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사회/북대와 청화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의 성장내막

중은우시 2007. 5. 28. 12:21

글: 조민(趙民)

 

만일 누군가 이런 문제를 냈다고 치자: "중국의 경영대학(商學院)중 어디가 가장 좋은가?" 그렇다면, 답은 모두 다를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답을 낼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든, MBA졸업생에게 가서 묻든, 아니면 MBA졸업생을 많이 고용한 회사사장에게 묻든 간에,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북경대학의 광화관리학원(光華管理學院)이 중국에서 가장 좋은 경영대학중의 하나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중 많은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다. 15년전인 1992년에 북경대학에는 경영대학이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10년전인 1997년에는 북경대학의 광화관리학원이 아직 명성이 크지 않은 2류 경영대학원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왜 이런가? 주요한 원인은 바로 북경대학의 광화관리학원의 기초는 계획경제시대에 아주 박약했었기 때문이다. 1992년이전의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변화하는 시대에, 대학의 경영학의 유명한 교수는 기본적으로 모두 인민대학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 유명한 "홍색대학(紅色大學)"은 전문적으로 계획경제시대의 경영학대학생들을 배양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로 거시계획관리를 하는 사람들이었고, 졸업후에는 주로 각급정부의 계획경제위원회(지금의 발개위)로 가서 일했다. 일찌기 중국의 백성들 사이에서 "제2당교"로 불리웠고, 북경의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북경의 몇개 염색통중의 하나라고 불리웠다. 그 때, 북경대학의 경제학전문은 괜찮은 편이었다. 그러나 경영학은 뒤떨어졌고, 거의 공백이었다.

 

그러나, 관계없다. 사정은 금방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변화의 시작은 세 가지였다.

 

첫째, 북경대학에 경영학과를 만들었다. 경제학과의 역이녕(歷以寧)이라고 불리우는 교수가 경제학과(나중의 경제학원)에서 경영학과(나중의 경영학원)으로 옮겨왔다. 혹자는 이런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경영학원을 창립하러 왔다" 그래서, 북경대학은 적어도 전문적으로 미시경영  즉, 기업경영을 연구하는 경영학원은 갖게 되었다.

 

둘째, 북경대학은 또한 세 명의 기운이 넘치는 해외유학파를 가지고 있었다: 이강(易綱), 임의부(林毅夫), 장유영(張維迎)이 그들이다. 이들이 이끌면서 중국경제연구중심을 만들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장유영은 역이녕교수의 산하로 들어가서 '1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무부원장이 된다. 그 당시 중국대학의 상학원 부원장이라는 이런 직위에 해외유학경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북경대학의 경영대학은 관리자급에 선도하는 징조가 보였던 것이다.

 

셋째, 북경대학 경영학원은 '하늘에서 떨어진 돈'을 주웠다. 최종적으로 "두개의 글자와 건물하나를 맞바꾸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원래, 대만에 "광화기금회(光華基金會)"라는 조직이 있고, 대륙의 한 대학의 경영대학에 1000만달러를 출연하고자 했다. 이 광화는 원래의 의미는 "광복중화(光復中華)"라는 것으로 모두 한번 듣는 순간 느끼겠지만, 국민당 통치시대의 특색있는 이름이다. 중국대륙에서 1950년-1953년에 많은 사람의 이름에 "항미(抗美)', '위국(衛國)', '보국(保國)', '원조(援朝)', '건화(建華)'등이 나타났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양안이 화해한 이후로는 기금회의 이름이 어찌되었건, 사실 별 관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출연하려는 돈이 많았다는 것이다. 인민폐로 환산하면 8300만위안(한화 약 95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일은 처음에 북경대학 경영대학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광화기금회가 처음 찾은 곳은 청화대학이었다. 대만에 청화대학은 있지만, 북경대학은 없다. 그리고, 대만의 청화대학도 일류의 좋은 대학이다. 그러나, 출연조건은 바로 학원의 이름을 "청화대학 광화관리학원"으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청화대학 경영대학은 바로 전국에서 가장 이름있는 곳이었다. 중국의 백성들 말을 빌면 당시 청화대학의 총장은 주용기(朱鏞基)라는 잠재력이 있는 인물이 아직 국가지도자로 옮겨가지 전에 경영대학의 원장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누가 알았겠는가. 바로 이 투자는 중국역사상 청화대학을 가장 빛나게 하는 것이 될 줄을...국무원 총리 겸 청화대학 관리학원 원장. 생각해봐라. 학교에서 총장과 원장을 따지면 누가 높은가? 당연히 총장이 높다. 그런데 총리가 원장을 맡고 있으니 관리학원의 명성이 어떠했겠는가? 청화대학의 관리학원은 이 일을 언급할 때마다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그들의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두말 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장기적인 안목이 있던 청화대학 총장에게는 이런 좋은 일이 또한 화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조건이 좋았으므로, 청화대학의 관리학원은 '광화'라는 두 글자를 달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청화대학의 관리학원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청화대학 관리학원'으로 불리우고 있고, 미국의 일류 경영대학원들처럼 앞에 무슨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MIT경영대학원은 Sloan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광화기금회는 다시 북경대학 관리학원을 찾았다. 이 때, 경제학자인 역원장의 '경제성'은 충분히 발휘된다. 학원의 이름앞에 '광화'를 붙여주고, 1000만달러를 받는 이런 좋은 일을 왜 안하겠는가?

