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김용소설의 양양전투(襄陽保衛戰)의 역사적 진실

by 중은우시 2008. 9. 8.

글: 순선(純仙)

 

김용의 <<신조협려>>(한국에서는 영웅문)에 나오는 양양전투에서 곽정(郭靖)이 사수하다가, 결국 곽정 부부는 모두 양양에서 죽는다(의천도룡기에서 소개). 몽골칸인 몽케가 양과(楊過)의 손에 죽는다. 이 전투는 전혀 근거없이 쓴 것은 아니며, 역사적 원형은 바로 세계역사의 진전을 바꾼 조어성전투였다.

 

1261년 2월과 1262년 7월, 쿠빌라이의 군대는 남송을 향하여 보복성의 군사적 반격을 전개한다. 1265년초, 첫번째 중요한 전투가 발발한다. 양쪽 군대는 조어산의 부근에서 만났고, 쿠빌라이의 군대는 승리를 거두며, 146척의 전선(戰船)을 획득한다.

 

남송의 전선을 획득한 것은 쿠빌라이가 몽골군대에 수군(水軍)을 건립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때 쿠빌라이는 이미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남송을 이기려면, 반드시 강대한 수상작전부대가 있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전선을 빼앗거나 전선을 만들기 시작한다. 쿠빌라이의 이러한 노력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 중국해전사학자가 쓴 것과도 같이, "해양에 익숙하지 않은 기마민족이 이처럼 신속하게 해전에 적응할 수 있던 것은 정말 비범한 일이다" 남송의 변절자인 유정(劉整)은 선박건조계획을 가장 열렬히 고취시켰던 인물이다. 그는 전선이 없으면 몽골인들은 남송을 점령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의 주장은 쿠빌라이가 받아들였고, 몽골인들은 4부 혹은 4익(翼)으로 구성된 해군을 가지게 되며, 쌍방의 첫번째 결정적인 전투에서 그들은 실력을 드러내게 된다.

 

쌍방이 교전한 곳은 양양(襄陽)이었다. 이 전투는 전쟁의 분기점이 된다. 전투는 1268년부터 시작한다. 이는 남송정복전쟁중에서 가장 시간이 오래걸린 전투이고, 결국 몽골인들의 승리로 끝난 전투이다. <<원사>>, 라시드 앗 딘, 그리고 마르코 폴로가 이 전투에 대하여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는 심지어 스스로가 양양성을 공격하는 전투에 참가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번 양양전투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착하기 2년전에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양양과 이웃한 도시 번성(樊城)은 지금의 호북성 북부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한수(漢水)의 양안에 각각 위치한다. 두 성은 한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한수는 남쪽으로 흘러가 무창에서 장강과 만난다. 이들 두 성은 중요성과 독특한 전략적 위치를 지니고 있는데, 장강유역으로 진입하는 길목의 마지막 보루이며, 장강중류의 장한평원, 동남과 서부지역의 교통요지이기도 하다. 이 두개의 성을 빼앗는다는 것은 몽골에게 하나의 진지를 마련해주는 것이며, 남쪽의 다른 지역을 공격하기 용이하게 된다. 라시드 앗 딘에게 이 내용을 전해준 사람은 양양성이 '견고한 성보, 견실한 성벽 그리고 아주 깊은 호성하'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남송의 조정은 여문환(呂文煥)을 이 금성탕지의 총지휘관으로 삼는다.

 

 남송 양양수비군의 저항을 없애기 위하여, 몽골군대는 부득이 그들이 얼마전에 발명한 공성전술과 해전전술을 사용하게 된다. 그들은 처음에는 기아(饑餓)의 수단으로 남송의 수비군들이 반항을 포기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그들은 금방 알게 되었다.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양으로 운송되는 수로를 막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한수의 수역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능한한 남쪽으로 장강까지 장악해야 했다. 남송은 갖은 방법을 써서 수로로 양양성에 물자와 증원부대를 보냈다. 쿠빌라이의 부대는 그들의 행동을 저지할 적절한 방법이 없었다. 방어병사의 의지를 분쇄시키기 위하여, 쿠빌라이의 부대는 이 성에 포격을 퍼부어야 했다. 다만, 남송군대는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기다렸다. 몽골인들은 성을 점령하기 위하여는 참혹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보고, 대포를 사용해서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다.

