍태구, 해전구에 "중관촌과기원구"가 속속 나타난다.

 

일찌기 중관촌관리위원회 정책연구실주임을 역임했던 자오무란(趙慕蘭)은 대중관촌시대에 중관촌은 마침내 "1구7월(一區七園)"의 국면을 갖춘다. 1구는 바로 중관촌과기원구이고, 7원은 "서성원' '풍태원', '상지원'등 비중관촌지역의 과기원(科技園)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중관촌발전의 가장 우여곡절있는 때가 된다. "주로 행정권력의 분장이 불명확했다. 여러지역에 걸친 과기원을 설치하면서 프로젝트 심사허가, 기획, 설치등 일련의 문제에 있어서, 의사결정권의 귀속이 불분명했다. 도대체 중관촌관리위원회가 결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소재구의 구정부가 결정하는 것인지, 불분명했다. 그러다보니 쌍방은 왕왕 협상에만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그녀의 회고이다.

 

이 시대에, 중관촌은 마치 '광고'표어와 같았다. 기업유치의 명함으로 되어버린 것이다. 전자일조가의 시대에 비지니스가 시작되던 때와는 달리, 대중관촌시대의 키워드는 마치 "규결(糾結, 헝클어지고 엉킴)"인 것같다.

 

2004년말이 되어, 북경시정부는 마침내 이 상태를 바꾸기로 결심한다. <<중관촌과기원구관리체계개혁방안>>이 나온다. 그 후, 중관촌과기원구는 향후 현지관리를 한다. 관리위원회는 1구7원의 기획, 건설, 설계등 행정심사허가사항에서의 시급관리및집행권한을 각원이 소재하는 구급업무부서로 넘긴다. 그리고 기업가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기업가가 각원의 기획등 측면에서 일정한 발언권을 가진다. 대중관촌은 이것으로 그 시대의 종말을 고한다.

 

자유의 원점으로 회귀

 

"예전의 중관촌은 국가의 우대정책을 쟁취하기 위한 개념이 더욱 컸고, 모두 거기에 편승한 것도 다 이런 이유때문이었다. 진정으로 혁신과 연구개발을 하고자 한 것은 역시 2004년이후의 일이다." 자우무란의 말이다. 실제로, 이것은 중관촌으로 하여금 다시 시작할 때의 '자유의 원점'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권력투쟁이 지나자, 중관총는 마치 다시 '기업'의 수중으로 되돌아간 것같다. 비록 해룡(海龍)과 정호(鼎好)가 여전히 번성하고는 있지만, 다만 이 시대에 중관촌의 주역은 용여우(用友), Google과 같은 내외자기업이다. 그들은 대학의 주위를 둘러싸고, 기업의 혁신으로 자유를 이어가고, 중관촌의 발전역사를 이어간다.

 

북대건교100주년때, 전세계의 거의 모든 저명한 대학의 총장은 모두 초청을 받았다. 중관촌에 와서 총장포럼에 참가했었다. 그 해에 69개의 일본회사는 2.7억엔을 출연하여, 북경대학에 교사박물관(校史博物館)을 짓도록 했다. 그리고 북대도 영구적으로 과거 100년의 창상을 보류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렇게 하려다보니 또 문제가 나타났다. 류쥔닝(劉軍寧)이 '북대백년동학회'의 강연에서 탄식한 것처럼, "북대가 학교를 세운지 100년이 되었다. 사회는 그 전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중관촌은 이 시기에도 여전히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전에 중국인들은 습관적으로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와 이게 아니면 저것이다는 선택을 통해서 역량을 키웠다. 최근 20년은 모든 것을 '모릉양가(模棱兩可,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다)'에 의지하여왔다. 그러나, 지금은 순수하게 경제와 과학기술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중관촌의 자유정신은 바로 생생한 활력의 원천이다." 이는 저명한 시사평론가 링즈쥔(凌志軍)이 중관촌의 존재의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한 대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