 

그래서,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의 외형은 미국의 아이비리그대학의 백년된 건물처럼 만들어졌고, 이어서 광화관리학원의 "동사회"도 구성되었다. 그리고 신속히 완공되었다. 이 건물의 완공은 북경대학 경영대학이 하드웨어의 측면에서 중국최고수준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부교수이상의 모든 교수들은 1인당 1개의 단독 연구실을 가지고, 컴퓨터, 서가, 등(燈)등 설비를 모두 갖추어주었다. 이러한 것들은 당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사정이 여기까지 되자 유비가 "도원결의"이후의 '삼고초려'를 하여  백년제업의 기초를 닦은 것처럼,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은 상대적으로 장점이 있는 교수진에, 아주 좋은 건물까지 갖추었다.

 

북대광화(北大光華)는 이어서, '밀레니엄 공세'를 시작했다. 20세기말에 전국대학과 경영대학들중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신양무운동'을 시작한다. 전세계에 각각 50만위안(한화 약 6000만원)과 30만위안(한화 약 3600만위안)의 연봉을 걸고 공개적으로 교수와 부교수를 모집했다.

 

우리는 국무원 국유자산관리위원회 직속 중앙기업이 전세계에 인재를 공개모집했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부분의 백성들을 잘 알고 있다. 국유기관에서 대규모로 진행하는 전세계인재모집에서 북대광화가 전국에서 가장 선봉이었다는 것을, 중앙기업보다는 5년이나 빨랐다는 것을. 이 때 북대광화는 일을 새로 벌이는 정신으로 '소하재로첨첨각(小荷才露尖尖角, 작은 연꽃이 비로소 뾰족한 순을 내밀기 시작하다)'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와 같은 외부인들은 지금 되돌아보면 북대광화의 발전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의사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이 의사결정을 할 때 그저 멋모르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결과에 대하여 잘 알고 이성적으로 한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 자체는 이미 우리가 볼 수 있고, 광화관리의 관리자들은 전략적인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초빙소식은 재빨리 퍼져갔다. 진주처럼 전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중국계 교수와 부교수들이 모두 관심을 가졌다. 북경대학이라는 좋은 브랜드와 중국 MBA교육의 미래를 좋게 보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역시 북대광화로부터 '삼고초려'를 받고 채용된 사람들도 있다. 하나의 가장 전형적인 예는 항병(項兵) 교수의 영입과 북대광화의 이익창출소스중의 하나인 EMBA 프로젝트이 성공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이것은 북대광화가 감히 일을 벌이는 풍모의 또 다른 표현이다. 항병 교수는 현재 장강상학원의 원장의 자리에 오른지 여러해 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상해중구(中歐)공상관리학원의 핵심교수였고, 기본적으로 '강의를 잘하는 경영대학 교수'의 이미지와 경력을 가지고 있었지, '돈버는 경영대학 관리자'로서의 능력과 수준은 아직 검증되지 아니한 단계였다. 이것은 아주 성공적인 스카우트였다. 비록 중구공상관리학원은 핵심교수 한 사람을 잃은 것이지만, 중국에는 이로써 스타 원장이 한 명 더 탄생했고, 스타 교수 한 사람이 더 탄생한 것이 되었다.

