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조광윤)

천고기원(千古奇寃) : 조광윤의 진교병변에서의 역할

중은우시 2007. 12. 20. 19:41

글: 고천유운(高天流雲)

 

송나라역사에 관한 자료를 뒤적거리다보면, 북송(北宋)의 개국에 관한 장면에 예외없이 이런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후주(後周)의 공제(恭帝) 시종훈(柴宗訓) 현득7년(960년) 원단에 거란이 침범했다. 조정에서 논의를 거쳐 금군통수, 전전도점검인 조광윤이 병력을 이끌고 나가서 응전하기로 결정한다. 대군은 개봉을 출발하여, 어두워졌을 때 개봉성의 동북쪽 40리에 있는 진교역(陳橋驛)에 주둔한다. 그날 밤에 군대에 변이 일어나, 강제로 황포(黃袍, 황제가 입는 옷)를 조광윤에게 입히고, 그가 항거할 수 없게 했다. 다음 날 전군은 다시 개봉성으로 되돌아왔고, 바로 주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선다. 이후 300년간 존속했던 송나라는 이렇게 시작된다.

 

소위 황포가신(黃袍加身), 억지로 황제자리에 앉았다는 이 일막은 조광윤이 주연을 맡고, 조보(趙普)가 감독을 맡고, 조광의가 구체적으로 시행한 하나의 쇼였고, 철두철미한 음모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조광윤은 매춘부짓을 하면서 정절방(貞節坊)을 세우려는 것과 같이 후안무치의 극에 달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진실은 어떠했는가?

 

당시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당시 황제 시종훈은 겨우 7살이었다. 그의 부친인 시영(柴榮)은 5대십국중 가장 영명한 황제였다. 국내를 통일하기 시작하여, 후주의 국력이 전례없이 강대했고, 대외적으로 거란에 대하여도 성공적으로 반격을 하여 효과를 거두었다. 병사를 일으켜 40일만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삼관을 수복하고, 연운십육주중에서 3주 17현, 호구18,360호를 얻었다. 아쉽게도 그는 돌연 병이 들어, 46일만이 사망하고 만다.

 

시영이 죽은 후, 조광윤은 이미 후주의 최고의 군사적 강자였다. 그는 금군(국가의 정규군임. 송나라의 많은 제도는 후주의 제도를 그대로 썼는데, 수도안의 금군은 다른 지방의 군대를 압도해야 했다. 이것이 중요한 국가정책이다)을 통솔하며, 또한 귀덕절도사(歸德節度使, 귀덕은 옛날부터 宋國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국호를 송이라 하게 된다)였다. 그는 언제든지 정변을 일으키면 성공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도 그러했다. 그가 다음 날 병사를 되돌려 개봉성으로 돌아왔을 때,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성에 진입하고 바로 황궁에 들어가서 깔끔하게 처리를 마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첫번째 의문이 등장한다.

 

그는 왜 하필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택했을까? 거짓으로 거란이 침입했다고 말하고, 그가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고, 그 후에 부대를 이끌고 다음 날 되돌아와서, 청천백일하에 황조를 뒤엎고 황제위를 빼앗았을까? 이렇게 하고 나니, 그가 아무리 객관적인 이유를 찾아내려고 하고, 그의 자손과 신하들이 교묘한 언변으로 변명하고자 하여도, 전혀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과연 후세사람들 중에서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실력으로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7살된 어린 황제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고, 그에 반대하는 어떤 신하든 당당하게 범죄를 뒤집어씌워 죄를 물을 수 있으며, 여기에 약간의 수법만 더하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하든지간에 그가 실제로 운용한 방식보다는 낫다. 비록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 생긴 것이다. 즉, 그의 행위는 군사쿠데타이고 반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두번째 의문도 있다.

