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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송)

동진국(東眞國): 잊혀진 여진족 국가

by 중은우시 2008. 12. 23.

글: 원동순양함

 

중국의 역사서를 뒤져보면 동하(東夏)라는 여진정권의 존재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국가실체를 가지고, 금나라가 멸망할 때, 여진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독립하여 70여년간이나 존재했으며, 길림, 흑룡강의 대부분 지역을 통할하고, 요동지역에서 패자로 군림했었다. 국호는 처음에 대진(大眞)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동하(東夏)로 바꾼다. 조선에서는 동진(東眞)이라고 불렀다.

 

1. 포선만노(蒲鮮萬奴)

 

먼저, 반드시 소개하여야 할 사람은 동진국의 창립자인 포선만노이다. 그는 동북지방의 역사상 걸출한 인물중 하나이다. 그러나, <<금사>>, <<원사>>에서 모두 그의 전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기>>, <<전>>등에서 약간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정도이다. 이것은 아마도 역사가들이 그를 "역적" "반신"으로 보는 선입견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라면 사서를 편찬할 때 이미 자료가 많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몇백년후에 <<신원사>> <<원서>>를 만들때 비로소 그의 전을 보완해 넣게 된다.

 

포선만노는 요동사람이다. 역대이래로 그에 대하여는 두 가지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첫째는 부정적이다. 그는 개인야심가이고, 반란을 획책하고, 금나라를 분열시켰으며, 몽골에 저항하는 역량을 분산시켰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긍정적이다. 그를 "요동괴걸"로 보고, 심지어 아구타와 비길만하다고 본다. 사료의 결핍과 그의 집안내력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에 따라, 그의 성명에 대하여도 서로 다른 기록이 나온다. 어떤 곳에서는 완안만노(完顔萬奴), 부합눌(夫合訥), 부선만노(富鮮萬奴), 포희만노(布希萬奴), 독주대석(禿珠大石), 만가노(萬家奴), 야노(也奴), 소만노(蕭萬奴), 만숙노(萬肅奴)등이 그것이다. "부합" "부선" "포희"등은 "포선의 별칭이다. "눌"은 "만노"를 붙여 읽은 것이다. "완안"은 아마도 금나라황제가 내린 사성(賜姓)일 것이다.

 

그가 사서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금장종 태화6년(1206년)이다. 상구국사(尙廐局使, 상구국은 말을 돌보고 훈련시키는 기관이며 '사'는 상구국의 두번째 높은 자리임. 종5품)으로 우익도통인 완안새불(完顔賽不)의 부통이 되어 송나라군과 전쟁을 벌인다(금사 12권 장종기사; 금사 권113 완안새불전). 만노는 기이한 전법을 구사하여, 완안새불과 협력하여 정면돌파하고, 송나라의 주력인 황보빈의 부대의 보병 기병 수만을 궤멸시키는 대승을 거둔다. 위소왕 대안3년(1211년) 초토사의 감군으로 임명되어, 야호령에 주둔한다. 주사령관이 무능하여 몽골군에 패배하고, 정예를 모두 잃는다. 같은 해 야율유가가 거병하여 금나라에 반기를 든다. 거란족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지녕원년(1213년) 그는 함평로 초토사의 직위를 받아 함평(요녕 개원)에서 반란을 진압한다. 적길뇌아의 전투에서 크게 패배한다. 위소왕은 다시 그를 용서하고, 혐평로 선무사로 직위를 승급시킨다. 금선종 정우2년(1214년), 요동선무사에 임명된다. 그리하여 요동지역의 최고군사지휘관이 된다. 그해에 야율유가와의 두번째 싸움에서도 적을 가볍게 보다가 패배하여 동경으로 물러나 있는다.

 

2. 건국칭왕

 

1214년, 금선종이 남경(개봉)으로 도망가고, 중도(북경)이 함락된다. 금나라의 멸명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육로교통이 단절됨에 따라, 요동은 고립무원의 맹지가 된다. 처지가 아주 위험했다: "당시 금나라의 군주는 아래사람에게 엄하고 가혹하게 대했다. 만노는 죄를 두려워하여 불안해 했다. 황제가 변경으로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동쪽을 돌볼 틈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몽올이사기, 포선만노전). 두번이나 야율유가에 패한 후에 그는 금나라로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을 끌어모아 사기를 불러일으켜 금나라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금선종 정우3년(1215년) 봄에 포선만노는 거병하여, 병사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남하하고, 하나는 북상한다. 북상부대가 주력부대이다. 상경을 전략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신속히 함평, 동경, 심주, 징주등을 점령하고, 연이어 파속부로를 공격하고, 상경성을 공략한다. 오래지 않아. 야율유가가 기회를 틈타 동경을 급습하고, "요(遼)"를 건국한다. 포선만노의 처인 이선아(李仙娥)는 야율유가가 강제로 취한다. 다만, 야율유가는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약탈만 하고는 떠나가 버린다. 포선만노는 그 후에 다시 동경을 수복한다.