 

쿠빌라이가 이 전투를 위하여 선택한 지휘관을 보면 그의 용인술이 드러난다. 그가 임명한 장수는 몽골인들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단일한 민족에서 뽑아쓰지도 않았다. 막 몽골에 투항하여 쿠빌라이에게 남송의 정치와 군사약점을 알려준 유정, 쿠빌라이가 등극하기 전에 몽골에 투항한 사천택(史天澤)은 이번 전투에 참가한 가장 유명한 한족장수들이다. 위구르인인 아리하이야(阿里海牙)는 가장 성공적인 지휘관의 하나로 입증되었다. 아슈(阿術)은 이 전투에 참가한 주요한 몽골장군이다. 이스마일(亦思馬因)과 알라딘(阿老瓦丁)은 중동에서 온 무슬림이었는데, 그들이 설계한 화포(火砲)는 양양에 대한 최후공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외에 고려인과 여진인이 만든 전선도 포위과정에서 사용되었다. 오늘날로 보자면, 양양공성전투에 참가한 것은 다국적부대였던 셈이다. 그리고, 쿠빌라이가 어떻게 널리 인재를 썼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가 하나 더 있다. 그는 비몽골인을 뽑아서, 심지어 군사지휘권까지 부여하였다. 이들 장수들이 지휘하는 부대는 서로 다른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쿠빌라이가 임용한 이들 장수들은 5년의 시간을 들여서 비로소 양양을 점령한다. 이들 장수들은 한걸음 한걸음 전진하여 점차 포위망을 좁혀가고, 양양성에 대한 봉쇄를 강화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공성전이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양양성의 주민들은 대량의 식품을 보관하고, 일부 화물선은 가끔 몽골의 봉쇄선을 뚫고, 성에 고립된 한족들에게 공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포위전의 끝이 어디인지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중국어사서에는 전투의 상세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은 확실이 포위공성전이 중단되었다 계속되고 하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간동안, 포위공성은 어떤 때는 해제되기도 하고, 잠시 중단되기도 하고, 실효되기도 하였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들 실패의 원인에 대하여 사료에 지금까지 전혀 설명을 해주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포위공성전의 첫걸음으로 쿠빌라이는 1268년초 산서와 사천의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500척의 작은 배를 만들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정은 이들 선박으로 한수를 지나는 수로를 장악하고자 한다. 몇달후, 그는 양양남부의 백하구와 녹문산에 건축공사를 시작하고, 화물운송하는 작은 배들이 성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 10월이 되어, 쿠빌라이는 다시 몽골지휘관 아슈가 번성을 고립시키기 시작한다. 이때, 양양을 지키던 남송의 수비군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12월 6일, 그들은 몽골군대의 포위를 뚫고자 시도하나, 결국 실패한다. 중국어사서기록에 따르면, 쿠빌라이의 군대는 무수한 남송군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다. 여전히 포위상태인 남송의 사병들은 한동안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참을성을 가지고 남방에서 물자와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얼마지나지 않아 1269년 8월, 남송장군 하귀(夏貴)가 3천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녹문산을 공격한다. 그러나, 몽골군대는 그를 격파했을 뿐아니라, 50척의 작은 배도 노획했다.

 

이때, 쿠빌라이는 확실히 포위전투의 진전에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1269년 2월, 그는 자기가 신임하는 장수인 사천택을 양양으로 보내어 군사배치현황을 시찰하게 하고 개선안을 건의하게 한다. 이어서, 그는 다시 2월에 2만명의 사병을 증원하여 아슈와 유정을 돕도록 지시한다. 4월, 이 두 지휘관은 사천택의 건의를 받아, 백하구와 녹문산의 보루를 하나로 연결시켜, 양양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들 발걸음은 여전히 느렸다. 유정과 아슈가 1270년 4월 다시 7만명의 병사와 5천척의 배를 증파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기는 해도, 그들은 여전히 남송의 수비군의 투항을 받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쌍방은 대치상태를 지속하게 된다.

 

