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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초기몽골부락의 개황

by 중은우시 2008. 5. 16.

작자: 미상

 

몽골지구는 자고이래로 유목부락이 활동하던 곳이다. 하(夏), 상(商) 이래로 크고 작은 부족과 부락이 이 광활한 초원지대에 출몰했고, 각 부족과 부락은 흥망성쇠와 교체의 역사는 13세기초에 이르러 비로소 끝이나고, 안정적인 민족공동체인 몽골족으로 형성된다.

 

몽골민족의 기원에 대하여는 다수 학자들이 동호(東胡)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본다.

 

동호는 동일한 족원(族源)을 가지고,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며, 각자 명칭을 지닌 대소부락의 총칭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흉노의 동쪽에 있어 동호라고 불렀다" 기원전 5세기부터 3세기까지, 동호부락은 원시씨족사회의 발전단게에 처해 있었고, 각 부락은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며, 고정적인 거처가 없었다" 기원전 3세기말, 동호족의 부락연맹이 형성되고, 흉노와 대적하며, 계속 서쪽으로 침입한다. 모돈선우(冒頓單于, 기원전 209-기원전 174)때, 흉노는 강성해졌고, 동으로 동호를 급습하여 동호 각부를 멸망시키고, 백성과 가축을 약탈한다. 동호각부는 모두 흉노의 통치를 300년간 받는다(기원전3세기말에서 기원전1세기말까지). 기원48년, 흉노가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리되면서 세력이 약화된다. 오환(烏桓)과 선비(鮮卑)가 기회를 틈타 일어난다.

 

오완, 선비는 동호족의 후예이다. 기원전 209년, 모돈선우가 동호를 멸망시킨 이후, 일부 동호족들은 요하유역의 오환산(烏桓山)에 거주하고, 일부는 황수(潢水)유역의 선비산(鮮卑山)에 거주한다. 그리하여 오환, 선비라고 불렀다.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한화제 영원연간(89-105) 한나라는 흉노를 격파하고, 북선우는 도망친다. 그러자, 선비족들이 그 곳으로 이주하여 거주한다. 흉노의 남은 10여부락은 모두 스스로 선비라 칭한다. 선비는 이때부터 강성해진다. 2세기중엽에 이르러, 즉, 단석괴(檀石槐) 통치기간에 <<삼국지>>의 기술에 따르면, "흉노의 옛땅을 모두 차지했다" 그리하여, "동서2천여리, 남북7백여리"의 광대한 지역을 점거하고, 유례없이 강대한 선비부락군사연맹을 결성한다. 각수령은 땅을 나누어 할거하였다. 단석괴가 죽은 후, 선비부락군사연맹은 와해되어버리고 만다.

 

고고학적 발굴과 한문서적의 기록에 따르면, 선비족의 풍속과 습관 및 언어는 기본적으로 몽고인과 선비족이 관계가 있음을 드러낸다.

 

4세기중엽, 선비족의 일족이 스스로 "거란(契丹)"이라 칭하고, 황수와 노합하(老哈河) 일대에서 생활한다. 흥안령서쪽(후룬베이얼)지역의 선비족의 일족은 "실위(室韋)"라고 부른다. 실위는 <<위서>>에 처음 나타나는데 그 때는 "실위(失韋)"라고 했다. 실위와 거란은 족원이 같으며, 흥안령을 경계로 하여 남쪽을 거란이라고 하고, 북쪽을 실위라고 했다(<<북사>>권94.<<실위전>>>). 6세기이후, 실위족은 남실위(南室韋), 북실위(北室韋), 발실위(鉢室韋), 심말항실위(深末恒室韋), 대실위(大室韋)의 다섯 부로 나뉘고, 각 부는 다시 여러 개의 분지로 나뉜다.