 

항병 교수는 전형적인 "교수중의 상인, 상인중의 교수"이다. 말이 매우 빠르고, 전형적인 '시간은 돈'이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다른 사람이 쉽게 기억하는 특징이 있는데, 중국전통문화중의 대표상품인 쿵후를 들어 비교하기를 좋아했다. 입을 열면 '초식'을 쓰고, 입을 닫을 때는 '폐관'이 나온다. 느낌상으로는 무슨 무술고수가 전도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문인형상의 그가 무술을 진짜 할 줄 아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오만한 다국적기업의 중국내 대표이든, 질풍노도의 중국국내기업가이든 모두 들으면 가가대소를 하면서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거나, 구름이나 안개속에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거나, 멍하니 신선을 바라보듯 하면서 결과적으로 스스로 그와 같지 못함을 한탄하며, 결국은 학비 18만인민폐를 기꺼이 납부하는 것이다. 서로 앞다투어 북대광화에 원서를 내는 것이다. 항병교수가 감독주연을 맡은 EMBA프로젝트의 전에 북대광화는 교육부의 인가를 받고 학력과 학위를 인정받는 MBA의 비용은 일반적으로 MBA학위(2년)에 5만위안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처럼 학비가 비싼 교육상품을 내놓았을 때, 비지니스의 각도에서는 아주 큰 모험이었고, 아주 간담이 커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 EMBA상품이 나왔을 때, 당시 전체중국대륙의 경영대학원에서는 중구를 제외하고는 두번째(당시 청화대학, 인민대학에는 아직 이런 EMBA과정이 없었다)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프로젝트는 교육부의 비준을 받은 학위증서를 발급할 수없었다는 점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파트를 사는데, 국가의 권위있는 부서가 발급한 품질합격증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통속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18만위안으로 전국을 통행할 수 없는 통행증"을 사는 것이었다. 절름발이인 증서이다. 그러나, 북대광화의 교수들이 어떻게 선전했는지를 보자. "네가 18만위안으로 100개회사의 최고경영자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가? 네가 겨우 1800위안(180000/100)의 인민폐로 중국대기업의 최고경영자를 불러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가? 네가 1800위안으로 저명한 회사의 최고경영자를 '동창'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18만위안을 북대광화에 납부한 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만일 우리가 공부라는 관점에서 경영대학을 보지 않는다면, 비지니스적인 매매의 각도에서 본다면 경영대학이 기업가에게 수여하는 EMBA졸업장은 비지니스모델이다.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현실생활에서 인류역사상 드물게 보는 좋은 사업모델이라는 것을. 일단 경영대학이 당신을 합격시키면, 당신은 하루도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하루도 서비스를 받지 않더라도, 바로 모든 18개월의 학비를 납부하여야 한다 .그것도 한번에 모두 납부하여야 하고, 한푼도 덜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에 나올 수 없다. 전체 경영대학원은 EMBA과정에서 특별히 학비면제인 경우('전액장학금'이라는 명목)를 제외하고는 한푼도 미수금은 없다. 얼마나 뛰어난 비지니스모델인가?

 

항병 교수는 자칭 논문을 드물게 쓰는 경영대학 교수이다. 그러나, 일군의 그처럼 해외유학후 돌아온 교수들이 자기의 뛰어난 업적을 바탕으로, 북대광화와 같은 장기적 안목을 지닌 '전략계획'하에 '중국경영대학원시장의 발전전략'의 '전략집행논문'을 썼고, 대량의 MBA를 채용하는 회사, 미디어, 동료 및 응시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첫째, 북대광화의 연수입은 2,3천만위안에서 신속하게 1억위안가량으로 올라가서, 당시 모든 중국내 경영대학의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둘째, 2001년경이 되었을 때,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에서 해외유학후 귀국한 교수의 숫자가 한번은 중국대륙 전역의 MBA학위를 수여할 자격이 있는 경영대학의 모든 해외유학후 귀국한 교수숫자보다 많았던 적도 있었다(당연히, 나중에 이러한 상대적인 우위는 다른 경영대학의 분발로 인하여 점차 줄어들었다).

 

셋째, 마지막으로, 북대광화의 MBA학생선발은 북대광화를 제1지방으로 하여 전국MBA공동시험을 통과한 성적의 수험생이나 북대광화계획에 따라 뽑은 학생TO의 사이에 비율이 아주 높아서, 청화대학과 함께 다른 모든 대학을 압도했다. 북경의 다른 대학의 경영대학(인민대학 경영대학을 포함하여)은 정원을 모두 채우기 위하여, 북대광화와 청화경영대학이 학생을 다 뽑고 난 후에 이 두 학교에 합격하지 못한 응시생들을 대상으로 채워 넣곤 했다.

 

1997년-2001년의 5년간의 노력을 거쳐, 2002년이 되어서는 영업수익, 핵심교수진의 국제화정도(해외귀국교수총수), 교육소비자(응시생)집단의 인정의 측면에서, 북대광화는 아무런 의문없는 중국1류의 대학중 하나가 되었다.

 

북대광화의 이런 전략은 개략 5년의 시간을 투입하여, 북대광화는 원하는대로 이루었고, 중국최일류의 경영대학이 되었으며, 인민대학을 따라잡고, 중화인민공화국총리가 원장인 청화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시켰으며, 중국경영대학원의 조류를 선도했다.