 

시영이 죽은 후부터 조광윤의 진교병변까지, 기간은 개략 반년정도이다. 이 반년동안, 조광윤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는 항상 수도를 지키기 위하여 개봉성에 있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그는 금군의 총사령관이므로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답은 No이다. 이것은 그저 그러했을 것뿐이고, 시영이 죽은 때로부터 그는 이미 개봉성을 떠나서 자기의 영지인 귀덕에 가 있었다. 이 반년동안 그는 한발짝도 귀덕에서 나오지 못했다. 조정이 명을 내려 그에게 거란을 방어하라고 하여 비로소 개봉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만일 그가 황조를 바꿀 생각이 있었다면, 그는 왜 정치권력중심에서 먼 곳에 반년동안이나 머물렀단 말인가? 그는 멀리 귀덕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조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신하였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도 No이다. 그는 군사력을 장악했을 뿐, 정치방면에는 전혀 촉수를 뻗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의 재상은 범질(范質)과 왕부(王溥)였다. 특히 범질은 아주 강경파였고, 조광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시 진교병변이 있던 날, 조광윤이 군대를 몰고 회군한다는 말을 듣고 국세를 만회할 수 없다고 보고, 긴장하면서도 분노하여 왕부의 손을 잡고 소리쳤다: "황급히 장수를 보낸 것이 우리들의 잘못이다" 왕부의 손에서는 피가 날 정도로 꽉 잡았다. 이로써 볼 때, 그는 절대 조광윤이 조정의 정사에 관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조광윤은 적극적으로 사전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모반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그에게 적대적인 재상을 그 자리에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의문이 남는다.

 

반란을 일으킨 날, 조광윤의 가족은 어디에 있었는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그의 영지인 귀덕, 즉 송주(宋州)이다. 그렇다면,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당시 조광윤의 위로는 노모부터 아래로는 처자들까지 모두 개봉성안에 있었다는 점이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조광윤이 진교에서 황포를 몸에 걸칠 때, 비로서 사람을 개봉으로 보내서(이 사람의 이름은 潘美이다. 즉, 양가장에 나오는 반인미의 원형이다. 그러나 그는 간악한 무리는 아니고, 반대로 아주 인자하고 용감한 자였고, 그가 세운 공로는 양가장의 모든 사람이 세운 공로보다 컸다) 통보하고, 성안의 석수신(石守信)등 심복들이 병변에 협조하도록 한다. 조광윤의 가족이 성안의 구체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송나라사람들의 필기에 따르면, 당시 조광윤의 전가족은 묘(廟)에서 향을 사르고 있었다고 한다. 성내에서는 이미 조광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미 군대를 보내서 그들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가족들은 화상이 도와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다.

 

조광윤은 가족들을 다 죽여버리려고 작정을 했단 말인가? 이로써 그가 황제에 오르는 기념으로 삼으려 했는가? 이것이 사전에 준비를 하고 모의를 한 후에 일으켰다고 볼 수 있는 일인가?

 

그렇다면 사건의 진상은 어떠햇는가? 조광윤은 이 사건으로 송태조가 되고, 성공적으로 송황조를 건립한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가 자세히 분석해본 바에 의하면, 이 모든 사건은 조광의(趙光義) 한 사람이 일으킨 일이고, 조보 조차도 조광의에 의하여 움직인 것이며, 이 사건에서는 조광의를 위하여 일처리를 한 것에 불과했다. 나중에 송태종이 되는 조광의가 당시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지위는 조광윤의 동생이라는 것뿐이었다. 만일 그가 남의 위에 서려면 자기의 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친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첫째 이유는 일찌감치 죽었다는 것이고, 둘째 이유는 혹시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관직이 너무 낮아서, 조광윤조차도 처음에 별로 도움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조광의라는 인물은 권력욕이 매우 강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10여년후에, 먼저 촉광부영이후 조광윤이 죽는 천고의 수수께끼가 발생한다. 이후 조광의는 바로 두 명의 조카를 밟고 황제위에 오른다. 이어서 아직 시신이 식지도 않은 두 조카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자기의 유일한 동생도 처치해버린다. 이로써 그는 스스로 황제위에 앉았을 뿐아니라, 이후의 황제위도 자기의 자손들로 이어갈 수 있게 했다. 이뿐 아니다. 그가 친히 거란을 정벌하러 갔다가 화살을 두 대맞고 당나귀가 끄는 차를 타고 겨우 돌아온 후 신체가 말이 아니게 되는 바람에 태자를 세우게 된다. 그런데, 자기의 친아들인 조항(趙恒, 송진종)이 신하들과 백성들로부터 환호를 받는 것을 보고는 이것도 참지 못하고 "인심이 태자에게 갔으면, 나중에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라고 말하였다. 구준이 잘 설명하는 바람에 조항은 용서받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당시의 기회나 국면으로 볼 때 가만히 있었을리 없다. 형으로 하여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게 놔두었을 것같은가? 그의 형인 조광윤은 그가 비황등달(飛黃騰達), 평보청운(平步靑雲)할 수 있는 유일한 보장책이었다.