송나라 조정은 여전히 버티고 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국어사료에서는 가사도(賈似道)가 멍청하게 잘못된 정책을 집행하고, 고의로 송나라황제가 몽골의 위협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못느끼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들 사료에 다르면, 가사도는 1260년에 몽골군대를 격파하였다고 거짓말하여 송나라조정이 몽골인의 역량을 저평가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그는 남송조정을 계속 속였고, 양양을 잃으면 그에 대한 신뢰가 파괴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절대로 양양수비군의 투항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일부 사료를 보면, 그는 계속 송나라황제를 속였고, 그리하여 황제는 양양전투상황에 대하여는 전혀 몰랐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사실상, 당시 대신들은 양양이 포위된 상황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다. 한 한학자가 최근에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송사. 본기>>에는 양양과 다른 지역의 수비군에게 상과 하사품을 내린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성지 하나는 몇몇 용감한 관리들의 발탁과 돈을 상으로 내린 기록이 있다. 그들은 정부의 서신을 포위된 양양성에 전달해주었다. 아무도 송나라조정의 일말의 타협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 대하여 질책한 바 없다. 왜나하면 몽골인들에게 양보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하여는 그들이 완전하게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남송의 고급관리는 전체적으로 몽골인들의 실력을 낮게 평가했다. 그들은 절대 양양을 투항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수부근에서 수비전투를 벌이고 있는 송나라군대에게 물자를 계속 공급해주기로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양양을 지키는 수비군도 절대 투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충분한 먹을 거리와 마실 물이 있었다. 단지 의복, 소금 등 비생활필수품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기간의 포위공격을 버틸 수 있었다. 다만, 그들은 가끔 독립소부대를 파견하여 봉쇄선의 돌파를 시도하곤 했었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1270년 3월 18일에 있었던 하나의 전투였다. 1만명의 사병, 기병과 1백척의 작은 배로 구성된 군대는 혈로를 뚫어 몽골부대의 방어선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다만, 몽골인들은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유정은 수백척의 작은 배를 움직여 놓았고, 녹문산의 보루도 막 강화시켜 두었다. 막 도착한 병사들은 멀리서 황급히 달려온 적들을 맞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번 격렬한 전투에서 남송의 군대는 참혹한 피해를 입는다. 그리하여 양양의 원래 기지로 쫓겨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송나라조정은 잘 알았다. 그들의 책임은 계속하여 선박을 보내어 포위공격을 받는 송나라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는 것이었다. 대다수의 선박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몽골인들의 포위가 물샘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나라조정은 봉쇄를 계속 깨트리기로 결심한다. 1269년 8월, 남송의 장수인 하귀는 3천척의 작은 배를 이끌고 녹문산으로 간다. 그러나 격파당한다. 2천명의 사병과 50척의 작은 배를 잃었다. 다음 해 10월, 범문호는 다시 하귀의 뒤를 잇는다. 그는 1천명과 30척의 배를 잃는다. 또 다른 구원행동이 1271년 8월에 발생한다. 이번 시도는 마찬가지로 참패로 끝난다 2천명의 남송사병이 목숨을 잃는다. 1272년 9월, 3천명으로 구성된 남송군대가 성내로 들어간다. 다만, 이번에도 대가를 크게 치른 승리였다. 두 장군중 하나인 장순(張順)이 피살되고, 그의 수하사병중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가 운송하던 많은 물자는 잃어버렸다. 구원부대의 잔여인원은 그들이 천신만고끝에 도달한 양양성에서 철수하려고 할 때, 비로소 자신들이 매복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많은 사병과 장수가 포로로 잡힌다.

 

몽골군대의 봉쇄는 여전히 효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남송수비군대의 투지를 꺽지는 못했다. 그들은 이미 양양과 번성을 남송의 다른 지구와 분할시켰다. 그래도, 그들은 완강한 수비군을 정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성내로 들어갈 수 없었고, 성공한다는 보증은 없었다. 만일 몽골군대가 포위만 하고 진공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영원히 그 곳에 묶여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원군이 필요했고, 이런 대치상태를 깨트릴 필요가 있었다.

 

이때 두 무슬림 화포제작자가 몽골군대에 필요한 도움을 제공했다. 쿠빌라이는 그의 조카이자, 일한국의 칸인 아바하칸에 도움을 요청했고, 군사전문가를 보내어 번성과 양양의 저항을 분쇄시키려고 하였다. 1271년, 아바하칸은 쿠빌라이에게 이스마일과 알라딘을 보낸다. 몽골칸의 왕정에서 짧게 머문 다음 이 두 무슬림은 1272년 전투지구로 간다. 현장을 조사한 후, 공성기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들은 투석기와 탄사기를 만들어서 돌맹이를 멀리까지 던질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강대한 무기가 지원해주자, 아리하이야는 마침내 보루를 함락시키게 된다. 돌맹이와 포탄이 계속 날아오자, 잔여 남송수비군은 더 이상 밀려오는 몽골군대를 막을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번성이 함락되었다. 여문환은 번성 수비군이 궤멸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후, 즉시, 그 자신이 양양의 부대도 이런 거대한 화포의 공격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즉시 투항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두 무슬림 화포제작자는 현장을 시찰한 후, 화포를 성의 동남쪽에 가설하기로 결정한다. 포탄은 150근으로 하였다. 대포를 발사하자, 포탄이 미치는 곳은 모두 가루로 변했다. 다음 해 3월, 상대방의 화력우세에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여문환은 투항하였다. 이리하여, 5년간의 포위공격전은 마침내 끝이 난다. 남송의 북방오랑캐에 대한 항거의 중요한 표지가 결국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