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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방/북경의 오늘

어디까지 북경인가?

by 중은우시 2008. 11. 13.

글: 왕명삼(王銘三)

 

한 사람이 공주분(公主墳)에서 길을 일었다. 그래서 길가에서 카드를 치고 있는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 실례합니다. 북경은 어떻게 갑니까?"

 

그 어르신은 "괜찮소. 이쪽으로 동쪽으로 쭉가시오. 옆길로 빠지지 말고. 계속 걸어서 서너개 역을 지나서 부흥문(復興門)으로 들어가면 북경이오."

 

금방 북경에 온 외지인이라면, 분명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설마 공주분은 북경이 아니란 말인가? 북경에서 북경을 어떻게 가느냐니 정말 희한한 일이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길묻는 사람과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분명히 모두 토박이 북경사람이다. 왜냐하년 북경토박이의 북경에 대한 개념은 신북경인의 북경에 대한 개념과 틀리다.

 

1950년대초기에 필자가 막 북경에 왔을 때, 북경인의 마음 속에 있는 북경은 바로 성벽 안쪽의 땅을 가리켰다. 그 바깥은 북경이 아닌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물을지 모른다. "북경이 아니면 뭐냐?" "교외지역(郊區)이다." "교외지역도 북경이 아닌가?" "교외지역이 어떻게 북경이냐. 북경은 북경이고, 교외지역은 교외지역이다. 서로 다른 것이다."

 

갈수록 잘 모를 말이지 않는가? 그것은 당신이 북경토박이의 사고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북경에는 성벽이 있었다. 성벽은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경계선이었다. 성벽안에는 주택이 있고, 성벽의 바깥에는 경작지가 있다.  성벽안은 북경이고, 성벽밖은 하북성이었다. 성문은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경계이다. 성문은 도시와 시골의 접점이다. 성문의 위에는 문루가 있고, 성문의 아내에는 문동(門洞)이 있다. 성문동에는 두 개의 큰 대문이 있고, 천근갑(千斤閘)이 있었다. 낮에는 성문을 활짝 열고 드나드는 것이 자유롭지만, 저녁이 되면 성문을 걸어 닫는다. 성안에서는 나가지 못하고, 성밖에서는 들어오지 못한다. 만일 적군이 와서 성을 공격하면, 천근갑까지 내려닫아 걸어잠근다.

 

멀리서 왔는데, 성문까지 오니 문이 이미 닫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등 성문의 호성하(護城河) 바깥으로 50미터 도로의 양켠에 대차점(大車店), 계모점(鷄毛店), 소반포(小飯鋪)등이 있어 오가는 행인들이 밤을 지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지방은 "관상(關)"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도시와 시골의 접경지대이다.

 

1950년대초반, 처음으로 북경시건설계획이 세워졌다. 북경고성의 원모습을 그대로 살려두고, 북경의 서쪽에 노구교(盧溝橋)를 중심으로 신북경을 건설하고자 했다. 나중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 계획은 유감스럽지만 실행되지 아니하였다.

 

1950년대중반, 북경의 건설목표는 '소비도시의 모자를 벗고' '자급자족의 전국제일대도시'로 발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첫번째 조치는 바로 역사상 "외팔현(外八縣)"이라고 불리우던, 통현(通縣), 창평현(昌平縣), 순의현(順義縣), 밀운현(密雲縣), 연경현(延慶縣), 평곡현(平谷縣), 대흥현(大興縣), 방산현(房山縣)을 하북성에서 북경시로 편입시킨다. 이리하여 이들은 북경의 원교구(遠郊區)가 되었다. 나중에 순의현에서 회유현(懷柔縣)이 갈라져 나왔고, 방산현에서 연산구(燕山區)가 분리되었으며, 다시 나중에 통현은 통주구(通州區)로 개칭되었다.

 

두번째 조치는 바로 북경의 성구(城區)와 교구(郊區)에 크고작은 공장을 짓는 것이다. 그 중에는 북경시소속도 있고, 중앙정부소속도 있다. 자금은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배분해주었다. 기술인원도 중앙정부가 상해, 천진, 동북등 공업기지에서 전속시켜주었다. "전국이 북경을 지원한다"는 것은 기술역량의 지원이었다. 이리하여 북경인구팽창의 첫번째 상승기가 형성된다. 이것은 1962년 국민경제조정의 대축소가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

 

1960년대중반부터 1980년대초까지, 북경에는 연산석화(燕山石化), 북경자동차제조공장(北京汽車製造廠), 북경권련공장(北京卷煙廠)등이 건립된다. 그리고 많은 외지인들이 북경으로 들어왔다. 북경에서 나갔던 지식청년들이 북경으로 돌아온 후에 놀라서, "우리가 그렇게 많이 떠났는데, 북경은 인구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많아졌다. 어디를 가나 모두 사람들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 지식청년들이 북경으로 되돌아오고, 삼선을 지원하던 사람들이 북경으로 되돌아오고, 삼선으로 이전했던 단위가 북경으로 되돌아오고, 정책의 집행으로 북경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북경성의 인구는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제 북경은 이미 "자급자족"을 완성했다. 공업체계도 이미 완비되었고, 교외지역은 식량채소를 도시로 공급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다시 도시시골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대대적인 도시개발로 북경은 다시 전국을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문혁기간동안 지하철을 건설하고, 성벽을 허물고, 다시 삼환, 사환, 오환을 만들고, 북경성은 이미 주변경계가 없어졌다. 그러나, 북경토박이의 의식에는 여전히 완고하게 '성안(城裏)'이라는 개념을 지니고 있다.

 

북경은 발전하면서 점점 자아를 상실했다. 천안문광장은 거의 천안문분지가 되어 버렸다. 북경특유의 후통은 빈민굴과 동의어가 되었다. 사합원(四合院)은 계속하여 콘트리트숲으로 대체된다. 북경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대도시의 병폐는 날로 심각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