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역사상의 촉광부영(燭光斧影)

중은우시 2006. 6. 5. 18:58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趙光胤)은 서기960년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황제에 오른 후, 17년간 황제에 있었따. 그러다가 서기976년 갑자기 사망하였고, 그가 병을 앓았다는 기록도 없다. 정사에는 그의 죽음에 관하여 명확하게 기재하지 않고 있다. <<송사. 태조본기>>에는 다음과 같이 간단한 두 줄만이 적혀 있을 뿐이다.

 

"제붕어만세전, 년오십(帝崩於萬歲殿, 年五十)"

 --황제께서 만세전에서 붕어하셨다. 나이 오십이었다.

 

"수명두태후, 전위태종(受命杜太后, 傳位太宗)

--두태후의 명을 받들어, 황제위를 태종(조광의)에게 전했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송태조 조광윤의 죽음은 역사적으로 계속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야사에서는 송태조의 죽음에 관하여 여러가지로 전하고 있다.

 

사마광(司馬光)의 "상산야록(湘山野錄)" 에 따르면 개보9년 10월, 어느 눈오는 밤에 조광윤은 급히 동생인 조광의(趙光義)를 입궁하라고 하였다. 형제 두 사람은 침궁에서 대작하였고, 술을 다 마셨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따. 조광윤은 옥부(玉斧)를 써서 눈에 그으면서 "잘했다. 잘했다"는 말을 외쳤다. 그날 밤에 조광의도 침궁에 같이 남았는데, 다음날 해가 밝자, 조광윤은 이유도 모르게 죽어 있었다. 조광의는 유조를 받아, 영구앞에서 황제위에 즉위했다.

 

"진여록(진餘錄)"에 따르면 조광의는 주광윤의 후궁인 화예부인에 대하여 욕심을 내고 있었는데, 조광윤이 병중에 깊이 잠들어 있는 틈을 타서, 한밤중에 화예부인의 방에 들어가 희롱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광윤이 잠에서 깨어났고, 옥부로 그를 베고자 하였다. 그러나 힘이 없어 땅을 내려치고 말았다. 조광의는 조광윤을 죽이고 집으로 도망쳤다.

 

사마광의 "속수기문(涑水紀聞)"에 따르면, 태조가 사망한 것은 이미 4경이었다. 송황후는 대내시위 왕계은에게 황자인 조덕방(趙德芳, 조광윤의 넷째아들)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왕계은은 송태조가 황휘을 진왕인 조광의에게 전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고 조광의를 찾아가서 입궁하도록 하였다. 송황후가 "덕방이 왔는가"라고 묻자 왕계은이 "진왕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송황후는 놀랐으나, 금방 정신을 차리고, 울면서 조광의에게 말했다. "관가(官家, 황제에 대한 칭호). 우리 모자의 생명을 모두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이외에, 조광의가 동생의 신분으로 형인 조광윤의 황제위를 계승한 것은 그들의 모친인 두태후의 의견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두태후가 임종하기 전에, 일찌기 조광윤에게 말하기를 "만일 후주(後周)가 나이있는 황제가 재위하였다면, 네가 어찌 오늘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너와 광의는 모두 내 아들이다. 너는 장래에 황제위를 그에게 넘겨주어라. 나라에 나이있는 임금이 있는 것이 바로 사직을 보전하는 길이다" 조광윤은 이에 동의하였고, 이에 재상인 조보를 불러 그 자리에서 맹서를 하게 하였고, 그것을 금궤(金櫃)에 넣어 보관했다. 이것이 소위 금궤지맹이라는 것이고, 조광의가 동생신분으로 형의 지위를 이은 것에 대한 합법적인 근거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조광윤이 죽을 때의 "촉광부영(촛불의 불빛과 도끼의 그림자"이다.

 

궁중의 예의로 보면, 조광의는 궁안에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궁안에서 잠을 잤다. 태감이나 궁녀들은 당연히 황제의 곁을 떠나서는 안된다. 그런데도 모두 자리를 뜨고 조광윤과 조광의만 남겨두었었다. 뿐만아니라 촛불에 일렁이는 사람의 모습, 기괴한 도끼의 소리, 그리고 조광윤의 "잘했다. 잘했다"는 외침. 이것은 모두 잘 계획된 하나의 모살이라는 느낌을 준다.

 

둘째, 왕계은이 성지를 허위로 전한 점.

 

왕계은이 얼마나 담이 크길래, 감히 송황후의 명을 어기고, 원래 조덕방에게 전해야 할 명을 조광의에게 전하였을까? 이것은 살신지화를 부를 일인데....이런 말은 단지 찬위의 죄명을 한 환관에게 미루는 듯한 느낌이 있고, 결국 형을 죽이고 찬탈한 죄를 감추려는 뜻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금궤지맹의 진위

 

두태후가 죽을 때, 조광윤은 겨우 43살이었다. 한창 나이였고 그의 큰 아들인 조덕소(趙德昭)가 이미 14세였다. 비록 조광윤이 몇년내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후주와 같이 7살의 어린아이가 등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두태후는 일생동안 매우 현명하게 처신하였는데, 죽으면서 이런 이상한 결정을 내릴 리가 있겠는가? 더구나, 금궤지맹이라는 것은 조광의가 등극한 후 5년이 지난후에야 비로소 알려지고 공포되었다. 왜 조광윤이 죽었을 때 바로 정정당당하게 공포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외에도 한두가지 점은 조광의의 행동에 대하여 아무래도 뭔가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도록 만든다.

 

첫째, 조광의는 다음해가 되기도 전에 연호를 바꾸어버린다. 새 임금이 즉위하면, 통상적인 예는 다음해 1월 1일부터 새로운 연호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조광의는 단지 2개월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개보9년(開寶九年)을 흥국원년(興國元年)으로 바꿔 버린다. 이러한 통상적인 사례를 벗어나는 행위는 단지 하나의 해석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루빨리 자신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분을 확립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뭔가 꺼림직한 것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둘째, 조광윤의 황후가 죽었을 때, 황후의 예에 따라 상을 치르지 않는다.

 

셋째, 장남인 조덕소(당시 이미 30세), 조광윤의 작은아들 덕방(당시 26세)가 몇년이 지나지 않아 연이어 죽는다. 조덕소는 자결하고, 조덕방은 이유없이 사망함으로써 조광윤의 아들은 모두 죽게 된다.

 

가장 이해되지 않는 일은 조광의의 후손들은 대대로 조광의가 형을 죽이고 황위를 빼앗았다는 것을 믿었고, 황위를 나중에 조광윤의 후대에게 넘겨주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송고종 조구(趙構)의 얘기이다. 조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황위를 넘겨주어야 할 것인가? 대신들은 의견이 분분했다. 가장 강력한 의견은 조광윤이 개국황제이므로, 그의 후손중에 후계자를 선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조구는 이런 의견에 대하여 비난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그는 생각을 바꾼다. 말하기를 꿈속에 송태조 조광윤이 그를 데리고 "만세전"에 갔는데, 거기서 당년의 촉광부영의 모든 놀라운 상황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광윤이 말하기를 "네가 황위를 나의 자손에게 물려주어야만, 국세가 회복될 한가닥 희망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구는 마침내 조광윤의 칠대손인 조신(趙愼)을 정하고, 그에게 황위를 넘겨주게 된다. 이 때는 이미 촉광부영사건이 있은지 187년이 지난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