 

언어학자가 언어계통으로 추론하면, 몽골지구에서 활동한 여러 부족은 몽골어계와 돌궐어계로 나뉜다고 한다. 돌궐어자료중에서 '실위'를 '달달(達怛, 즉 韃靼, 타타르)'이라고 불렀다. 732년 오르훈강(斡爾渾河)에 건립된 <<궐특륵비(闕特勒碑)>>의 비문에서는 30성(姓)의 '달달'을 기록하고 있다. 30성달달은 아마도 돌궐에 인근한 강대한 실위부락 혹은 부락연맹의 명칭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 옛날의 대부분 기간동안, 바로 대부분 부락과 지역의 정복자요 통치자였다. 위대하고 강성하여 충분히 존경을 받을만하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들이 위대하고도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으므로, 다른 돌궐부락도 비록 종류와 명칭이 다르기는 했지만 점차 그들의 이름을 썼고, 모두 타타르로 칭해졌다"(라. 몽골부가 강대하였으므로, '타타르'라는 말은 점차 '몽골'로 대체되었고, 실위 여러 부락의 통칭이 되었다.

 

문자로 기록된 몽골에 대한 칭호는 <<구당서>>에서 보인다. 이때는 "몽올실위(蒙兀室韋)"였다. '대실위'의 한 구성원으로, 어얼구나강의 이남지역에 살았다. 이는 라시드의 <<사집>>에 기록된 몽골역사전설과도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전설에 따르면, "개략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고대에 몽골이라고 부르는 부락이 있었는데, 또 다른 돌궐부락과 내분이 있었고, 마침내 전쟁에 이르렀다. 신뢰할만한 귀인들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또 다른 부락이 몽골족을 이겼다. 그리고 대규모로 도살했다. 그들은 겨우 2남2녀가 남게 된다. 이 두 가족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도망쳤다. 그곳은 사방이 산과 삼림으로 둘러싸인 곳이고, 한 가닥의 구절양장과 같은 좁은 길만이 있었다. 온갖 고생을 거쳐 지나가야만 그곳에 닿을 수 있고, 다른 길은 없었다. 바로 이 산의 중간에 풍성한 풀과 좋은 기후의 초원이 있었다. 이 지방을 어얼구니-쿤 이라고 불렀다." 어얼구니-쿤의 뜻은 어얼구나강이남의 산림지대란 뜻이다.

 

몽올실위부가 점차 강대해짐에 따라, 내부에서 여러 개의 새로운 갈래가 나타난다. 이 갈래는 각각 이름을 지니게 되는데, 실위라는 칭호가 점차 사라지고, 12세기이후에는 몽골의 여러부락의 명칭으로 대체된다.

 

"몽올"과 "몽골"은 같은 이름을 서로 다른 한자로 표현한 것이다. "몽골(Mon-gol)"이라는 말은 몽고어로 "영원한 불꽃"이라는 뜻이다.

 

몽골부는 최초에는 그저 네구스와 치얜의 양대씨족을 포괄하는 작은 부락이었다. 그들은 어얼구나강 이남의 산림지대에서 자손을 낳고 살았다. 개략 400년이 지난 후, 부락은 흥성한다. 원래의 씨족부락에서는 약간의 갈래가 갈라져 나간다. 각 갈래는 명칭으로 불리고, 단독으로 하나의 오바헤이(斡巴黑, 씨족)이 되었다. 그들이 어얼구니-쿤을 나왔을 때는 이미 70개의 갈래 즉 오바헤이가 있었다. 이 70개의 오바헤이를 '디르르친 몽골"이라고 불렀다.

 

디르르친 몽골은 10세기 내지 12세기에 모두 우랑하트, 홍지라트, 오라나우트, 쉬선, 수르두스, 이르두르친, 바야우트, 칭지트등 18개부락이 되었다.