 

아래의 상황은 필자가 추리한 것이다. 여러분들도 자유롭게 사고하고 분석해보기 바란다.

 

- 조광의는 무수히 형에게 반란을 일으키자고 권한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고, 한번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어린 황제가 어른이 되거나 혹은 다른 절도사가 선수를 치면 우리는 끝장이다라고.

 

- 그러나 조광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 조광의도 자기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끌어도 가지 않고, 때리면 오히려 뒤로 간다. 이런 사람은 권유해서는 안되고, 강요할 수밖에 없다. 첫째, 그는 개봉성에 남아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한다. "점검주천자(點檢做天子, 점검이 천자가 된다. 조광윤의 직위가 전전도점검이었다)" 그리하여 인심이 흉흉해지고, 조정의 상하와 백성들의 눈이 모두 형인 조광윤을 주목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도 일으키게 만든다.

 

- 그러나, 조광윤은 실제행동으로 자기의 마음을 보여준다. 그는 개봉이라는 시비의 땅을 떠나 멀리 자기의 작은 영지에 몸을 숨긴다.

 

- 그렇다면 좋다. 조광의는 두번째 책략을 쓴다. 먼저 암중 형의 심복들을 모두 설득한다. 특히 군사인 조보와 금군의 다른 장군들이다. 예를 들면, 석수신 및 모용연소등이다.  그들이 모두 동의하지 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전방의 급보가 날아온다. 거란이 침입했다고.

 

- 이는 아주 절묘하다. 전방의 급보가 어떻게 날아온 것인가. 바로 재상 혹은 원수가 매일 친히 말을 타고 변방을 돌아본다면, 적군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재상이 이렇게 매일 변방을 순시할 수 있는가? 당연히 없다. 소식은 모두 한층 한층 단계를 밟아 올라오는 것이다. 이번 거짓급보는 황제나 재상에 있어서 그들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사람은 그들의 수하인 조광윤이다. 그런데, 부하들의 정보에 의거하여 판단할 수밖에 없는 조광윤에게 있어서 그를 속이고 거짓말한 사람은 다시 그의 부하들이다. 그의 친동생과 그의 형제와도 같은 전우들이었다.

 

- 이렇게 하여, 조광윤은 군대를 이끌고 출병한다. 그날 저녁, 성에서 40리정도 떨어졌을 때, 그의 동생은 단독으로 그를 찾는다. 그리고 옛날에 했던 말을 다시 한다. 반란을 일으키자고.

 

- 조광윤은 귀찮아하며 거절한다. 아마도 욕도 했을지 모른다.

 

- 조광의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형 반드시 거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는 유창하게 설명했다. 옷도 미리 준비가 다 되어 있다. 노란색이고 몸에도 딱맞을 것이다. 한번 입어보라. 나를 볼 것없다. 사실 형이 거사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이미 다 퍼져 나갔다. 맞다. 이 일은 내가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둘 것이 있다. 형수와 조카들은 모두 개봉성에 있다. 내일 아침이면 소문이 퍼질테니 빨리 사람을 보내서 안전한 곳에 모셔야 할 것이다.

 

- 조광윤은 화를 냈지만, 바깥의 병사들은 십여년후 황궁안의 환관과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창과 문을 꽉 둘러싸고 있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안에서 형제 둘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어했지만, 보지지 않았다. 그저 사람의 그림자만 왔다갔다 하고 조광의는 십여년후의 그날 밤처럼 계속 숨어다녔고, 얼마되지 않아 모든 것은 멈추었다.

 

- 조광윤은 자기의 동생을 죽일 수는 없었다. 정말, 모든 것은 빨리 진행되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일은 끝난다.

 

- 이렇게 송나라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