 

거병초기에는 비록 심주, 징주의 두개 주를 얻었고, 맹안모극(猛安謀克)사람들 중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연속으로 좌절하자, 그에게 투항했던 빈가, 출태, 안출등 11명의 맹안들이 다시 그보다 직위가 낮은 흘석열환단(紇石烈桓端)에게 투항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의 근거지인 동경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여러달의 경험과 교훈으로, 포선만노는 요동선무사의 명의는 더 이상 큰 작용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드시 활을 바꾸어 당겨야 했다. 그리고 새로 나라를 만들고 왕을 칭하고 새로운 기치를 내걸어서, 여진족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했다. 그래야 요동의 장병을 끌어모으고 요동의 인심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을해년(1215년. 금선종 정우3년) 10월, 동경을 수도로 스스로 천왕(天王)에 오른다. 국호는 대진(大眞)이라고 하고, 연호는 천태(天泰)라 한다. 여진의 부흥을 도모하는 나라였다.

 

3. 곡항몽골(曲降蒙古)

 

대진은 건국초기에 처지가 아주 어려웠다. 몽골, 금, 요의 세 나라에 포위되었다. 그리하여 외부세계와의 연락이 차단되었다. 요동남부와 동부의 금나라군대는 그의 가장 가까운 적군이 되었고, 가장 긴급한 위협세력이었다. 금나라조정은 사면을 하면서 고관직을 제안함으로써 포선만노의 부대를 분열시키고자 획책한다. 포선만노의 부하를 회유하고 군심을 와해시켜서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요나라는 내부에서 서로 투쟁을 벌이고 있었고, 요서의 땅으로 옮겨갔을 뿐아니라, 야율유가는 몽골에 투항해서 그의 꼭두각시가 된다. 여전히 위협은 되었지만, 주요한 적수는 아니게 되었다. 그러므로 대진국에 있어서, 가장 큰 위협은 바로 칼끝을 겨눠오는 몽골이었다. 이들과 강경하게 부닥치면 망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으로 투항하면 실력을 보존하고 시기를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1216년 10월, 항서를 제출하고, 아들인 첩가를 인질로 보낸다.

 

4. 동천입하(東遷立夏)

 

포선만노는 몽골을 마비시키고, 그들의 경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항복한지 얼마되지 않아 빈틈을 노려, "10여만의 무리를 이끌고 해도(海島)로 들어갔다"(원사. 목화려전). 그리고는 잔뜩 웅크리고 있으면서 권토중래할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군사적인 전이, 보존, 휴식를 꾀했다. 1217년 2월, 요동의 몽골군총사령관 목화려(木華黎)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토벌하고, 중원을 노린다. 상응하는 병력을 남겨서 수비하지 않았다. 포선만노는 기회가 왔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거병하여 감군인 야율날아가(耶律捏兒哥)를 죽이고 동천의 노정을 밟는다. 대체로 남북 양로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먼저 압록강 하류일대를 돌아 4월에 대부영(大夫營)을 함락시키고, 포선만노는 주력을 몰아 북상하여 융안부(隆安府, 길림성 농안)로 진공한다. 금나라 요동,상경등의 선무사 겸 좌부원수인 포찰이랄도(蒲察移剌都)는 성을 버리고 변경으로 도망친다. 그리하여 상경으로 진군한다. 1218년 12월이전에 기본적으로 동정을 완성한다. 잔여세력들이 요동남부에서 한동안 활동한다. 포선만노는 1217년 육월, 칠월 사이에 다시 자립하여, 국로를 "동하"라고 하고, 연호는 여전히 "천태"를 사용하며 개원성(위치에 대하여는 여러가지 설이 있음)을 수도로 한다. 어떤 사람은 국호를 "대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다만 위치가 동쪽에 있고, "서하"와 구분하기 위하여 "동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5. 위진요동

 

포선만노가 동하를 세우자, 금나라조정은 포찰오근(蒲察五斤)을 요동행상서성으로 하여, 상경으로 가게 한다. 동시에 요동의 동하에 가담한 가족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죽여버린다. 다만, 이때 금나라의 역량으로는 동하에 대적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짧은 몇 년동안 계속되는 전투를 거쳐, 동하국의 세력범위는 대체로 갈나로(曷懶路), 속빈로와 호리개로 지역에 달하고, 강역범위는 대체로 동으로 동해, 서로는 호리개성(흑룡강 의란), 서로는 광재령, 남으로는 파속부와 조선청주(조선함경북도일대)에 이르렀다. 최전성기때는 남으로는 서유대령에서 조선고장성의 동쪽부분에서, 북으로는 흑룡강 파언, 의란이북에서 흑룡강하류지역에 이르고, 서로는 길림의 중서부에서 흑룡강 남부당중일대에 이르고, 동으로는 동해에 이르렀다.

 

야율유가가 거병한 후 여러 사람이 자립을 권하였으나 그는 몽골에 투항했다. 부하들이 많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중 일부분은 고려의 경내에 가서 소란을 부렸고, 왕도를 위협했다. 고려는 몽골, 동하와 함께 이들을 소탕하고자 하였다.