 

8세기후반, 디르르친 몽골은 어얼구니-쿤에서 나온 후, 보르테츠를 우두머리로 한 약간의 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커루룬강, 오난강, 투라강의 발원지인 부르한하라둔산일대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금나라때, 그들은 "강력하여 다른 곳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보르지진씨의 시조는 보단차르이다. 보단차르에게서 나온 각 씨족부락은 각각의 이름이 있는데, 이를 '니룬'이라고 한다. 툰비나이의 아들인 하부르칸때 옛날의 키야트라는 칭호를 쓴다. 그의 자손들은 키야트씨라고 부른다. 하부르칸의 손자인 에수가이바투르때에 이르러, 다시 보르지진을 쓴다. 그는 스스로 보르지진-키야트라고 칭했다. 키야트씨는 몽골부의 오래된 성씨이고, 보르지진-키야트는 그 안의 한 갈래이다. 혈통에 따르면, 징기스칸은 키야트인이고, 조상은 이 씨족의 족장이다. 그리하여 징기스칸때부터, 키야트씨는 고귀하고 위대한 것으로 유명했고, 다른 부족들을 압도했다.

 

디르르친몽골과 니룬몽골은 통칭하여 "이크 몽골(대몽골)"이라고 불렀다. 징기스칸은 바로 이를 기초로 몽골제국을 만든다. 국호는 "이크 몽골 우루스"(대몽골국)이다.

 

당시, 몽골어계의 다른 부족은 자라이르부, 타타르부, 메르치트부, 오이라트부와 바르후트부등이 있었다. 투르크어계의 여러 부족에는 크리이트, 나이만과 왕구의 삼대부락이 있었다(내몽고사회과학원역사연구소 <<몽골족통사>> 민족출판사. 2001).

 

전설에 따르면, 몽골인의 조상은 '실위인'이다. 고대이래로 나무잎으로 옷을 하고, 나무와 돌로 기물을 만들었다.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미 여름에는 정착생활을 하고, 겨울에는 물과 풀을 쫓아다니는 반정착생활을 하기시작했다.

 

수렵은 실위인들의 경제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활은 당시의 주요한 생산도구이고, 화살이 길었는데, 주로 사냥에 쓰였다. 목축업은 아직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말, 소, 돼지는 길렀지만, 아직 양은 기르지 않았다. 농업은 그저 조(粟), 보리(麥), 기장(黍)을 심는 정도였고, 수확량은 적었다. 수, 당나라때까지 실위의 농업은 여전히 나무를 깍아 도구로 쓰고, 사람이 갈고, 밭의 수확은 아주 적었던 원시수준이었다.

 

실위인은 겨울에 물과 풀을 찾아 이동했는데, 우차(牛車)가 주요한 교통용구였다. 우차에는 버드나무로 짠 고정된 집이 있었다. 이런 차를 몽골어로는 "구레얜(古列延)"이라고 불렀는데, 13세기까지 썼다. 당시에는 모피에 대하여 가공을 이미 하였고, 가죽으로 배를 만들고, 뿔과 뼈로 화살을 만들었다. 유가공품과 양조업도 어느 정도 발전했다.

 

8세기중엽에 서쪽으로 이전하여 긍특산(肯特山)으로 간 후, 840년대까지 몽골부는 시종 수렵부락이었다. 이후, 몽골부는 점차 유목부락으로 넘어간다. 그 원인은 서쪽이전후 돌궐의 목축업생산기술의 영향을 받고, 원래 몽골초원을 통치하던 회흘(回)칸국840년에 키르키즈에 멸망한 후, 천산남북로로 이주한다. 이리하여 삼하유역은 몽골인의 천지로 바뀌고, 유리한 자연조건과 선진적인 생산기술은 몽골족이 유목업으로 전환하는데 좋은 기반이 되었다. 기르는 것도 말, 소, 양과 낙타가 되었다. <<거란국지>>에 따르면, 몽골인들은 "거란과 전쟁하지 않고, 오직 소, 양, 낙타, 말을 기르며, 가죽을 거란과 교환한다"고 적고 있다. 10세기이래로 몽골인은 이미 상당한 수량의 잉여가축과 축산품을 갖게 되고, 이를 가지고 중원지역과 중앙아시아지역의 비단, 베, 금은장식품과 교환한다.