 

북대광화의 이름이 빛나게 된 데에는, 제1기 원장을 맡은 역이녕 교수가 중국역사상 최초의 <<증권법>>을 기초하는데 주요역할을 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국증권시장이 현재처럼 활황이 되고, 중국백성들중에서 '주식'과 '주식시장'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이런 일반 백성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법률을 기초하는 것으로 인하여, 역이녕 교수는 사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는 원장을 맡고 있던 북대광화의 지명도를 높여주었을 뿐아니라, 커다란 추진력으로 작용했다. 모든 매체는 그가 <<증권법>>을 초안한 것을 보도하여, 부지불식간에 북대광화에 대한 소리없는 광고로 작용했다.

 

특히 설명하여야 할 사항은 당초 중국인대상임위원회가 역이녕 교수에게 위탁하여 <<증권법>>을 초안하게 하였는데, 이는 북경대학이라는 기관에 위탁한 것도 아니고,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이라는 기관에 위탁한 것도 아니고, 역이녕이라는 교수 개인에게 위탁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입법사상 아주 드물게 보는 일이었다. 세계입법역사상으로도 드문 일이다. 이것은 중국의 일반 백성들에게 아주 긍정적인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전인대마저도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의 원장에게 이런 중요한 법률을 초안하도록 맡기는 구나. 그렇다면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은 정말 대단한가보다. 이 입법업무로 인하여 역이녕 교수는 특정분야의 전문가에서 사회의 공중인물로 성장했다. 그  때부터 계속하여 '공중'인물이 된 것이다.

 

한 대학의 총장이나 원장이 만일 어느 학술영역의 권위자이거나 태두라면, 이는 이상할 것도 없다. 그리고 드문 일도 아니다. 그러나, 교장이나 원장이 '사회명사' 혹은 '공공지식분자'가 되거나 '공중인물'이 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이는 매우 얻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매체기자들에게 물어봐라 그가 인민대학 경영대학원장이 누구인지, 남개대학 경영대학원장이 누구인지, 복단대학 경영대학원장이 누구인지, 중산대학 경영대학원장이 누구이고 역대로 누구였는지 아느냐고? 아마 십중팔구는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필자가 일하는 정략균책관리자문회사는 바로 위에 열거한 유명한 경영대학들의 큰 고객이고, 매년 이 학교의 경영대학으로부터 많은 MBA졸업생들을 채용한다. 그러나, 우리 회사의 대부분의 직원들은 본인이 그 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한, 기본적으로 원장의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이럴 정도니 일반회사직원이나 일반백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한 원장과 그들의 일상업무와 생활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어서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증권법>>초안을 주재한 역이녕 교수는 화이트칼라나 주식투자하는 사람들 중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이다.

 

그래서, 원장인 역이녕 교수가 <<증권법>>의 초안을 주재하면서부터 북대광화는 이름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교수 본인은 필자의 관찰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가장 성공한 것은 그의 원장경력이나 <<증권법>>초안의 경력이 아니라. 그가 지은 시사(詩詞)에 있다. 외부 사람들이 잘 모르지만, 역이녕 교수는 중국의 고대 시사를 잘 외우고, 중국전통문화에 대한 기초가 튼튼하다. 평소에 강의하면서, 중국역사고적에서의 고사를 잘 끄집어내서 설명하곤 한다. 고대의 글을 빌려 경영을 설명하고, 역사상의 인물을 빌려 경영을 얘기한다. 이는 북대광화의 수업에서 하나의 빛나는 풍경이 되었다. 역교수는 아주 정교한 자기의 창작시사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책명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대략 <<역이녕시사>>였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 만난 후 떠날 때 받는 선물이 바로 경영학관련 서적이 아니라, 자기의 시사작품인 것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많고, 모두 탄복해 마지 않는다. 현재 중국의 경제, 경영등 문사(文史)계열이 아닌 대학교수중에서 대학의 원장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평측측의 운율을 알겠는가? 자연스럽게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말했으니, 모두 알 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북대광화가 성공한데의 세번째 요소는 바로 이러한 '유명인 원장' '스타 원장'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역이녕 원장이 원래 재능이 있어, 조용히 지내면서 전문가로서의 이름을 날리다가 결국은 천하에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북대광화의 제2대원장은 장유영 교수이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섬북민가를 잘 부르는데, 그것도 북대광화의 한 자랑이다. 북대광화의 명성을 드높였을 뿐아니라, 그 자신의 이름도 크게 떨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