 

1218년, 징기스칸은 원수 합진화찰랄(合眞和剌)을 보내어 1만의 병사를 이끌고 야율유가의 부대와 함께 고려로 향한다. 포선만노도 원수 호토(胡土)로 하여금 군대 2만을 이끌고 가도록 한다. 모두 10만에, 고려도 40만의 부대를 동원한다. 함께 강동성에서 토벌한다. 1219년, 수령 함사(喊舍)가 자살하고, 나머지는 투항하므로 평정된다. 고려는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두 나라에 공물을 보낸다.

 

이후, 몽골은 고려의 공물을 받으러 가는 사신이 동하국을 지나가게 된다. 보통은 동하의 사신과 함께 고려로 갔다.

 

몽고원수 합진은 일찌기 고려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와 잘 지내고 싶으면 첫째 멀리 몽골황제를 받들고, 다음으로는 만노황제를 받들어라"(고려사), 이를 보면, 몽골이 이미 포선만노가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하는 사신을 파견하여 징기스칸이 서정하는 곳까지 가게 함으로써 예의를 표한다. 이런 우호관계는 1224년까지 지속되었다. 전후 약 6년간이다.

 

6. 동하국파(東夏國破)

 

그러나, 몽골국과 동하국의 우호관계는 표면적인 것이었다. 정치상의 일종의 잠정적 타협이었다. 실제로는 서로 음모를 꾸미고, 다툼이 심했다. 모두 고려를 끌어들이거나 압박하여 상대방을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몽골의 강대함에 직면하여, 동하는 고려와 손잡고 함께 대항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하여 병사를 보내어 고려의 변방을 교란시키고 약탈했다. 이리하여 양국은 지속적으로 소규모전쟁상태가 되어, 국력만 소모하고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1223년 목화려가 중원을 완전히 공략하지 못하고 산서에서 죽는다.

 

1224년, 동하와 몽골의 관계에 전환점이 발생한다. 1월부터 동하는 몽골사신이 고려를 가는데 동하를 지나지 못하게 막는다. 쌍방의 관계는 신속히 악화된다. 동하는 당시 형세를 잘못 판단하였다. 물론, 당시 몽골 징기스칸의 동생인 오치긴(Ochigin)이 동하에 지나치게 많은 공물을 요구했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양국관ㄱ는 파열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격화된 것은 아니다.

 

1227년, 징기스칸이 죽고, 오고타이가 집권한다. 삼봉산전투를 거쳐, 금나라의 잔존주력부대가 멸망한다. 몽골의 대외확장정책도 조금 바뀌게 된다. 처음으로 동북지방에 대거 병력을 보내고, 두 나라의 관계는 다시 긴장된다.

 

1233년 2월, 원태종은 원태종은 황자 구육(나중의 원정종)등에게 토벌을 명한다. 1233년 9월 남경을 포위한다. 비록 성벽이 쇠처럼 단단했지만,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되고, 포선만노는 포로로 잡힌다(일설에는 피살된다). 몽골군은 계속 전진하여 개원, 휼품을 점령하여 동하의 영토를 모두 장악한다. 동하국이 멸망하니 나라가 세워진지 19년만의 일이다.

 

7. 정권잔존

 

과거에는 모두 동하는 포선만노가 생포되면서 멸망했다고 보았다. 다만, 강희25년(1686년)에 "대동"연간의 관인을 발견한 이래, 동하국의 존망에 대하여 새로운 학설이 나왔다. 왕국유의 고증에 따르면, "<<고려사>>에는 여러번 동진 즉 대진과 고려의 교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태종 계사(1233)이후 세조 지원말기(1294)까지 스무번이나 나타난다는 것이다. 포선만노가 생포된 후에도 몽골은 계속 그를 기용했고, 그의 자손이 지위를 승계했다. 그러므로 동진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1234년 2월 "몽골은 백여기병을 동진에 남겼다. 나머지는 모두 돌아갔다" 몽골의 번국이 된 동진은 몽골에 귀순한 후 몽골군을 도와 고려의 항거를 진압하기도 했다.1235년 몽골이 세번째 고려를 정벌한다. 동하군은 선도가 되어 용진진, 진명성등을 점령했다. 1236년 몽골이 다시 고려에 진입할 때, 백여기의 원병을 보내어 고려의 동북국경지대에 침입한다. 요덕, 정변에서 용흥창으로 갔다.

 

몽골의 통치시기에 몽골은 다시 대규모로 고려를 정벌하는데, 동하는 다시 몽골이 진격하는 통로가 된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1249년에서 1259년까지 매년 거의 모두 동사의 병마가 국경을 침입하여 교란시킨다. 1257년, 등주에 들어온 무리가 3천여기가 된다. 1258년에는 수군을 보내어 고성현의 송도를 포위공격한다. 몽골이 나서서 간여하고서야 멈춘다.

 

원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점차 동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다. 지정20년(1283년) 5월, 다시 해서요동제형안찰사를 증설한다. 휼품, 합라 양로는 동하의 영지이다. 해서는 동하에 포함된다. 이로써 볼 때 몽골이 국내의 다른 지방과 마찬가지로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87년이후에는 다시는 "동진" "동하"라는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동하국은 그 이전에 폐지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