 

몽골인이 유목으로 전환한 후, 유목업은 주요한 경제부문이 된다. 그 특징은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고, 단순이 농업생산이 종사하지 않았다. 유목경제의 발전에 따라, 유목민중에서 일부는 분리되어 전문적으로 농업에 종사하게 된다. 그들은 정착생활을 한다. 투라강과 크루룬강 유역은 사람들이 비교적 빨리 정착한 지역이다. 이곳에는 이미 많은 촌락과 성곽이 있다. <<몽골비사>>의 기록과 출토문문레 따르면, 10세기에 오난강유역에 거주하던 몽골부락은 이미 발달된 야금술을 보유했고, 각종 철제공구와 단철을 위한 풍상(風箱)을 갖추고 있었다. 금, 은 장식품을 제조할 뿐아니라 철마차도 만들 수 있었다.

 

몽골인들의 남자조상은 징기스칸으로부터 2000년전의 네구스와 치얜이다. 전설에서의 네구스와 치얜은 아마도 고대시대 두개 씨족의 명칭일 것이다. 그들은 어얼구니-쿤에서 후손을 400년간 번식하였다. 원래의 씨족공동체에서 70개의 갈래인 오바헤이가 갈라져 나간다. 몽골인들의 오바헤이는 공동의 남자조상에 속한 사람으로 구성된 혈연집단이다. 매 오바헤이는 모두 혈연적으로 순수성을 지키고 있고, 명확하고 상세한 계보가 있어, 대대로 전해진다. 친족간에는 상호 혼인할 수 없고, 그저 외족과만 통혼한다. 이런 고래의 족외혼은 몽골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12세기의 몽골사회에서도 이런 현상을 볼 수 있었다.

 

고대의 몽골씨족은 재산을 공유했다. 그리고 구성원들의 지위는 평등했다.

 

11세기, 몽골의 씨족제도는 기본적으로 해체된다. 12세기초에 초기 몽골국이 성립된다. 송나라는 "몽고(蒙古)"라고 불렀다. 금나라때는 "몽골국(朦骨國)"이라고 불렀다. 창시자는 징기스칸의 삼대조인 하부르칸이다. 1147년 하부르는 자칭 조원황제(朝元皇帝)라 칭하고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한다.

 

1115년 여진족들이 금나라를 세우고, 10년간  요나라를 정복한다. 이 기간동안 막남몽골의 여러 부족도 점령한다. 1137년 금희종은 만호 후사후를 파견하여 몽골을 공격한다. 몽골의 요지에 깊이 들어간 후 양초가 끊겨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부르칸은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여, 해령에서 금나라군대를 대파한다. 금나라군은 실패후, 희종이 하부르칸을 초청하여 요나라로 불러 화의를 하자고 하면서 암살하고자 한다. 하부르칸은 요나라에 들어온 후 얼굴을 맞대고 희종을 모욕주고, 몽골로 돌아가버린다. 희족은 사신을 파견하여 하부르칸을 붙잡고자 하나 오히려 피살당한다. 금나라 종실의 내부에서 좌승상 다라이가 반란을 일으킴에 따라, 희종은 몽골을 신경쓸 틈이 없게 된다. 1139년 다라이가 피살된 후, 그 아들 텅화가 부친의 옛 부족을 이끌고 요동으로 쳐들어간다. 그리고 몽골에 구원을 요청한다. 하부르칸은 이 기회에 금나라국경선을 넘어가서 교란시키고, 금나라군대를 격파한다. 이후, 금나라 올술이 친히 8만정예병사를 이끌고 몽고로 진공한다. 그래도 몽골을 꺽지 못한다. 1147년, 금나라와 몽골은 화의를 맺는다. 조건은 금나라군이 철수하고, 크루룬강이북의 27개 마을을 몽골에 넘겨주는 것이며, 금나라는 매년 몽골에 일정한 수량의 소, 양과 양식을 바치는 것이다.