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처음으로 <<자치톰감(資治通鑒)>>을 읽은 것은 1990년대초였다. 당시에 필자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모두 294권 300만자에 달하는 거작을 나는 축인본으로 읽었는데도 4권이나 되었다. 다 읽은 후에 나는 곤혹스러웠다. <<자치통감>>과 함께 "사학의 쌍벽"으로 불리우는 <<사기>>는 전설상의 황제(黃帝)로부터 시작하는데, <<자치통감>>은 왜 주 위열왕 23년부터 시작할까?
10여년이 지나서, 오랫동안 곤혹스러워 했던 문제에 대하여, 마침내 모택동이 말년에 곁에서 일하던 사람과 대화하는 내용을 읽다가 답안을 찾게 되었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사마광(司馬光)이 동주 위왕 23년부터 쓴 것은 바로 이 해에 한가지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주나라 천자가 한(韓), 위(魏), 조(趙) 삼국을 제후로 명함으로써 원래 불법이었던 삼가분진(三家分晋, 진나라를 한,위,조로 나눈 것)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한 것이다. 사마광은 이것이 주나라 왕실이 쇠락한 관건이라고 보았다. '삼진이 예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주나라가 스스로 예를 무너뜨렸다' 이 일은 <<자치통감>>의 첫편이다. 책을 지은 의도를 처음에 바로 밝힌 것이다...아래에서 불법을 저지른 것을 위에서 인정해버린 것이다. 주나라 천자는 원칙이 없었다. 시비가 없었다. 당연히 혼란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모택동을 따라서 역사서를 읽으면 시원시원하다. 뭐가뭔지 잘 모르는 사건도 명약관화해진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보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일을 시작한 후에 나는 다시 <<자치통감>>을 통독했다. 모택동과 비교하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모택동은 이 거작은 17번이나 읽었던 것이다. 그의 침대머리에는 항상 <<자치통감>>이 놓여 있었다.
<<자치통감>>은 중국고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정치가인 사마광이 그를 도와주는 유반(劉攽), 유서(劉恕), 범조우(范祖禹), 사마강(司馬康)등과 함께 19년에 걸쳐 편찬한 사상유례없는 대규모의 편년체 통사거작이다. 이 책은 모두 294권으로 되어 있고, 기록된 역사는 주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부터 시작하여, 오대의 후주 세종현덕6년(959년)에 회남을 정벌하기까지, 16개 왕조에 걸쳐 모두 1363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작자는 이 1363년의 역사적 사실을, 시대의 전후에 따라, 연월을 경(經)으로 사실을 위(緯)로 하여 순서대로 기록했다. 중대한 역사사건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각 방면의 관련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밝혔다. <<자치통감>>이 책으로 만들어진 이래로, 역대의 제왕장상, 문인소객, 각계요인은 모두 이 책을 앞다투어 읽었따. <<자치통감>>에 주석을 단 제왕, 현신, 홍유 및 현대의 정치가, 사상가, 학자는 그 수가 이루 말할 수도 없이 많다. <<자치통감>>의 명성에 대하여는 <<사기>>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사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북송시대는 중당(中唐, 당나라중기)이래로 장기혼전을 거친 후에 부분적이긴 하지만 국가통일을 이루고, 사회경제를 회복 발전시켰으며, 학술문화가 번영한 시기이다. 다만, 숨은 문제도 많았다. 내정에도 폐해가 적지 않았고, 군사력도 부족했다. 나라는 가난하고 약하여, 국면을 안정시키지 못했다. 생기가 있는 시기이면서, 고민이 많은 시기이고, 전진하는 시대이면서, 연약한 시대였다. 당시는 군주장상(君主將相), 지사인인(志士仁人), 평민백성할 것없이 모두 어떻게 생활해야할지, 출로는 무엇일지를 고민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유도(柔道)"로 천하를 다스려야 하며, 조종의 법을 바꿔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개혁에 뜻을 세워, 변법을 실행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생활이 곤궁하여 어쩔 수 없이 리스크를 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문화지식을 지닌 사람들, 특히 역사학자들 예를 들어, 구양수(歐陽修), 사마광, 범조우 등은 왕왕 현실을 직면하면서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역사에서 경험과 교훈을 얻고, 역사를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그렇게 하여 국가를 다스리고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받고, 현실문제를 더욱 잘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한 시대적 배경이다. 이 책에서, 여러가지 경험과 교훈을 도출해내어, 통치자들에게 참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책의 이름을 "감어왕사, 자어치도(鑒於往事, 資於治道, 지나간 일에 비추어서 다스리는데 활용한다)"는 의미. 즉, 역사의 득실을 귀감으로 삼아서 통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치통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책이름은 송신종(宋神宗)이 친히 내렸다. <<자치통감>>의 내용은 정치, 군사, 민족관계를 위주로 하고, 경제, 문화와 역사인물평가를 겸해서 논했다. 국가의 성쇠, 민족흥망에 관련되는 통치계급을 전체적으로 기술함으로써, 후인들이 경종으로 삼도록 하는 목적을 가졌다.
사마광의 일생중 많은 부분을 칙명을 받아 <<자치통감>>을 편찬하는데 보냈다. 모두 1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송영종 치평3년(1066년)부터, 송신종 원풍7년(1084년)까지였다. 그는 <<진자치통감표(進資治通鑒表)>>에서 "낮에만 일해서는 부족해서 밤까지 이어서 일했다." "정력을 이 책에 다 쏟았다"는 표현을 했다.
사마광은 고대에 아주 뛰어난 여러 분야학문에 달통한 인재였다. 그는 음악, 율력, 천문, 수학에 능통했고, 경학과 사학의 연구에도 깊이가 있었다. 그는 일생동안 많은 책을 썼다. <<자치통감>>이외에도 <<통감거요력>> 80권, <<계고록>> 20권, <<본조백관공경표>> 6권이 있다. 이외에도 그는 문학, 경학, 철학 및 의학분야에도 연구와 저술을 남겼다. 주요한 대표작으로는 <<한림시초>>, <<왕고문자경>>, <<역설>>, <<주태현경>>, <<주양자>>, <<서의>>, <<유산행기>>, <<속시치>>, <<의문>>, <<양수기문>>, <<류편>>, <<사마문정공집>>등이 있다. 필자가 고증한 바에 따르면, 역사상 사마광은 한 때 유가의 삼성(三聖)중 하나로 받들어졌다. 나머지 두 사람은 당연히 공자와 맹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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